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웅 칼럼]눈을 떠보니 선진국이 돼 있었다


BTS는 한국어로 부른 노래로 빌보드 1위를 거뜬히 해낸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는 로컬이잖아”라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해 4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한국의 코로나 확진자는 2021년 1월 7일 현재 6만7천358 명인데, 같은 기간 영국은 죽은 사람 숫자가 7만8천508명이다. 미국은 2천170만여명의 확진자에, 사망자는 36만5천여명, 2차대전때 죽은 미군 숫자보다도 많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2020년 한국 경제가 -1.1%로 세계 1위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3.7%, 일본 -5.3%, 독일 -5.5%, 프랑스 -9.1%, 영국은 -11.2%로 큰 폭의 추락을 예상했다. OECD는 “한국은 효과적인 방역조치로 회원국 중 GDP 위축이 가장 적은 국가”라고 설명했다. 오바마를 비롯해 선진국의 많은 지도자들이 한국을 본받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중국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몇년을 고전하던 조선산업은 기술력 우위를 입증하며 액화천연가스(LNG)선,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등 고부가가치선들을 싹쓸이해 지난해 연말에만 12조5천억 원어치를 수주하며 중국을 저만치 떨궈냈고, 전기차 시대를 맞은 한국의 배터리와 반도체는 하늘로 치솟고 있다. 한국의 경제규모(GDP 기준)는 세계 9위로 올라섰고, 우리 앞에는 이제 여덟 나라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된 것일까?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1. 정의(定義)하는 사회

- 백서(白書)보다 녹서(綠書)를!

대학교 때 일이다. 법제처를 다니던 삼촌이 내게 물었다. “태웅아, ‘것인 것이다’하고 ‘것이다’가 뭐가 다른 것 같아?” “글쎄요, 달라보이지 않는데요.” “그렇지?, 그런데 상공부 친구들이 굳이 이걸 ‘것인 것이다’로 놔둬 달라고 우기네.” 그때는 산업과 관련한 법률과 시행령을 선진국 일본에서 마구 가져와 베끼던 시절이었다. 일본의 법조문은 대개 “ですのである”로 끝난다. 이것을 직역한 게 “것인 것이다”다. 원전을 하나라도 건드리는게 겁이 났던 시기였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후발추격국이었다. 한국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미친 속도로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았다. ‘무엇을’, ‘왜’ 해야하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언제나 베낄 것이 있었고, 선진국의 앞선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단지 ‘어떻게’뿐이었다. 정답은 늘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왜’라고 물어본 적 없이 수십년을 ‘어떻게’를 풀며 여기까지 왔다.

‘원격진료’(원격의료)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방은, ‘정의를 내려본 적 없는’ 후발추격국 한국의 관행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3월 매경에 실린 원격의료와 관련한 이슈 토론(링크)을 보자. 최윤섭 박사는 이 토론이 처음부터 엇나갈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김미영 님은 만성 질환에 대한 원격 환자 모니터링을, 김대하 님은 전화 진료, 특히 초진의 경우를 가정하고 얘기하는 것이라 논의의 출발이 애초에 달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에서 내놓는 자료도 자신이 말하는 ‘원격의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어떻게’ 하겠다 얘기를 나열한다. 원격진료와 관련한 논의가 겉돌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최 박사에 따르면 원격진료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어떻게’의 다섯 가지 질문에 따라 아래와 같은 다양한 층위로 구성된다.

[출처=최윤섭의 헬스케어 이노베이션(링크)]

예를 들어 누가 원격의료를 제공할 것인가만 봐도, 한국의 ‘모든’ 의사가 하는 옵션부터, 의료전달체계에 따라 1, 2, 3차 병원을 기준으로 제한을 두거나, 또 환자의 거주지 등에 따른 지역별로 제한을 둘 수도 있다. 한국에는 주치의 제도가 없지만, 주치의 제도에 기반하여 지역의 1차 병원의 지정된 주치의에게만 원격진료를 받게 할 수도 있다. ‘무엇을’을 보면 진단과 처방만 할 수도 있고, 교육 및 상담을 할 수도 있고, 내원 안내를 할 수도 있고, 단순 모니터링을 할 수도 있다. 원격진료란 말로 불리지만 다 다른 일이다.

‘소프트웨어 생태계’ 도 마찬가지다. IT 정책을 얘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지만, 그게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는 어디에도 정의가 없다. 대상이 뭔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육성을 하겠다는 격이다.

‘4차산업혁명’ 이야기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른다. 이 정부의 초기에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그 단초가 된 것중 하나가 독일 정부가 발간한 'Industry 4.0'이라는 백서다. 4차산업혁명을 맞아 산업계가 어떻게 바뀔지 그래서 무엇을 해야할지를 담은 보고서다.

우리가 눈여겨 보지 않은 것이 몇가지 있다. 첫번째, 이 책은 '노동 4.0'(링크)이라는 백서와 짝을 지어 나왔다. 산업이 이렇게 바뀐다면 노동은 거기에 맞춰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다룬 보고서다.

두번째,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백서에 앞서 녹서(綠書)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녹서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녹서는 정책을 결정하기에 앞서 사회 전체의 토론을 요청하는 제안이다. 독일정부는 노동 4.0이라는 백서를 내놓기 2년전 노동 4.0이라는 녹서를 내놓고 전 독일사회의 토론과 의견 개진을 요청했다. 시민들의 토론을 이끌기 위해 '미래(Futurale)'라는 이름의 영화 시리즈를 독일 전역 18개 도시의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녹서는 “디지털화되어가는 사회적 변동 속에서 '좋은 노동'이라고 하는 이상은 어떻게 유지되고 강화될 수 있을 것인가?”를 독일 사회에 물었다. 그 과정을 거쳐 발간된 것이 '노동 4.0' 백서다.

연방노동사회부 장관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의 '노동 4.0' 백서 서문 일부를 인용한다.

“하루 8시간 1주일 36시간 노동, 직장(공장) 내 위생 상태와 근무 보장 조건의 개선, 아동노동의 금지. 이상과 같은 사항들이 ‘미래의 노동’이 지향해야 할 이상향으로 그려졌던 때가 있었다. 오늘날의 이상향은 완전히 다르다. 시원한 바닷가에 편안히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일하는 창의적인 지식노동자, 혹은 컴퓨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다음 주 원하는 작업스케줄을 계획하는 생산직 노동자 등이 현재 우리의 이상향이다. 미래의 노동시장은 오늘날과 상당히 달라질 것이 분명한데, 과연 오늘날의 상황보다 더 나을 것인가? 우리는 보다 자율적으로 우리의 노동을 결정하고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노동 환경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인가? 50대에 다시 한 번 대학을 다니거나 새로운 직업을 가지기 위한 교육을 받게 될 것인가? 기계들은 우리의 직장을 앗아갈 것인가, 아니면 기계가 다양한 개선을 가능케 하고 생산력을 높이게 되어 새로운 직군을 창출하게 될 것인가?

'노동 4.0 (Arbeiten 4.0)'이라고 하는 제목 하에 우리는 이상과 같은 질문들을 녹서(Grünbuch)의 형태로 던졌으며, 사회 각계각층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토론이 이루어졌다. 공기업, 협회, 일반 기업, 학문 분야의 전문가, 일반 시민들이 이 토론에 참여하였다. 토론에 참여해 주시고 좋은 의견들을 내주어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녹서를 통하여 질문을 던졌으니, 이제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담은 백서를 발간해야 할 차례다. 이 백서에는 상기한 녹서를 통하여 시작된 대화들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이 요약, 정리되어 있다. 이로써 우리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벌어진 사회적 논쟁들에 대하여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며 연방정부와 이를 넘어서는 영역에서 노동, 직업 세계의 미래를 사회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동력을 얻고자 한다. 독일을 위한 디지털 전환이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 연방정부의 '디지털 아젠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다양한 플랫폼들 속에서 '수단, 도구(ressort)‘와 관련된 주제가 다루어진다. 광대역망의 구축, 인터넷 접속 가능성의 확대, 철저한 개인정보 보안, 새로운 생산 개념인 'Industry 4.0'의 실현 등이 현재 우리가 세우고 있는 경제적 기준이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동 4.0‘의 대화 프로세스가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독일정부의 '산업 4.0'과 '노동 4.0'은 2년여에 걸친 전 사회적 토론의 결과물이다. 4차산업혁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게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를 정의하는데 독일 정부는 2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사회 전체가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이렇게 토론으로 합의하고, 이슈들에 대해 전사회의 중지를 모으고 나면, 그것을 추진하는데 얼마만한 동력이 실릴 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다. 앞보다 뒤에 훨씬 많은 나라가 있는 상태, 베낄 선례가 점점 줄어들 때 선진국이 된다. ‘세상의 변화가 이렇게 빠른데 어떻게 토론을 하는데 2년이나 쓰나?’라는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독일이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을 들여 낸 백서를, 화들짝 놀라서 교과서처럼 읽고 베낀게 4년전이다. 독일은 2년이나 시간을 들였지만, 우리보다 4년이 빨랐다. 긴 호흡으로 멀리 본 결과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단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55분은 문제를 정의하는 것에 사용하고 나머지 5분은 해결책을 찾는데 쓸 것이다.” 해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다.

2. 데이터 기반의 사회

- 숫자가 말을 하게 해야 한다

한국정부의 예산안은 PDF로 공개한다. 이것을 컴퓨터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처리를 거쳐야 한다. 고위공직자의 재산내역공개도 마찬가지다. 코먼랩스에 올라온 사례(링크)를 보자.

““그냥 엑셀로 주시면 안되나요?”

2019년 정기재산공개 기자 간담회에서 나온 질문이다. 공직자 재산 내역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한 번쯤 떠올렸을 물음표다. 공직 감시가 의무인 언론에서 공직자 재산 전수 분석을 하려면 PDF가 아닌 엑셀이나 CSV(comma seperated value)와 같은 파일 형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 기자는 로우데이터 형식을 요구한 건데 인사혁신처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엑셀로 공개해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PDF로 공개해야 한다는 근거도 없다. 참고로 공직자윤리법 제 10조(등록재산의 공개)에는 ‘관보 또는 공보에 게재하여 공개하여야 한다’라고만 나와있다. 파일 형식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따라서 어떤 형식으로 공개할 것인지는 공직자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따른다. 투명한 공개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엑셀로 공개하면 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2021년이면 공직자 재산 공개제도가 시행된 지 30년째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반가운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PDF는 사람이 보라고 만든 포맷이다. 컴퓨터가 자동으로 처리하려면 별도의 개발이 필요하다. 수천 명분의 재산공개내역을 하나씩 손으로 다시 쳐넣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1년치 예산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런데 PDF를 복잡한 알고리듬을 구현해 처리가능한 포맷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건 사실은 불필요한 일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그냥 구조화된 데이터로 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은 데이터법에 아예 포맷을 못박고 있다. 예를 들어 백악관의 관리예산처(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 OMB)는 반드시 하나의 통일된 데이터 형식, 즉 “스키마”를 유지관리하여 모든 연방 지출 보고서를 구조화할 것을 법령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데이터법 정보모델 스키마(DATA Act Information Model Schema: DAIMS)(링크)라고 불리는 이 스키마는 쉽게 말해 정부 예산 보고서를 기계가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표준 포맷이다. 미 연방정부는 이 포맷을 공개해 다른 정부기관들도 쉽게 쓸 수 있도록 제공한다. 정부가 공개하는 데이터는 ‘기계가 읽을 수 있어야 한다’(Machine readable)는 원칙을 법으로 구현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숫자로 된 자료들을 이런 ‘구조화된’ 형태로, 즉 분석가능한 데이터로 공개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민간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산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통찰이 빛나는 논문들을 생산할 수가 있게 된다. 누구든 수십년치 예산을 넣고 시계열 분석을 해볼 수도 있고, 예산을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다양한 제안들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예산의 집행 효과를 검증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해마다 점점 더 나아지는 예산 수립과정을 기대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전국민 재난지원금과 선별 재난지원금은 지금도 가장 뜨거운 이슈중 하나다. 다 줄 것인가, 선별해서 줄 것인가? 찬반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미 전국민재난지원금도, 선별지원금도 지급한 경험이 있다. 그렇다면 효과를 측정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몇 조에서 12조의 돈이 들어가는 일인데, 쓴 다음에 그 효과를 측정해보지도 않는다는건 아주 이상한 일이다. 하다못해 작은 기업에서도 1천만 원의 돈만 써도 당연히 결과 리포트를 제출한다.

놀랍게도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 어떤 보고서도 내놓지 않고 있다. 효과를 측정하지도 않고서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하는건 근거가 없고, 근거도 없이 십수조 원의 예산을 쓰는건 무책임한 일이다.

민간에선 최배근 교수가 분석한 리포트가 있다. 10분위별 가구소득의 변화를 짚어본 것이다. 전국민재난지원금을 지급한 2분기에는 1년 전에 비해 상위 10%만 제외하고 모든 가계의 소득이 증가했다. 하위층일수록 가계소득 증가율이 높았다.(4번 그림의 파란색 숫자는 금액 변화다. 단위는 만원)

[출처=최배근 교수 페이스북]

한편 선별재난지원금을 지급한 3분기의 가계소득을 보자. 소득 증가율이 2분기 +3.5%의 절반 수준인 +1.8%에 불과하다. 특히 중산층(5분위, 6분위, 7분위)의 소득은 1년 전에 비해 감소했다. 반면, 상위 30%의 소득이 가장 크게 증가하였다.(5번 그림의 파란색 숫자는 금액 변화다. 단위는 만원)

[출처=최배근 교수 페이스북]

이런 결과는 우리의 선입견과 상충한다. 전국민에게 모두 줄 때 오히려 하위층의 소득증가율이 높다. 선별해서 지원하자 중산층의 소득이 외려 감소하고, 상위 30%의 소득이 가장 크게 증가했다. 물론 그 기간동안 재난지원금만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이 둘을 바로 이을 수는 없다. 통제불가능한 요소들이 많은게 사실이다. 전국민재난지원금은 재정정책이고, 선별재난지원금은 복지정책이다. 지금처럼 수요가 급감할 때는 과감한 재정정책이 하위계층을 위해서도 오히려 더 효과적이라는 유추는 충분히 해볼만하다.

정부는 데이터가 4차산업혁명시대의 원유라고 한다. 디지털 혁신의 케치프레이즈도 D.N.A.(데이터, 네트워크, 인공지능)다. 한해에만 558조가 넘는 돈을 쓰는, 한국경제에서 가장 큰 단일 주체인 정부가 먼저 ‘데이터에 기반한’ 정책을 펴는게 D.N.A.가 성공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2-1 정부 CIO, CDO를 두자

이런 일들을 총괄하는 정부의 CIO(최고정보책임자)와 CDO(최고데이터책임자)가 있으면 범부처의 일들을 더욱 전문적으로 처리할 수가 있다. 미국은 일찌감치 연방 CIO와 CDO를 두고 있다. https://www.cio.gov에서 연방 CIO의 임무와 권한을, https://strategy.data.gov에서 연방 CDO의 목표와 활동내역을 볼 수 있다.

정부내에 소프트웨어와 IT에 대한 이해가 깊은 CIO와 CDO들이 있어서 각 부처의 데이터 처리를 기술적으로 잘 맡아주었더라면 기획재정부가 한해 예산을 PDF에 담아 발표하는 안타까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단 데이터뿐이 아니다. D.N.A.의 두번째 항목인 네트워크도 마찬가지다. 이 안내를 보자.

클라우드의 가장 큰 장점은 원하는 대로 용량을 끊김없이 늘였다 줄였다 하며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리지를 증설하느라 전체 서비스를 중단한다? 서버에 단지 가상머신(VM)을 깔았다고 그걸 클라우드라고 하진 않는다. D.N.A.의 D도, N도 지금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전문가가 공공영역에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초 코로나 확산으로 급히 공공마스크를 배포해야 했던 때, 순조로운 배포에 큰 기여를 한 ‘공공마스크앱’이 있다. 공공과 시빅해커가 협업을 해 불과 3일만에 앱 개발을 끝낸 굉장한 프로젝트였다. 그때 공공부문과 시빅해커들은 사흘내내 24시간 대화를 하며 함께 개발을 했는데, 그때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을 읽어보면 공공기관의 담당자가 소프트웨어를 잘 알고 있다는게 어떤 의미인지를 확실히 알 수가 있다. (공적마스크개발대화방(링크))

IT분야의 세계적인 시장조사 및 컨설팅 기관인 IDC는 2021년의 10대 주제 1번으로 DX, 즉 디지털 전환을 꼽았다. 2위가 아주 뜻밖인데 ‘기술부채’다. 조직 전반의 데이터, 기술, 장비뿐 아니라 프로세스와 관행까지를 죄다 디지털로 바꿔야 하는 데, 그 과정에서 과거의 모든 것이 부채가 되고, 이게 IT업계에선 올해 두번째로 큰 이슈라는 것이다.

사회의 가장 뛰어난 자원들이 정부의 CIO, CDO로 이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조그마한 회사들도 다 CTO, CIO를 갖고 있는데 정작 한해 예산 558조의 정부에 CIO 한명이 없다는 건 터무니 없는 일이다. 미국도, 영국도 진작에 다 하고 있는 일이다.

3.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

- 목표를 바꿔야 한다

경제 발전의 어느 단계까지는 양적 성장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볼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춘기의 어느 시점까지 키가 커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때는 체중을 좀 불려놓아도 결국 그게 키로 가는 때다. 그런데, 서른살이 넘어서도 아침 저녁으로 키를 재고 있다면 어떨까? 정신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나이에 맞는 지표가 필요하다.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어른이 되면 허리둘레를 재고, 혈당과 고혈압을 재고, 최대산소섭취능력(VO2max)을 재는게 맞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중진국에서 이제 선진국의 문턱으로 들어선다면 GDP 하나만을 재고 있어선 안된다. 이제는 볼륨이 일순위가 될 순 없고 되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건강을 재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가장 훌륭한 척도는 그 사회의 중산층 비중이다. 허리가 튼튼한 사회가 늘 가장 건강했다. 국정의 최고지표로서도 아주 훌륭하다. 이 목표를 향해 다른 정책들을 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정부의 경제정책들은 개발도상국 시대의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해말 발표한 2021년도 기획재정부의 경제정책을 보자. BIG3 성장동력화를 통한 제조강국 진입, 110조원 규모의 공공/민자/기업투자프로젝트, 철저한 대내외 리스크 관리를 통한 안정적 경제 운영… 발전기 시대의 낯익은 캐치프레이즈들이 문구를 바꿔가며 나열된다.

이중에서 저출산 5대 핵심과제를 보자. ‘부부 육아휴직 활성화, 영아수당 신설, 첫 만남꾸러미, 공공보육 확충, 다자녀 지원 확대’. 이중에서 우리가 못보던 것이 있나? 최근 몇년간 열심히 해왔던 일이다. 그래서 출산율이 올라갔나?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면 미친 사람’이라고 한건 아인슈타인이다. 저출산시대가 온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살기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GDP는 늘고 있지만, 부는 한쪽으로 쏠린다. 직업의 유동성이 높아져 직장이 있는 사람도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인데, 사회적 안전판은 미비해 문밖이 지옥이다. 노인이 되어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그만 살 길이 없어 세계최고의 노인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다. 이런 각박한 판에 무슨 용기로 애를 낳겠는가?

장기적인 해법은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 서민이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너무 장기적이라고? 수십년을 쌓인 문제를 한번에 풀려고 하는게 더 큰 문제가 될 때가 있다. 이 일이 그렇다.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몸집만 불려서는 안되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시기에 맞는 국정지표가 필요하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중산층의 비율’이라는 선진의 지표가 있다.

4. 협상하는 사회

- 딜(Deal)을 가르쳐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딜을 하는 장면이다. 심지어는 서너살 먹은 어린아이하고도 내가 이것을 할테니 너는 저것을 해줄테냐?라고 묻고는 “딜?”, “딜!”이라는 대사와 함께 주먹을 마주친다. 세상에는 상대가 있다는 것, 혼자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생활로 익히는 것이다.

우리의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의 성격과 목표는 다음과 같다.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아 21세기 한국인으로서 갖추고 있어야 할 인성의 기본 요소인 핵심 가치를 확고하게 내면화하고, 학생의 경험 세계에서 출발하여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탐구하고 내면의 도덕성을 성찰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도덕함’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교과이다.”

'도덕함'에 대해선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덕과에서 추구하는 도덕함은 학문적 탐구로서의 윤리학 공부나 윤리 사상사에 관한 지적 이해를 넘어서서, 한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도덕 현상에 대한 민감성에 기반을 둔 관심과 분석, 그 도덕 현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개인 내면에서 작동하는 도덕성에 관한 성찰과 실천 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추상적인 표현들이라 쉽게 이해하긴 어렵지만, ‘내면의 도덕성을 성찰하고,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추구하는 도덕함의 시간과 공간’이라거나, ‘개인 내면에서 작동하는 도덕성에 관한 성찰과 실천과정 자체’라는 서술은 개인의 내면을 향하는 우리 도덕 교과서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사회는 별나게 조선시대에 중독된 것처럼 보인다. ‘상소문’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고, “비옵건대 주상께서는 저 자의 목을 베 저잣거리에 내걸어 만백성의 교훈으로 삼게 하소서”와 같은 의고체의 격앙된 글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타협을 하느니 도끼로 목을 쳐달라’는 선비의 굳은 절개는 지금도 추앙되는 높은 가치다. 이런 것들이 내면 지향의 교육과 만나 ‘갈등사회’의 토대를 이룬다.

예전 글(링크)

에서도 썼듯이 현대 한국인의 문해능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가깝다. 청취력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상대의 얘기를 제대로 경청한 뒤 토론하고 그래서 합의안을 찾는 것, 타협하는 법이 우리의 (입시) 교육에는 빠져 있다.

도덕적 개인은 가르치되 합리적인 시민을 가르치지 않는 것, 신독(愼獨)하되 협업하지 않는 것, 현대 한국사회의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공교육을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다 마쳐도 계약서 한 장을 제대로 못쓰고, 취업을 위해 애는 쓰지만 노동법은 읽어본 적도 없고, 딜은 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는 교육은 명백히 고장이 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뉴런처럼 촘촘히 연결된 초연결의 사회에서 이런 결점은 치명적인 걸림돌이다. 도끼를 치우고, 상소문을 던져버리고, 초연결사회를 사는 현대 시민의 옷을 입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안을 마련해 손을 맞잡는 경험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한다.

정리해보자. 선진국이 되기까지 지독하게 달려왔다. 바람처럼 내달린 몸이 뒤쫓아오는 영혼을 기다려줄 때다. 해결해야할 ‘문화지체’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다.

무턱대고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기 전에 ‘무엇’과 ‘왜’를 물어야 한다. 언제나 문제를 정의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숫자가 말을 할 수 있을 때 사람이 말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 돈을 썼으면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국가 CIO와 CDO는 이를 위해서도 반드시 갖춰야 한다. 지표를 바꿔야 한다. 서른이 넘었으면 키 재는건 이제 그만!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가 선진국이다.

합리적인 시민을 키우는 교육을 해야 한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협상과 타협의 태도가 몸에 밴 시민이 대한민국을 가장 살기좋은 선진국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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