韓 IT·전자산업 '목표 부재 아노미'에 빠졌다

[창간 12주년 특별기획 '1등 한국을 돌아본다']


[특별취재팀] TV 휴대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의 분야에서 한국 IT·전자산업은 이미 세계 최고 위치에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쟁 업체와 달리 삼성과 LG 등이 '오너 경영'을 통해 승부처에서 과감하고 신속한 선행 투자를 단행한 결과다. 하지만 앞날이 마냥 보장돼 있는 것은 아니다. 애플 태풍에 거함 노키아가 맥없이 몰락해버린 사례에서 보듯 이 시장은 한 치 앞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기업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다. 세계 1등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성장하던 과거의 전략이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스스로 혁신을 통해 끝없이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아이뉴스24는 창간 12주년을 맞아 한국 IT·전자산업이 새롭게 헤쳐나아갈 방향에 대해 5회에 걸쳐 시리즈로 조명한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1)韓 IT·전자산업 '목표 부재 아노미'에 빠졌다

2)韓 스마트폰, 아이폰 잡고 '퍼스트 무버'로

3)세계 TV 시장 '메이드 인 코리아' 굳히기

4)'격차 늘린다'…한국 반도체, 패러다임 변화 주도

5)차세대 디스플레이로 세계 제패 꿈꾼다

"지멘스, 휴렛팩커드(HP), 소니, IBM... 예전에는 삼성이 벤치마킹하고 싶어하는 기업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삼성의 보고서에서 '벤치마킹'이라는 단어를 보기 힘들게 됐습니다. 선두주자를 이미 따라잡았거나, 롤모델로 삼았던 기업들이 홀연히 시장에서 낙오되는 경우가 생겼으니까요. 따라잡는 위치에서 추격당하는 위치가 된 것이죠."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한국의 글로벌 IT기업들이 고민에 빠졌다.

TV, 휴대폰 등 각종 완제품 분야의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 1등을 차지하고 있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부품의 기술력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1등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IT산업을 담당하는 장성원 수석연구원은 이러한 현상을 '목표 부재의 아노미'로 진단한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1등을 앞지르자'는 목표만 설정하면 됐지만, 더 이상 따라잡아야 할 선두주자가 없어진 상황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담은 목표를 직접 설정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는 것이다.

◆소니와 노키아의 몰락에서 배운 교훈
"트렌드 만들어야 살아남는다"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모바일 중심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시장이 변하는 속도가 무서울 정도로 빨라졌어요.

그러다보니 1등을 하고 있는 기업도 '이게 맞는 길인가' 하면서 헷갈려하는 경우도 생기죠. 그러다가 순식간에 휘청이는 거지요.

애플이 단숨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것도, 소니나 노키아가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도 순식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정신차리지 않으면 제2의 소니, 제3의 노키아가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전략을 세우느냐가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겁니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성원 수석연구원(사진)은 "애플이 주목을 받은 것은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해 만들었기 때문"이라며 "트렌드를 만들 수 있으냐 없느냐가 앞으로 선두 기업을 만드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는 고객을 끌어들일 만한 소프트웨어 역량,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사실 이런 것은 지금 1위를 달리고 있는 국내 기업들도 소홀히 했던 부분입니다. 특히 이 분야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추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성원 연구원은 한 번 1등을 해보았던 기업들의 경쟁력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소니의 경우, 일본 특유의 기술력 자체도 대단하지만 콘텐츠 사업을 해 본 역량도 갖추고 있습니다. 충분한 저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략 실패가 뼈아픈 사례에 속하죠.

경영진의 리더십이 보강되고 사내 자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언제든 치고 올라올 수 있다고 봅니다. 전통적인 강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나 인텔도 모바일 시대로 접어들면서 휘청이고 있지만 충분한 역량이 있기 때문에 쉽사리 시장을 뺏기지는 않을 겁니다.

반대로 애플이 지금은 모바일 기기 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가 설계해 놓은 로드맵 이후를 후임자들이 어떻게 끌어가느냐에 따라 현재의 지위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한편, 무섭게 따라붙고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현지 완결형 생산체제' 를 강조했다. 부품 조달과 연구개발(R&D), 생산기지, 영업마케팅, 유통과 서비스 등을 현지에 맞게 확립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중국은 더 이상 중저가 제품만 만들고 싼 제품만 팔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 최대의 내수 시장이자 생산기지라는 지위를 활용해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들이 중국에서는 유독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 속으로 보다 들어가야 합니다. 중국 현지 부품을 조달하고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깔이나 문화를 반영한 영업과 마케팅을 전개하는 한편, 중저가 제품과 고부가가치 제품을 모두 구비하는 투트랙 전략이 필요합니다. 콘텐츠 업체와의 협업을 모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죠."

장석원 연구원은 마지막으로 정부의 역할도 언급했다.

"IT의 융합이 가속화되고 모바일 시대로의 재편이 확대될수록 기업간 영역 구분 없이 싸우는 양상이 전개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전문성 있는 중소벤처기업 육성, 부품·소재 분야 연구개발, 관련 인력 양성 등을 지원해줘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 생태계를 만드는 일은 단일 기업이 쉽게 하기 어려운 과제이니까요. "

실제로 세계 시장에서 저만치 앞서 가면서 국내 기업들의 롤모델이 되어주던 기업들 중 상당수들은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핀란드의 국민 기업으로까지 불리며 10여년간 세계 휴대폰 시장을 주름잡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최근 3분기 연속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는 수모를 당했다.

단말기의 경쟁력 요소가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운영체제)로 옮겨가고 있는데도 심비안이라는 폐쇄적 체제를 고집한 탓이다.

세계 최초의 휴대폰을 만들기도 한 모토로라도 애플의 아이폰 쇼크를 견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난해 8월 구글에 인수되기에 이르렀다.

뛰어난 기술력과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로 세계 TV 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소니도 삼성전자와 LG전자에 밀리면서 이제는 옛날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처지가 됐다. 삼성전자는 압도적인 점유율 격차를 기록하며 6년 연속 세계 TV 시장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몰락을 경험한 기업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시장의 흐름을 읽고도 변화를 두려워한 나머지 애써 외면하거나 적절한 때에 대응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1등의 자리에 취해 혁신을 게을리한다면 1등의 자리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혁신에 목마른 시기…다시 '위기론' 되새길 때

노키아, 소니 등이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국내 기업들에게 선두의 자리를 내 주면서, 이제 국내 기업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급격하게 변하는 IT시장과 전자업계의 트렌드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문제는 트렌드를 직접 만들고 길을 터 나가는 시장 창조의 경험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1등을 유지해야 하는 국내 기업들에게 더 이상 '우왕좌왕' 전략은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서운 현실이다.

IT업계 관계자는 "국내 IT산업이나 전자산업의 경쟁력이 워낙 세계적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내 기업들이 따라잡은 경우는 있어도 뒤집힌 적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혹시라도 추격을 당하는 사례가 나온다면 더 빨리, 더 쉽게 무너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당장 위기의 징후가 닥친 것은 아니다.

휴대폰 시장에서는 국내 업체인 삼성전자, LG전자, 팬택이 스마트폰 강자인 애플과 시장을 양분하고 있으며, TV는 세계 시장 1위와 2위를 휩쓸고 있다.

국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업체들은 세계 경기 침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경쟁 업체들을 제쳤다. D램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국내 기업의 점유율은 거의 70%에 육박하며, 디스플레이 산업도 세계 1위 생산국 지위를 유지하는 등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업들의 우려는 커진다. 1등을 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제조 능력이나 학습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따라잡는 데에는 큰 문제 없이 잘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콘텐츠 파워, 소프트 파워가 중요해지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1등을 유지하는 지금이야말로 최고 경영자들의 고민이 더 심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기업의 중요한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최고 경영자들의 위기경영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힘을 얻는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2년 전 경영 복귀를 선언하면서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신수종사업 육성을 강조한 바 있다.

주요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2010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매출 150조원, 영업이익 15조원 돌파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이 회장의 위기경영은 올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 회장은 신년사에서 "기존 사업의 성장이 정체되고 신사업의 생존 주기는 빠르게 단축되는 등 앞으로 예상하지 못한 변화들이 나타날 것"이라며 "이종간 경쟁, 기업군간 경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에서 열린 전자제품 전시회 CES에 참석해서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금방 뒤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긴장이 되고 있다"며 "휴대폰과 TV 1등에 만족하지 않고 더 다양한 선도 제품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리스크 관리 능력은 국내 기업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경쟁력이다. 이를 통해 적기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할 수 있었고, 시장의 선두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기를 바탕으로 세계 시장의 선두 주자가 된 기업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을 창조해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기업들의 도전 과제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특별취재팀: 김지연, 강현주, 박웅서, 김현주, 박계현, 백나영 기자

/특별취재팀 hiim29@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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