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웅 칼럼] 경로(經路)의 저주


사람이 길을 만들고, 길이 사람을 만든다.

경로의존성이란,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 이제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된 과거의 제도, 법률, 관습, 문화가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왼쪽으로 가는 영국의 차가 흔히 인용되는 사례다.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왼쪽으로 가는 영국 차

오래전 영국에서 마차는 왼쪽 통행을 했다. 오른쪽으로 다니면, 대부분 오른손잡이인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이 자칫 지나가는 행인을 때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나중에 만들어진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왼편으로 다니게 됐다. 이 ‘자연스러움’의 결과로 영국과 영연방 일부 그리고 따라서 채택한 일본 등은 두고 두고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오른손으로 수동식 기어를 조작하기에 편하게 핸들을 왼쪽에다 뒀기 때문이다.

우핸들을 좌핸들로 바꾸는 것은 단순히 운전대만 바꿔서 되는 일이 아니라 파워트레인까지 뜯어고쳐야 하는 큰 작업이다. 인테리어도 통째로 바뀐다. 따라서 차를 만들 땐 언제나 수출용 차와 내수용 차, 2개의 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차를 수입하는 건 더 큰 난관이다. 좌측통행용으로 새로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장제도문화보존연맹

일본 국회에는 도장문화를 존중하는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이 있다. 얼마전까지 다케모토 나오카즈(竹本直一)라는 의원이 이 연맹의 회장이었다. 이 양반이 몇달 전에 과학기술·IT 담당장관이 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컴맹이라고 자복한 사람이다. 취임하면서 역사적인 명언을 남겼다. “행정절차의 디지털화와 함께, 서류에 날인하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양립을 목표로 한다.” 이 명언이 얼마나 비난을 많이 받았던지, 그는 결국 ‘일본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 회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로봇 강국이다. 화낙과 같은 경우는 산업용 로봇 시장 세계 점유율 20%, CNC 시장 세계 점유율 50%, 스마트폰 가공기기 시장 세계 점유율 80%를 자랑하며, 테슬라에서 사용하는 로봇팔의 대부분이 화낙 제품이라고 할 정도다.

그 로봇 강국 일본에서 2년쯤 전에 덴소 웨이브와 히타치 캐피털, 히타치 시스템즈 등이 자동 날인(捺印) 로봇을 개발했다.

인장 찍는 로봇 [출처=히타치시스템즈]

자동 날인 로봇은 소형 로봇팔 두 대와 문서 인식용 스캔 카메라로 이뤄져 있다. 한 팔이 서류를 넘기면, 카메라가 문서를 촬영해 도장을 찍는 난이 어디 있는지 (아마도 머신러닝을 사용해서) 자동으로 구별한다. 그리고 다른 팔이 인감도장을 집어 인주를 묻히고, 찍어야 할 곳에 정확히 도장을 찍는다.

히타치 캐피털 측은 "산업 현장에서 '날인 작업이 귀찮기 때문에 효율화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 개발했다"고 말했다. 다케모토 장관에게 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히타치 캐피털도 대단한 명언을 내놓았다. “사람 대신 로봇이 서류 뭉치를 분류해 도장을 찍으면 시간을 절약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실상 '서류를 전자화'하는 것과 같다.”

몇 달 전 일본의 소프트웨어개발회사 ‘드림아트’가 1천명을 대상으로 인터넷 조사를 실시한 결과, 재택근무시 불편한 것 2위가 ‘서류에 사인 및 날인을 받지 못하는 점(28%)’이었다. 직장인의 3분의 1 이상이 단순히 도장을 찍기 위해 출근한 적이 있다는 조사도 나왔다.

‘AI가 인류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며 인공지능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원격근무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원격근무는 잘 하고 있는데, 인감을 찍어야 하는 일이 있어 가끔씩 사무실에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답했다. 천하의 손 회장조차도 인감을 찍어야 돌아가는 일본사회의 구조에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대단한 경로의존이다.

천국으로 가는 패스, 면죄부

경로 독점이란 것도 있다. 국도변에 하나밖에 없는 휴게소, 나루터의 주막, 모회사의 공급을 독점하는, 재벌 자녀들이 차린 비공개 회사같은 것이다. 가운데서 영수증만 발급해주고 이익을 떼어가는 이런 회사를 ‘검문소’라고 부른다.

중세 교황청에서 팔았던 면죄부도 이런 경로독점의 산물이다. 그때는 성서가 라틴어였고, 수도원에서 한 글자 한 글자 필사를 했다. 아주 귀하고 몹시 비쌌다. 귀족도 태반이 문맹일 때라 일반인들은 읽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하나님과 접하는 경로를 신부가 독점했다. 신부가 전하는 말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됐고, 이윽고 면죄부를 만들어 파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재미난 일화도 있다. 고약한 귀족 하나가 면죄부를 팔러 다니는 신부에게 ‘그걸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가 되는가’하고 물었다. 신부는 ‘이 면죄부는 대단히 영험하므로 당연히 된다’고 말했다. 비싼 값을 치르고 그것을 산 이 귀족은 판매를 끝내고 마을을 떠나는 신부를 쫓아가 두들겨 패고는 면죄부를 판 돈을 모조리 빼앗아 버렸다. 나중에 귀족은 잡혔지만, 그대로 풀려났다. 면죄부의 영험함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젊긴 했지만 그 이론적 깊이로 당시에 매우 존경받던 신학자였다. 그는 95개조 반박문을 교회문에 내걸었다. 이 반박문은 그때쯤 나타나 있었던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14일 만에 유럽의 독일어권 전역에 퍼졌다.

루터는 그뒤 10개월 동안 틀어박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다. 그가 선택한 독일어는 궁중이나 성 안에서 쓰는 언어가 아니라 백성들의 일반어였다. 성서는 다음 해인 1522년 9월 출판되었고, 이 성경과 함께 경로독점이 무너졌다. 누구나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들이 읽은 성서 어디에도 ‘면죄부’는 없었다.

경로독점은 결국 무너지게 돼 있다. 국도 옆으로 넓은 자동차 전용도로가 뚫리면 국도변의 휴게소는 순식간에 폐가가 되고, 강에 다리가 놓이면 나루터도 역할을 잃는다. 사회가 투명해지고 공정거래위원회가 제 역할을 다하면 재벌 자식의 검문소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전형적으로 회사의 이익을 가로채는 횡령범죄이기 때문이다. 재벌가의 3세, 4세들이 줄을 지어 감옥을 다녀오는 이유는 경로독점이 무너진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결과다.

현대 한국사회에도 많은 경로의존과 경로독점이 존재한다.

나와바리에서 길을 잃다

사스마와리는 찰회(察廻), 경찰서 할 때의 찰과 순회할 때의 회다. 경찰서를 돈다는 뜻이다. 신문사에서는 기자가 처음 들어오면 경찰서에 배치한다. 일제시대때부터의 관습이다. 세상의 모든 사건사고가 경찰서로 몰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세상의 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던 때, 살인과 방화, 강도가 대단히 큰 뉴스였던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빨리 바뀌어서 인공지능이, 기후변화가, 뉴욕의 증시가, 일본의 경제제재가 뉴스가 되지만 아직도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들은 뉴스를 찾기 위해서! 경찰서로 나간다.

나와바리는 승장(縄張), 밧줄 승에 펼칠 장을 쓴다. 빙 둘러서 말뚝을 박고 밧줄로 두른 것을 말한다. 구역이라는 얘기다. 야쿠자들이 자기가 삥을 뜯는 구역을 나와바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칠성파는 부산 칠성다방 주변이 나와바리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기자실이 그런 곳이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기자들은 못 들어간다. 그 사람들 나와바리이기 때문이다.

한때 기자들이 경로를 독점한 때가 있었다. 가서 듣는 것 자체가 특혜이고 권력인 때였다. 경제기획원이니 한국은행이니 장관의 말을 한마디라도 혼자 들으면 그게 도꾸다네였다. 해외의 특종보도가 주로 기획기사이거나 탐사보도의 결과인데 비해 한국의 그것이 유독 ‘나만 들었다!’, ‘나 혼자 알았다!’가 대부분인 것은 이런 ‘나와바리’와 ‘도꾸다네’의 결과다. 그러니 취재원과의 관계가 대단히 중요하고, 갖은 비난을 받아도 기자실을 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호외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라디오를 가진 집도 드물었다. 큰 사건이 생겼을 때 신문사가 ‘속보’를 ‘호외’로 뿌리지 않으면 달리 소식을 전해줄 곳이 없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호외’를 외치며 길에 막 뿌리고 다녔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들이 등장하고, 사회의 복잡도와 발전속도가 눈부시다. 더 이상 경찰서에 접수되는 사건사고들로는 이 세상을 읽을 수가 없다. AI가 사람을 대체할거라거나, 전기차 구조가 내연기관차에 비해 워낙 단순해져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판매를 할 곳이 사라져 도산과 실직 사태가 일어날 거라거나, 신재생에너지의 효율이 기대보다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다, 기후변화로 텍사스에서 60여 명이 때 아닌 한파로 얼어죽었다 같은 이슈들을 경찰서에서 대체 무슨 재주로 듣겠는가. 그런데도 신문사들은 기자가 새로 들어오면 경찰서로 보내 나와바리를 돌며 사스마와리를 하라고 시킨다. ‘뉴스’를 건져오라는 것이다.

특종이니 속보니 하는 말도 이상하다. 24시간에 한번씩 인쇄를 하는 매체가 속보를 어떻게 전한다는 것일까? 다른 매체보다 2초나 3초 더 빨리 인터넷에 올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거기서 안 전하면 우리는 알 길이 없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미디어를 갖고 네트워크로 초연결이 된 시대에?

나는 기자들의 신뢰가 떨어진 것, ‘기레기’라는 멸시를 받게 된 것이 기자 개개인의 윤리적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옛날에는 기자들이 윤리적이고 똑똑했는데, 갑자기 요즘 기자들이 멍청하고 부도덕하고 독자들을 속이려는 사람들로 바뀌었을 리는 없다. 사실 돈을 뜯는 ‘구악’들은 예전이 더 많았다.

강의 물길이 바뀌어서 강바닥의 벌건 흙이 훤히 보이는데, ‘여기에 물이 흐르고 있다’, ‘배가 곧 온다’, ‘이 나루터에서만 배를 탈 수 있다’고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경로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 착오의 구조 자체가 그런 불신을 필연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쇼핑몰에서 ‘새 신문지’라고 검색을 해보자. 이런 것들이 무더기로 나온다.

새 신문지 [출처=지마켓]

더 이상 신문을 받아보는 사람은 없는데, ‘아주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다’, ‘여기 물이 흐른다’고 말하려니 보는 이 없는 신문을 한없이 찍어내야 하는 것이다. 윤전기에서 포장을 마친 신문들은 비닐도 뜯지 않은 채 쇼핑몰로 튀어나온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모든 사람들이 바닥의 벌건 흙을 보고 있는데, ‘여기로만 물이 흐른다’, ‘여기서만 배를 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외쳐야 하는 광경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신문사들이 이제 바뀐 세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새롭게 자신을 정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미디어를 갖게 된 소셜미디어의 시대

모든 곳에서 전문가들이 실시간으로 자신의 지식을 공유하는 집단지성의 시대

모바일로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연결된 초연결의 시대에

매스 미디어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사스마와리를 돌고 나와바리를 지키는 대신에 무엇을 하면 이 퍼스널미디어의 시대에 자신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면 신문사의 미래는 없는게 아닐까?

이 과정에서, ‘구독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와 같은 가짜 질문에 걸려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은 곧장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 몰고가 버린다. 지금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와 ‘무엇’을 천착할 때다. 근본적으로 바뀐 환경은 그만큼이나 근본적인 질문과 새로운 정의를 요구한다.

내 판결문을 탐하지 말라

법원의 판결문 미공개도 있다. 한국사회에선 사실상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는다. 공개율이 0.3%쯤 된다.

일제 강점기는 더 말할 것이 없고, 그후로도 한참동안을 ‘보여줘봐야 까막눈’이었던 시기를 지나왔다. 그러니까 보여주나 안보여주나 별 차이가 없던 때다. 그때 정립된 관행이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온라인으로도 쉽게 전달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검색엔진이 굉장히 발전했다. 아무리 많은 판결도 순식간에 찾아낸다. 공공데이터로 공개를 한다면 굉장히 멋진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의 모든 판결에 대해 온갖 통계를 뽑아볼 수 있다.

수십년간 한국사회의 법감정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판례들간의 모순이 얼마나 있는지, 징벌의 형평성이 깨진건 없는지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다. 인공지능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영어로 된 인공지능 판결쪽은 상당히 발전이 돼 있지만 한글분야는 아예 없다.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판사들에게도 매우 좋은 일이다. 판결간의 모순을 없애고, 양형의 형평성을 높일 수 있어 사법부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예비 법조인들이 공부를 하는데도 아주 좋다. 분야별로 최고의 판결들을 뽑아서 공부를 할 수 있고, 비슷한 판결을 할 때 참고로 삼기에도 아주 좋다. 판결을 내리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몇 년 전에 변호사 1,586명에게 조사한 결과는 93.7%가 판결문 공개를 지지한다고 했다. 반면 대법원 조사에서는 응답한 판사 1,117명 중 미확정 형사사건 판결문 공개에 대해 찬성한 건 20.6%에 불과하다. 변호사들의 상당수가 전직 판사다. 법복을 벗자마자 의견이 바뀐다면 논리외의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선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는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판사들은 대부분 ‘개인정보 보호’를 근거로 공개에 반대하는데, 이런 주장은 ‘지구 다른 곳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선 해가 서쪽에서 떠’라는 말처럼 들린다. 미국, 영국과 같은 나라는 불문법이다. 명문화된 법이 있는게 아니라 과거의 판결 즉 판례를 따라 판결을 하는 나라다. 당연히 ‘미확정 실명 판결문’을 전면 공개한다. 공개 재판이 원칙이기 때문에 재판의 결과물인 판결문을 당연히 공개한다는 논리다. 미국은 판결 이후 24시간 내에 온라인 사이트에 미확정 판결문을 게재한다. 영국, 네덜란드는 미확정 판결문을 1주일 내에 공개한다. 영국과 미국이 프라이버시 보호가 우리보다 몇배나 엄격하면 엄격하지, 못할 리가 있나. 미국 영국이 망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없는데.

다행히 좋은 소식도 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지난 1월 18일 온라인 화상회의로 진행된 임시회의에서 판결문 공개 범위 확대 요구 등 4가지 의안을 의결했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우선 국민 알 권리와 재판 투명성 높이기 위해 판결문 공개 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소송관계인의 사생활과 개인정보 침해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도 함께 요청했다.

사실은 판결을 모두 공개하면 ‘전관 비리’에 관한 통계도 함께 드러난다. 변호사가 사시 기수가 같거나, 근무처가 같거나, 동창/동향인 경우의 판결의 결과가 다른 사건과 견주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성의하게 작성했던 판결들도 다 공개가 된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보여준 용기와 신념에 진심으로 찬사와 존경을 보낸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검사의 기소 독점도 일종의 경로독점이다. 일제시대 이래 편법으로 만든 제도가 반성없이 여기까지 와버렸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견제와 균형. Check & Balance다. 민주국가의 정부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소 독점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도 맞지 않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검사가 기소를 아예 하지 않아버리면 판결까지 갈 수도 없다는건 아주 이상하다. 견제도 균형도 깨져 있는 것이다.

“권력은 부패하기 쉬운 경향이 있고,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라고 아브라함 링컨이 말했다. 이 말에 따르면 현재의 검찰은 절대 부패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돼 있다는 것이다. 개개 검사의 도덕성과는 무관한 얘기다.

실제로 검찰이 자체 인지했거나 독자적으로 기획한 수사의 경우에 무죄율이 일반 사건의 다섯 배나 된다. 그러니까 수사를 잘 하지도 못한다.

1) 2000년 이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2013년 중수부 폐지 이후엔 중앙지검 특수부, 특별수사본부 등)에서 수사해 구속기소한 주요 권력형 비리사건 피의자 중 형이 확정된 119명의 대법원 판결 결과 무죄율이 10.1%.

검찰권 남용의 대표적인 병폐로 지목되는 판결 확정 전 처벌의 수단으로 구속이 악용되는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를 위해서다. 조사 결과 이 가운데 12명, 10.1%가 무죄(핵심 혐의에 대한 일부 무죄 3명 포함) 판결.

같은 기간 일반 형사 합의사건 무죄율(2.3%)의 다섯 배. 검찰이 기소한 전체 사건 무죄율(0.58%, 2015년 기준)의 17배.

2) 2004~2008년 5년간 검찰의 인지사건 수사로 기소(약식 기소 포함)된 14만675명 중 1심 재판 무죄선고자 비율도 일반 사건의 다섯 배.

1430명(1.02%). 반면 같은 기간 일반사건의 경우 전체 기소자 618만2677명 중 무죄선고자는 1만2833명(0.21%).

이런 숫자는 실은 아주 당연하다. 경찰이 수사를 하면 검찰이 기소를 하기 전에 들여다 본다. ‘견제와 균형’이 작동을 하는 것이다.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하면? 봐줄 사람이 없다. 게다가 몇달씩 수사를 했는데 그게 무죄라면? 고과에서 나쁜 점수를 걱정해야 한다. 하여간 기소를 하고, 몇달 있다 다른 지청으로 옮겨가면 그 사건은 후임 검사가 맡게 된다. ‘기소를 하는 편이 낫다’는 구조라는 것이다.

바뀐 물길을 찾아 떠나자

경로 의존은 내지 않아도 될 엄청난 비용을 내게 만든다. 이게 무서운 점은 우리가 수시로 확인하지 않으면 무심결에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하던 대로 하는 것이라 이편이 아주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된 경로의존은 왼편으로 가는 영국의 자동차처럼 자칫 후대 수백 년에 걸쳐 계속 댓가를 치르게 만든다.

모든 경로독점은 무너지게 돼 있다. 기후가 바뀌고 지질이 바뀌면 바뀐 물길은 다른 곳으로 흐른다. 말라버린 나루터에서 백년을 기다린들 떠난 배는 돌아오지 않는다. 최악은 경로의존이 경로독점과 결합하는 경우다.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바뀐 물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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