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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P 10년의 발자취 - (상)] 기업 정보시스템의 새로운 패러다임


 

1995년 11월 1일, 독일의 소프트웨어 기업 SAP가 국내에 지사를 설립했다. 그들이 국내에 들고 들어온 소프트웨어는 'R/3'. 회사 이름만큼이나 낯선 이 소프트웨어가 바로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솔루션의 세계 최고 브랜드였다.

이후 10년이 지났다. 낯설기만 했던 ERP는 이제 '기업용 애플리케이션의 꽃'으로 불리며 굴지의 국내 기업들의 정보시스템을 장악해갔다. ERP는 기업 정보시스템의 가장 기본이 된 것이다. 이후 CRM, SCM 등 ERP 주변의 애플리케이션들이 '확장 ERP'란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기업내 모든 다른 정보시스템들도 ERP를 기본으로, ERP와 연동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ERP 스스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제 그 누구도 ERP를 '거대한 패키지 소프트웨어'로 인식하지 않는다. 애플리케이션의 꽃을 넘어 이제 '플랫폼'의 자리에 올라섰다. 기술적으로도 ERP는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으로 진화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SAP코리아의 10년을 되돌아보고, ERP 시장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편집자주]

◆ 정보시스템의 새로운 패러다임

1990년대초 울산에 소재한 알루미늄 제련기업 대한알미늄은 국내 최초로 대규모 알루미늄 압연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외국계 기업이던 것을 현대그룹이 인수해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

이 회사 전산실 멤버들은 특별한 미션을 부여받았다. 영업사원이 오더를 받은 이후 발주부터 납기까지 전 과정을 일괄 관리할 수 있는 전산시스템 구축의 특명을 받은 것. 당시 이 회사의 전산시스템이라고 해야 재무, 회계, 영업 등을 관리해주는 별도의 소규모 프로그램이 고작이었다.

전산실도 없던 시절,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구축해준 시스템이었는데, 제대로 관리가 안돼 극히 일부 기능만을 부서별로 사용해왔다. 압연공장 건설 프로젝트가 본격화하면서 전산실도 새로 꾸리고 전담인력이 가세하면서 대형 정보시스템 구축도 시작된 것이다.

경험이 부족했던 당시 전산실 인력들은 일본의 기술제휴 업체로 장기연수를 간다. 그들이 운영하는 정보시스템 노하우를 전수받아 국내에도 그대로 구현하려 한 것이다. 당시 일본 기업의 정보시스템은 영업부터 생산, 납기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영업사원이 현재 공장의 생산일정을 파악해 고객의 주문을 언제부터 생산해 언제까지 공급할 수 있는지를 사전에 점검해볼 수 있고, 이후 주문을 받아 발주를 내리면 자동으로 생산라인으로 전달돼 생산이 시작된다. 생산공정의 전 과정이 정보시스템으로 관리되고, 이후 고객에게 공급되기 까지 모든 것이 정보시스템의 지원아래 관리됐다.

대한알미늄 전산실 직원들은 거대한 시스템 운영에 놀라면서도 더 욕심을 낸다. 생산관리 전반이 아니라 회계와 재무관리까지도 생산과 바로 연계되는 시스템 구축을 구상한다. 영업사원이 발주요청서에 단 한번 입력한 데이터만으로 생산은 물론 최종 회계처리까지 일괄 처리되는 시스템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정보시스템 구축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조금씩 구축된 시스템은 10여년을 흐르면서 계속 수정, 갱신되면서 운영돼 왔다.

1995년 11월, SAP코리아가 설립되기 전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국내 기업들의 정보화 시스템은 이렇듯 내부 전산실에서 직접 구축, 운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한알미늄의 경우,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통합' 시스템이라는 선진적인 개념을 도입한 사례에 속한다. ERP를 자체적으로 구현하려 한 시도였던 것이다.

만일 이 회사가 ERP라는 개념을 알았고, 관련 패키지 솔루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됐을까. 현재 이 회사는 주인이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고, 그러면서 2003년부터 외국산 ERP 패키지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기업 전산실은 대부분 영업, 회계, 생산, 자재관리 등이 별도의 시스템으로 구축돼 업무를 지원해왔다.

영업은 영업시스템 따로, 회계는 회계 시스템 따로, 생산은 생산시스템 따로 구축돼 운영돼왔다는 얘기다. 시스템간의 연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연동이 되거나 극히 일부 데이터 전송 차원의 연동이 고작이었다.

영업시스템에서 입력된 데이터는 프린트돼 생산부서로 전달되고 생산부서는 다시 생산시스템에 관련 데이터를 입력해 관리하고, 회계부서 역시 영업 및 생산데이터를 담당자가 다시 입력하고.

내부적으로 이런 시스템을 구축 운영하는 것은 기업마다 다른 업무 프로세스와 기업문화를 반영한 독특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당연시 돼왔다.

이런 상황에서 ERP의 등장은 기업 정보시스템에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기업 경영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통합해 관리해주는 거대한 소프트웨어다. 단 한번 입력된 데이터가 재입력 필요없이 전 부서를 흐르며 일괄적인 관리가 가능하다. 더구나, ERP는 패키지 소프트웨어다. 이미 그 안에 업무 프로세스가 짜여져 있다.

ERP 소프트웨어를 도입한다는 것은 그것을 들여다 회사의 실정에 맞게 이러저리 뜯어고치고 새로운 것을 추가해넣고 필요없는 것은 잘라버리고 그런 개념이 아니다. 그냥 ERP 소프트웨어가 처음 설계된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회사의 그동안 업무 프로세스를 새로 도입된 ERP 소프트웨어에 맞추라는 얘기다.

ERP 개발업체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전세계적으로 이미 검증된 글로벌 표준의 업무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설계된 제품이라는 것, 따라서 ERP 소프트웨어를 도입해 글로벌 업무 프로세스에 맞게 조직의 업무를 바꾸라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기업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얘기였다. ERP 도입 초기,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무리하게 자신의 업무에 맞게 '뜯어 고치려는' 시도가 많았던 것은 당시 국내 기업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잘 말해준다. 초기 ERP 공급업체들의 최대 난제는 바로 이같은 고객들의 '우리만의 시스템' 요구였다.

공급업체들도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고 이 과정에서 패키지 본연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ERP가 국내에서는 제대로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 적지않았고, 한국 기업의 특성에 맞게 유연한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앞세운 이른바 '한국형 ERP' 업체들이 ERP 초기 시장에서 적지않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초기 혼돈을 거쳐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ERP는 황금기를 맞는다. 이후 10년이 흐른 지금 ERP는 기업용 소프트웨어의 '꽃'으로 부상했다. 기업 정보시스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시스템으로 ERP가 자리를 확고히 한 것이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KRG가 지난 10월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매출 1천억원 이상의 300여 국내 기업들 가운데 제조, 건설, 유통업종의 경우 ERP 소프트웨어 도입률이 59%에 이르렀다.

ERP 시장 규모는 올해 약 4천780억원, 내년에는 5천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1999년 약 900억원 규모에서 2000년 1천500억원으로 처음으로 1천억원대를 돌파한 이후 5년만에 5천억원 수준으로 성장한 것이다. 기업용 소프트웨어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 SAP 10년, ERP 10년

2005년 11월1일은 세계 최대의 ERP 솔루션 업체 독일 SAP가 우리나라에 지사를 세운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SAP코리아 설립과 함께 국내 ERP 시장은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우리나라에 ERP 시장이 태동한 지 10년이 된 셈이다.

SAP코리아가 정식 출범했을 당시, 국내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 특히 패키지 소프트웨어 시장은 경영정보시스템(MIS) 이란 이름을 단 소규모 경영관리 패키지 소프트웨어들이 춘추전국 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회계관리, 자재관리, 유통관리 등 각 관리 영역별도 별도의 '작은' 패키지들이 시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러나 SAP가 들고온 ERP 패키지는 이들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은 거대한 것이었다. SAP가 한국 시장에 발을 디딘 계기는 삼성전자 덕분이다. 삼성전자가 자랑하는 정보시스템 '디지털 신경 시스템(DNS)'가 바로 SAP의 ERP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5년부터 SAP의 ERP 도입에 나섰고 이를 계기로 SAP가 국내 시장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ERP를 도입하면서 국내 다른 대기업들도 ERP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SAP가 국내 시장에 들어오면서 오라클을 필두로 한 후발주자들도 하나둘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소규모 업무용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만들던 국내 중소 SW기업들도 ERP라는 개념에 눈을 뜨기 시작, '한국형 ERP'라는 깃발 아래 국산 ERP 개발에 본격 나서게 된다.

출범당시 7명으로 출발한 SAP코리아는 10년후 현재 200여명으로 불어났다. 국내 400여개 기업, 600여개 사업장에 ERP를 구축했고, ERP 시장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다.

ERP의 대명사였던 'R/3'는 1999년 '마이에스에이피닷컴(mySAP.com)'으로 다시 2003년 'mySAP ERP'로 이름을 바꾸었고, 10년째인 올해에는 '넷위버'라는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아래 차세대 애플리케이션 시장을 넘보고 있다.

◆ SAP가 바라본 차세대 ERP

SAP는 세계 최대 ERP업체답게 이 분야 기술을 리드하고 있다. SAP가 올해부터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애플리케이션 플랫폼 '넷위버' 기반의 전략은 그런 점에서 향후 ERP의 모습을 미리 그려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IT 업계의 최대 화두인 '서비스 기반 아키텍처(SOA)'에 대한 SAP의 대답이 바로 '넷위버'다. 넷위버는 비즈니스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다. 단순히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플랫폼이라는 얘기는, 또 이것이 SOA 솔루션이라는 얘기는, 기업의 모든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독립적이고 재사용가능한 하나의 서비스로서 제공한다는 뜻이다.

ERP가 특정 기능 모듈들이 모여 하나의 프로세스를 구현하는 소프트웨어였다면, 넷위버 플랫폼은 하나의 프로세스가 모듈화돼 하나의 서비스를 구성해 언제든 제공된다든 얘기다. 기업은 넷위버 플랫폼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끌어다 자신이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단위 모듈의 개념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기능 중심이 아닌, 업무 프로세스 중심으로 말이다.

이같은 차세대 개념을 앞세워 SAP는 넷위버를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과 같은 정보시스템의 필수적인 플랫폼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이같은 기술적 변화와 함께 SAP는 '대기업용 ERP 솔루션 업체'라는 이미지를 벗고 중소기업 시장에 잔뜩 주목하고 나섰다. 대기업 시장은 이미 치열한 경쟁이 한풀 꺾인 곳. 남은 미개척지 중소기업을 공략하겠다는 뜻이다. 'mySAP All-in-one'과 'SAP Business one'은 중소기업 시장을 겨냥해 내놓은 SAP의 ERP 패키지이자, 야심작이다.

ERP 솔루션이 만능은 아니다. 기업에서 자체적으로 ERP를 개발해 운영하는 것이 자신에 꼭 맞는 최적의 시스템일 수 있다. 그러나 ERP 패키지를 도입하는 것은 구축 기간이 크게 단축됨으로써 비용이 크게 절감될 수 있다. 검증된 업무 프로세스를 도입하게 됨으로써 기업 전반의 업무개선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이같은 장점을 앞세워 ERP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고 기업 정보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게 됐다.

KRG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내 대부분의 기업들이 글로벌 환경에 대응하고 비즈니스 혁신을 위해 ERP를 도입하고 있고, 정보화의 기초 토대 마련이나 업무의 통합측면에서는 성과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자체적으로 ERP를 개발해 운영중인 기업들도 패키지 도입을 고려중인 경우가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는 분석도 덧붙인다.

그러나 ERP에 대해 '프로세스 혁신'이나 '여타 시스템과의 통합성' 측면에서는 기대에 못미친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는 ERP 도입 초기부터 제기됐던 업무 프로세스 혁신으로서 ERP의 도입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는 얘기가 된다.

도입 10년, 이제 ERP는 진정한 프로세스 혁신의 도구로서 거듭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김상범기자 ssanba@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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