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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100년, 한국 경제 장강(長江)이 되다


평전 '담담여수(淡淡如水)'로 재구성한 이병철 일대기

네 번의 학교중퇴, 무위도식, 노름과 요정출입, 200만평 대지주에서 무일푼으로…. 요즘 흔한 드라마 단골소재쯤 될 법하다. 여기서 끝났다면 말이다. 하지만 28세의 이 주인공의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오는 12일 탄생 100년을 맞는 호암 이병철 회장의 얘기다.

담담여수(淡淡如水)는 부제와 같이 '흐르는 물처럼'의 뜻을 담아 앞서 발간된 호암어록과 자전을 재구성한 개정증보판 성격이다. 제호는 호암이 평소 즐겨 쓰던 말로 논어 등에서 인용됐다. 논어는 호암이 평생 즐겨 읽었던 책으로 '담담여수'는 말년의 호암이 다다르고자 했던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무욕무탐의 경지를 뜻한다고 한다.

호암은 평생 돈이 아니라 창조, 도전의 산물인 기업을 남기고자 했으나 이같은 소망마저 결국 집착이라 생각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담담여수'는 물이 흐르는 가운데 격랑과 장애로 전환과 변환이 있더라도 본질을 잊지 않고, 상황에 적응해 가면서 부서지고 다시 모아짐을 반복하며 물결을 이루어 가는 의지로도 많이 인용된다.

이병철 회장과 삼성에 대한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나, 근현대사의 격랑 속 기술혁신과 인재 두 가지 가치를 앞세워 지금의 삼성을 있게 한 원동력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멈추지 않는 물줄기

26세에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호암에게도 학교를 중퇴한 뒤 자신의 운 없음과 시대를 한탄하며 노름과 실의에 빠져 지낸 날이 있었다. 그러다 사업의 뜻을 세우고 알던 이들과 의기투합해 1936년 차린 '협동정미소'가 그의 첫 도전이었다.

정미소사업은 이후 운수업 등으로 확대되며 궤도에 오르는 듯 싶었다. 빌린돈으로 손댄 토지사업으로 1년만에 200만평 대지주가 되기도 했으나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 은행융자가 막히면서 말 그대로 2년만에 모든 사업을 접는다.

호암은 이를 통해 첫 사업 철학을 얻는다. 사업에는 반드시 시기와 정세가 있고, 요행과 교만을 경계해야 하며, 직관력과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2개월의 시장조사 끝에 호암은 청과물과 건어물, 잡화 무역업에 다시 손을 댄다. 이를 위해 대구시 서문시장 근처에 250평 남짓한 점포를 사서 '삼성상회'라 이름 짓는다. 1938년 3월1일. 그의 나의 28세였다. 삼성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의 출발이었다.

그뒤 호암은 거침없이 사업을 확장해 간다. 1년뒤 조선양조를 인수하고, 1948년에는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한다. 전쟁을 거쳐 1951년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재 설립한 뒤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 1957년 효성물산을 설립, 한일은행 한국타이어를 사들였다.

1960년대 들어서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 눈을 돌린다. 1963년 라디오서울, 동양텔레비전방송, 1965년 중앙일보,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성균관대를 인수하는 등 육영 문화 복지사업에 나선 것.

그리고 1969년 지금의 삼성전자의 출발이 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이후에도 1970년 삼성NEC, 1974년 삼성석유화학공업, 중공업 , 1977년에는 조선, 정밀 등까지 사업을 확장한다. 1980년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기까지 50년을 한국 고도성장과 흐름을 같이 했다.

같은기간 우리 근대사는 한일합방(1910년)과 만주사변(1930년), 중일전쟁(1937년), 태평양전쟁(1942년), 해방(1945년), 대한민국정부수립(1948년), 6.25전쟁(1950년), 5.16(1961년), 신군부정권수립(1980년) 등 말 글대로 격랑의 시기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숙원사업으로 10여년에 걸쳐 세 번이나 도전해 완성시킨 한국비료공장이 1967년 완공과 함께 국가에 헌납되고, 신군부의 매스컴 재편성 조치에 따라 TBC가 통폐합되기도 했지만 삼성의 물줄기를 가로막지는 못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

1948년 설립된 삼성물산공사는 1년반 만에 거래액 기준 무역업에서 최 선두권에 섰지만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면서 전재산을 처분하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다행히 조선양조에 비축된 3억원의 자금으로 호암은 1951년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재기에 나선다. 3억원으로 시작된 삼성물산은 설립 1년만에 그 20배인 60억원대 기업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호암은 무역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물자부족 시대 무역은 국가의 최우선 과제이기도 했지만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살 유일한 길은 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호암이 제조업 진출을 결심한 것은 전쟁의 포화가 여전한 1952년. 불안한 시국으로 자금회전이 오래 걸리는 생산공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는 것은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호암은 1953년 4월 삼성물산 사무실내 제당회사의 창립사무소를 설치하고 휴전협정이 이뤄지기 한달전인 6월 이름을 '제일제당공업주식회사'로 짓고 제조업에 뛰어든다. 호암은 제일제당 설립 2년만에 '거부'의 칭호를 듣게 되나 또다시 '모직'사업에 눈을 돌린다.

당시 국내에는 면방공장이 몇 개 있기는 해도 섬유산업은 싹도 트지 않았던 시절. 양복이라는 게 미군 군복을 염색한 게 대부분이었고 이른바 마카오복지는 한 벌값이 웬만한 월급쟁이 봉급의 석달치를 넘었다.

자본·기술·시장 어느면에서도 위험부담이 크다고 모두 말렸지만 1955년 소모공장을 시작으로 방모 염색 가공 등 공장을 잇달아 완성, 1956년 본격 가동에 나선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호암은 1957년 이미 '재벌'로 불린다.

그러나 이후에도 35만톤 세계 최대규모의 비료공장 설립을 결정했을때도, 정부 인허가가 필요한 전자산업과 막대한 설비투자와 기술혁신의 주기가 짧아 무모한 모험이라는 반도체 산업에 진출할 때도 주위의 만류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행, 성공을 일궈냈다.

설탕, 모직 등 수입대체 소비재에서 출발, 전자 석유화학 조선 기계 중화학 정밀기계를 축으로 한 방위산업으로 업종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다시 반도체 컴퓨터 산업용 전자기기 유전공학 등 최첨단 산업분야에 진출하면서 반세기 넘게 최고의 위치를 지킨 비결은 바로 이같은 끊임없는 도전이었다.

호암은 기업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모험을 뛰어넘어 성공을 쟁취해야만 삼성의 내일이 열린다고 확신했다.

1979년 미국 뱁슨 대학은 호암에게 최고경영자상을 수여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일으킨 것은 항상 그 사업의 시장성이 가장 낮은 수준에 있을 때였고, 극히 곤란한 환경에 처해있을 때였다"며 "끊임없는 개척정신으로 성취한 여러 사업의 업적은 사회에 대한 봉사, 그것"이라고 평가했다.

◆본질은 기술혁신과 인재

후발주자로 뛰어든 전자기기사업과 반도체사업의 성공은 삼성의 기술혁신의 결과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1970년 첫 TV생산을 시작으로 1971년 국내 첫 국산TV 수출을 시작으로 1978년에는 흑백TV 생산 세계 1위에 오른다. 1983년에 시작된 반도체 사업 역시 같은해 자체기술로 개발한 64KD램의 첫 해외수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일본의 기술은 우리를 4년정도 앞서고 있었다. 이를 1985년 256K D램, 1986년 1M D램을 개발하며 7개월수준까지 앞당겼고, 1988년 4MD램을 거쳐 1989년 16M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기술격차를 좁혔다.

일본과의 기술격차는 1992년 64M D램을 계기로 역전, 1994년 256MD램, 1996년 1GD램으로 이어지는 기술우위를 다지면서 1993년을 전후로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히타치, NEC 등을 따돌리면 불과 10년만에 세계 1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우리 경제가 제2 도약을 이룩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반도체 컴퓨터, 자동화(로봇) 등 기술집약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산업분야 외에 달리 없다.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술인력의 확보와 축적이 필요하며, 이같은 기술인력 확보는 단시일에 이뤄질 수 없어 장기계획을 갖고 양성해야 한다."

1987년 타계 1년전 삼성종합기술원 기공식에서도 "오늘날 과학기술은 문명의 원천, 인류 진보와 번영의 원동력"이라며 "영원한 기술혁신과 첨단기술 개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야말로 자원빈국인 우리나라가 살 수 있는 길이며, 국가와 민족의 융성을 약속해 주는 것"이라 강조했다.

호암은 삼성 성장의 비결로 '인재'를 꼽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삼성의 성장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인재의 힘"이라 역설했고 스스로 "일생의 80%는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도 했다.

또 그에게 가장 즐거운 일은 '삼성은 인재의 보고'라는 말을 듣는 때 였다고 한다. 그에게 인재를 육성하지 못하는 경영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실경영자였다.

박영례기자 young@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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