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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따뜻한 디지털세상] "IT, 노인과 사회 다시 잇는 오작교", 라영수 은빛둥지 원장


 

"선생님, 이게 왜 빵이 도망가요?""아, 햄버거가 빵따로 야채따로야? 합쳐, 합치시라고."

'햄버거 만들기'. 그리 까다로운 메뉴는 아닌 듯 싶은데, 여기저기서 "선생님!"을 외치는 구조요청이 잇따른다. 라영수(66) 원장, 세 시간을 잠시 앉아 쉴 새가 없다. 분단 사이를 누비지만, '요리사고'는 그칠줄 모른다.

"어떻게 해, 선생님 콜라 뚜껑이 콜라에 들어가버렸어요." "수정, 정렬! 수정, 정렬! 얘기 했소 안했소? 다 만드신 분은 이제 '저장' 하시고."

다 만들었으면, '시식' 아니고 '저장'?

요리교실의 한 장면을 상상하게 만드는 3시간 동안의 '햄버거 만들기'는 지난 13일 안산 노인정보화 교육기관 '은빛둥지'의 플래시 수업 주제였다.

평균연령 70세, 30여 명의 노인들은 이 날 마우스를 움직여 햄버거 한 개, 상어 한 마리의 '조촐한 플래시 식단'을 완성했다.

사진처럼, 모니터 속 노인들 작품은 교육기간에 따라 모두 제각각. 모두 '수작'은 아니다.

그러나 그 역시 노인이면서 6년째 노인정보화 교육을 벌이고 있는 라영수(66) 은빛둥지 원장은 "(노인들에게) 왜 이렇게 어려운 과목을 가르치시느냐"는 질문에 "노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컴퓨터 켜고 끄기나 단순히 인터넷 이용법을 알려주던 초기 정보화교육을 떠올리는 건 생산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2005년, 여섯 해 동안 노인 정보화 교육에 애쓴 노고를 인정받아 정보통신부 장관의 표창을 받기도 한 라 원장. 그는 "노인 파워유저를 키워야 한다"며 "IT가 노인과 사회, 비주류와 사회를 다시 잇는 가교가 될 것"이라고 목소리에 힘을 준다.

통계청 추계로 2005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446만 여명. 이 중 90%가 인터넷이나 컴퓨터와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라 원장의 '노인 파워유저 양병설'은 언뜻 와닿지 않는 얘기인 듯도 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 2018년이면 고령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자가 14%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가 될 대한민국의 노인 정보화교육에 대한 라 원장의 신념은 뚜렷했다.

◆ 벤처기업 사장에서 노인정보화교육기관 원장으로

라 원장이 처음, 노인 정보화 교육을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캄보디아 농업 개발공사 대표를 끝으로 외지 생활을 접고 97년 귀국한 라 원장은, 3년을 안산공과대학 'IT강의 청강생'으로 보냈다. 그 배경지식으로 2년 간 CD타이틀을 만드는 벤처기업도 운영했다.

아무 기반도 없던 한국에서 IT가 재기의 기회를 줬으니, 다른 노인들에게도 나눠줘야겠다 결심했다.

2001년 8월부터 안산시 본오1동 사무소에서 IT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노인뿐 아니라, 넷맹 주부, 실직 가장까지 배우길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 가르쳐줬다. 그렇게 2년이 지난 2003년 이제부터는 노인들에게 '사회에서 써 먹을 일 있는 IT'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교육장을 물색해 본오2동 노인정 건물 위층 공간을 찾아냈다. 2003년, 무작정 안산시장을 찾아갔다.

"우리 노인들 공부 해야겠습니다. 공부방 좀 내 주십시오."

안산시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인터넷 이용료와 빔 프로젝터 소모품 지원까지 약속받고, 정보통신부 지정 '어르신네 정보화 1등 기관' 은빛둥지가 정착했다.

그 때부터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엑셀 등 문서작성법을 비롯해 디지털 카메라 이용법, 플래시, 스위시, 홈페이지 제작법 등을 가르쳤다.

이메일이 뭔지, 인터넷을 어떻게 다루는 것인지 낯설기만했던 라 원장의 제자들이 그렇게 공부한 끝에 이젠 전국에 이름을 알린 유명인사가 됐다.

2002년과 2003년 은빛둥지 노인들은 '실버정보화 대회' 대상과 금상을 석권했다. 2003년의 금상은 은빛둥지 회장이자 최고령자인 변영희(83) 할머니가 수상했다.

라 원장의 수제자인 변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과도 대화가 좀 되시겠다."고 묻자 "내가 좀 낫지."라며 농을 건네신다. "손녀가 대학생인디 내가 플래시를 가르쳐줘요." 라 선생님 덕분에 삶이 달라졌다는 변 할머니다.

◆ '돈 버는 IT'로 비주류의 희망을 쏜다

"은빛둥지를 거쳐간 노인들은 다시 그 배움을 나눕니다. 학생들이 선배에게 배워서 선생님이 되고, 다시 자기가 배운 내용을 새로 오는 학생들에게 가르칩니다. 20여 명의 강사들이 안산 전역 노인정으로 출강을 가는 걸 본보기 삼아 정부의 어르신 IT 봉사단이 발족됐습니다"

라 원장이 은빛둥지의 자랑으로 여기는 또 하나는 배움 나누기다. 현재 은빛둥지에서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는 모두 다섯 명. 이 중 두 명이 은빛둥지 출신 제자 겸 선생님이다.

라 원장 주도로 은빛둥지에서 시작된 배움 나누기 모델은 정통부가 산하 정보문화진흥원을 통해 운영하는 '어르신 IT 봉사단'으로 거듭났다. 봉사단원들이 전국에서 노인 정보화를 위한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은빛둥지는 지난해 이 '어르신 IT 봉사단'을 운영하는 주무 기관으로 선정됐다.

라 원장이 지난 6년을 이처럼 '유별나게' 높은 수준의 IT교육에 열을 올린 데는 IT가 오작교 노릇을 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이 퇴직한 노인을 비롯해 넷맹 주부, 실직 가장은 이 사회에서 비주류로 구분돼 다시 사회로 돌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얼마나 손해입니까? 분야별로 수 십년 동안의 경험을 가진 노인들 나아가 아직 젊은 주부와 실직 가장들 모두 다시 사회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얻어야 합니다. IT가 이들을 사회와 다시 이어줄거라고 믿습니다."

노인을 겨냥해 시작한 교육이지만, 라 원장은 다시 '사회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교실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세무 강의 등을 포함한 연 8개월 코스의 '인터넷 소호 강좌'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2004년과 2005년 1, 2기 졸업생들은 대부분 재취업을 원하는 주부들. 컴퓨터 활용능력에 손색이 없는 준 전문가로 거듭난 주부들은 현재 90% 이상 재취업에 성공했다.

일부는 연내 인터넷 창업을 목표로 준비 작업에 한창이다.

노인 창업 및 소득창출을 위한 작업도 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 원장은 당장 노인들이 포토앨범을 CD로 제작해주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도록 도울 작정이다.

"이제 실력은 갖춰졌으니, 노인들이 IT로 궁한 호주머니 사정을 극복하게 하는 일에 역점을 둘 겁니다. 그냥 배우고 봉사만 하는 단계를 넘어서 노인이 분명히 소득을 창출하는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도록 한다는 게 은빛둥지 교육의 최종 목표입니다."

라 원장은 전체 1/10에 이르는 엄청난 인구가 소득없이 늙어가는 지금, "이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노인들 저마다의 노하우를 사장시키는 일은 전 사회적 손실일 뿐더러 퇴직후 평균 20여 년을 소득없이 궁핍하게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노인의 모습은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라 원장의 주장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21세기 신이 노인에게 준 선물입니다. 우린 젊은이들보다 빠르지 못하지만, 시간이 충분하지요. 컴퓨터 작동에는 물리적인 힘이 크게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시간과 지구력을 갖춘 노인과 IT는 어찌보면 찰떡궁합입니다"

◆ 일본 노인 IT교육기관과 잇따라 결연... "노인전문 포털, 웹진 만들 것"

국내에선 이미 널리 이름을 알린 '은빛둥지'와 라 원장.

라 원장은 지금, 정보화된 세계 노인들의 디지털 연대기구 창설 작업을 진행중이다.

지난해부터 경인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의 대표적인 노인 정보화 교육기관 10여 군데와 함께 진행해 온 이 작업은 고령화시대 지구인의 상당수가 될 노인들의 설 자리를 찾고, IT를 통해 '여생이 아닌 인생'을 살도록 이끈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동경의 '생활IT보급회'와 'IT보급센터' 두 개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안산시의 일부 지원에 노인들 자비를 보태 일본의 교육현장을 탐방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라 원장은 지금, 은빛둥지 사이트의 일본어판을 제작 중이다.

"올해 4월에는 일본에서 우리 둥지에 견학을 올 겁니다. 세계적 강대국이라지만 노인 정보화 교육 수준은 은빛둥지가 한 수 위 입니다. 중국과도 결연 작업을 진행중인데, 짝 찾는 일이 좀 오래걸리네요. 우리만큼 제대로 된 노인 정보화 교육을 진행하는 중국 기관이 없다는 얘기지요."

노인포털과 노인들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웹진 제작 계획도 품고 있다.

"기존에 민간, 기관 등에서 만든 노인 포털은 노인의 시각을 충분히 반영하기 보다는 타자의 눈으로 보는 노인문제를 다룬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노인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담은 뉴스도 찾아보기 어렵죠. 노인들이 매일매일 들어와봐야 할, 노인들을 위해 노인들이 만들어 운영하는 전문 포털을 만들겁니다. 전국의 정보화 된 모든 노인이 우리 포털의 기자로 활동하게 될 겁니다. 사회가 노인문제를 보는 시각이 아마 달라질걸요."

소일이 아니라, 노인과 사회를 다시 잇는 '오작교'가 돼 주는 IT, 비주류의 '인생 2막'을 여는 희망의 끈이 되는 IT.

은발을 휘날리며 'IT로 다시 사는 인생'을 외치는 라 원장의 신념에는 분명 '이유 있었다.'

"브라보, 실버 디지털 라이프!"

박연미기자 chang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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