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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무 별세]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승부사'


이차전지·OLED·통신 등 3개 주력사업 기반 구축

[아이뉴스24 양창균 기자] LG그룹의 '3세대 총수직'을 23년간 수행한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는 '집념의 승부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사업에 있어서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구 회장의 집념 때문에 생긴 수식어다.

“어떤 사업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그 과정이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단기 성과에 급급해하지 않고 부단히 도전해 결국에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경영 철학 중 하나였다.

실제로 회장 취임 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글로벌 경영에서는 초일류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해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구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은 골프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구 회장은 “내 골프 핸디는 고무줄 핸디”라며 “내기를 할 때는 잘하지만 그냥 칠 때는 잘 못한다. 딴 돈은 돌려주더라도 게임은 어쨌든 이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승부를 즐겼다.

한번은 구 회장과 라운딩을 같이 한 외부인사가 “회장께서 너무 골프를 잘 쳐 임원들이 함께 라운딩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구 회장은 “저는 골프를 잘 못 치거나 스코어를 가지고 누구를 탓해본 적은 없지만, 성의 없이 대충대충 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뭐든 마찬가지이지만 골프 역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며 승부근성과 도전정신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구 회장의 ‘집념의 승부사’와 같은 면모는 ▲부회장 시절부터 끈기 있게 개척한 이차 전지 사업 ▲단호한 결단으로 키운 OLED TV 등 디스플레이 사업 ▲통신 사업으로의 과감한 진출 등에서 잘 나타난다.

◆이차 전지의 불모지서 42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시장 선도

구 회장은 90년대 초반 당시 국내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이차 전지 사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20년 넘게 끈기 있게 연구개발 투자를 지속하며 현재 LG의 핵심 성장사업이자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사업으로 키워냈다. 1992년 당시 부회장이었던 구 회장은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방문한 영국 원자력연구원(AEA)에서 충전해서 반복 사용이 가능한 이차 전지를 처음 접하고, 미래의 새로운 성장사업이 될 가능성을 봤다.

구 회장은 이차 전지 샘플을 직접 가져와 당시 계열사였던 럭키금속에 이를 연구하도록 했고, 1996년에는 전지 연구조직을 LG화학으로 이전토록 하여 연구를 계속 진행하도록 했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수년간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회사 안팎 여기저기서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구 회장은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투자와 연구개발에 더욱 집중하라. 꼭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해보라”고 독려했다. 2005년에 이차 전지 사업이 2천억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을 때도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라고 다시 한번 임직원들을 다독였다.

그 결과 LG화학은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배터리를 개발한 데 이어 중대형배터리 분야를 적극 개척해 현재 '전기차 배터리 제조 경쟁력 평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제조 경쟁력 평가' 등 중대형 이차 전지 사업 경쟁력 면에서 글로벌 Top으로 평가 받으며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LG화학은 국내 오창공장을 비롯해 미국 홀랜드 공장, 유럽 폴란드 브로츠와프공장, 중국 난징공장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4각 생산체제를 구축해 글로벌 시장 공략을 한층 강화하면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2년간 전기차배터리 등 전지 부문에서만 매출 5조원을 추가로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LG화학은 2017년 기준 현대기아차를 비롯해 미국의 GM, 포드, 크라이슬러와 유럽의 아우디, 다임러, 르노 볼보, 중국의 상하이 자동차 등 30여개의 완성차 업체를 배터리 공급처로 확보했다.

이처럼 전기차 배터리 수주를 꾸준히 늘려감에 따라 LG화학의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고는 2017년 말 기준 30개 회사로부터 42조원에 달한다.

◆디스플레이 사업 육성 과감히 결단…글로벌 1위 등극

1998년 말, 구 회장은 당시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사업의 유지가 불확실해진 위기 상황에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영위하고 있었던 LCD사업을 본격 육성해야겠다는 의지로 이들을 따로 분리하여 별도의 LCD 전문기업인 ‘LG LCD’를 설립하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 그룹의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며 수없이 많은 고뇌 끝에 디스플레이 사업 육성이라는 신속하고 단호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반도체 빅딜 직후 LG는 14개월 동안 지속됐던 외자유치 협상에 속도를 올리며 전력투구해 1999년 5월 네덜란드 필립스사(社)로부터 당시 국내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 달러의 자본유치에 성공하고 3개월 후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LCD분야의 기초 기술력을 보유한 필립스와 응용기술이 강한 LG의 공동 합작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 합작으로 LG는 대규모 신규투자에 따른 자금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전세계 LCD시장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적기에 대응할 수 있는 공급능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LG는 2008년 필립스와 결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를 출범시켰고, 이후 더욱 과감한 투자를 통해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 기업으로 거듭났다. LG디스플레이는 TV, 모니터, 노트북 등에 사용되는 9인치 이상 대형 LCD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무려 31분기 연속 시장점유율 글로벌 1위를 기록했다.

구 회장은 대형 LCD 점유율 1위에 올랐던 2009년, 머지 않은 미래에 후발 주자의 거센 추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던 대형 OLED의 본격 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독려했다. OLED는 LCD와 달리 백라이트 없이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두께가 얇고 압도적으로 화질이 뛰어나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불린다.

비슷한 시기 OLED TV 패널을 개발하던 세계 유수 업체들은 양산의 어려움 때문에 생산을 포기했었다. LG디스플레이도 첫 생산에서 수율이 0%가 나올 정도로 수 많은 시행착오와 기술적 난관을 겪어 회사 내부에서도 ‘OLED로 TV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구 회장은 미래 기술의 주도권 확보라는 일념으로 수 조원대에 이르는 연구개발 투자를 승인했다. 또 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연구진을 질책하기보다는 믿고 격려하면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LG디스플레이는 2013년 세계 최초로 55인치 OLED 패널 양산에 성공하면서 시장을 놀라게 했다. 현재 LG디스플레이가 유일하게 독보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형 OLED 패널을 생산하고 있으며, LG전자는 차별화된 제품 경쟁력과 디자인을 내세워 OLED TV 시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OLED TV가 프리미엄 TV 시장의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LG전자 TV사업을 담당하는 HE사업본부는 사상 최대 실적과 영업이익률을 갱신하고 있다. 또 소니, 파나소닉, 필립스, 뱅앤올룹슨, 스카이워스 등 일본, 유럽, 중국 등 글로벌 TV업체도 OLED TV 진영에 속속 합류하면서 LG디스플레이 고객사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등에 따르면 OLED 패널 출하량은 2015년 30만대에서 2018년 280만대로 10배 가량 성장하고, OLED TV도 2020년에는 2018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난 520만대가 판매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통신산업 진출 선언…전자·화학과 포트폴리오 구축

구 회장은 취임 이듬해인 1996년 개인이동통신사업(PCS)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미래 정보화시대의 통신산업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이동통신사업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로써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 축으로 이뤄진 사업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LG는 축적된 통신 기술과 장비개발 경험, 우수한 경영능력 등을 인정받아 1996년 6월 쟁쟁한 기업들과의 경쟁 속에서 사업권 획득에 성공하고 LG텔레콤을 출범했다.

이어 2000년 유선통신사업체인 데이콤을 인수하며 통신사업을 강화했으며, 2010년에는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통신 3개사의 합병을 통해 유무선 통합 LG유플러스를 출범하며 통신사업을 LG의 주력사업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상용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98년 매출 약 1조원을 기록한 LG텔레콤은 통신 3사 합병 등을 거치며 종합통신사로 위상을 갖추고 2017년 매출 12조원대로 성장했다.

특히 구 회장은 LG유플러스 출범 이래 과감한 투자 결정을 통해 통신 업계의 약자였던 LG유플러스를 시장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기존 3G보다 5배 빠른 4G LTE 시대가 도래하자 구 회장은 LG유플러스 경영진에게 “단기 경영실적에 연연하지 말고 네트워크 구축 초기 단계에서부터 과감히 투자할 것”을 독려했다. 이에 LG유플러스는 당초 3년 계획이었던 LTE 전국망 구축을 단 9개월 만에 끝내고 완성도 높은 품질의 LTE 서비스를 시작했다.

LG유플러스는 앞선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LTE 핵심 서비스로 후발 사업자로서 10년 넘게 17%대를 맴돌며 고착화된 이동통신 시장점유율을 20%대까지 끌어 올리며 통신시장의 혁신을 주도했다.

현재 LG유플러스는 유·무선통신을 넘어 홈, 공공, 산업 분야 등 우리 삶 전반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종합 솔루션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의 선도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더욱이 LG유플러스는 LTE보다 50배 빠른 5세대 이동통신(5G), 인공지능, IoT 관련 신사업에 투자를 집중해 차세대 통신망 인프라와 인공지능 플랫폼 등에서 앞선 기술력으로 시장 주도권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양창균기자 yangck@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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