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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권]'이명박 실용주의'는 어떤 얼굴이 될까


차기 이명박 정부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단연 '실용'이다.

이명박 당선자는 2007년 내내 실용의 가치를 부르짖었다. 실용주의 정신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이었다. 국민은 이에 매혹당했다. 거의 몰표로 실용주의자를 청와대로 보내줬다. 광주와 전남·북을 제외한 전역이 그랬다. 전통적으로 통합신당의 지지기반이 두터웠던 곳은 서울과 인천, 경기. 그러나 이명박 당선자는 수도권에서도 완승을 거뒀다.

이명박 당선자가 도덕성에 흠이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 정도가 됐다. 당대 보편적인 지식이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국민의 다수는 실용주의자 이명박의 손을 들어줬다. 2위와 표 차 531만, 지지율 격차 22.6%포인트. 압승이었다. 통합신당과 노무현 정부는 참패했다. 이들은 격차가 너무 현저하자 압도당한 눈치다. 그들의 눈에는 공포의 그림자까지 보인다. 아무런 변명도 못하고 있다. 할 말, 못할 말도 격차가 어지간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국민은 이번 선택의 댓가로 실용주의자가 통치하는 5년을 살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0일 첫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국민은 이념이 아니라 실용을 선택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국민이 자신의 실용주의 노선을 지지했음을 재확인시킨 것이다. 그는 회견중 여러차례 '실용'을 강조했다. 대북정책의 기조도 '실용주의적 외교'임을 못박았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도 정치인을 배제하고 실무진을 중용하겠다고 했다.

'이명박의 실용'이 어떤 모습일 지는 앞으로 하나하나 드러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실용'이라는 키워드는 앞으로 대한민국 5년을 지배할 것이다.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실용'도 다양한 함의를 갖는다. 요즘 말로, '착한' 것만은 아니다. 일부에게는 좋겠지만, 나머지에게는 나쁜 결과를 안겨줄 수도 있다.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동시에 가진 게 실용의 정체다.

본디 실용주의는 쓸모없는 것과 쓸모있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려고 한다. 미국식 철학의 전형인 실용주의(Pragmatism)가 그렇다. 실용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유용한 결과를 낳을 수 있어야 진리라고 했다. 유용하지 않은 것은 거짓이고 무의미하다고 했다. 제임스는 '모든 믿음은 현금가치(cash value)가 있어야 참'이라고까지 했다. 실제적 효과, 구체적 결과가 있는 것만을 인정하려는 태도가 바로 실용주의이다.

세계 각국중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실용주의에 따라 국가를 개조한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이다. 덩샤오핑은 1981년 중국공산당 국가 주석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뒤 실용주의노선에 입각,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했다. '쥐만 잘 잡으면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상관없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내세워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기업가에게 이윤을 보장했다. 외국인 투자도 허용했다. 이같은 실용주의 국가발전전략 결과 중국 경제는 매년 10% 가까운 경이적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 자리를 미국으로부터 이어받았다. 세계 각 나라의 국민들은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없으면 일상생활 자체를 하기 어려운 정도가 됐다.

중국의 실용주의는 철저하게 윌리엄 제임스식 '현금가치'를 기조로 한다. 중국 정부는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 분야에는 잘 투자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분야가 공중보건위생, 환경이다. 중국은 최근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과 조류독감의 진원지였다. 전문가들은 이들 질병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중국의 열악한 보건위생 인프라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중국은 인민의 공중보건위생 인프라 개선이 경제발전과 무관하다는 인식 때문에 관련 투자에 매우 인색하다. 중국 경제성장의 상징인 상하이의 겉모습은 세계 최첨단의 도시이다. 하지만 상하이 가구중 50%는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한다. 화장실 개선하는 것이 돈 버는 일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또 중국은 경제성장을 가속화하면서 그에 비례하여 심각한 공해 유발국이 됐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리는 베이징 외에 환경 대책을 세우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환경오염 방지대책은 중국 공산당과 정부에서 우선순위가 낮다. 오죽했으면 황사로 고통을 겪는 피해당사국인 한국이 열심히 중국에 가서 나무를 심을까. 이 역시 중국 정부가 돈 버는데 집착, 환경대책은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들이 기초연구나 원천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고 모방생산, 해외 기업 인수를 통한 생산력 증대에 골몰하는 것도 실용주의가 (잘못) 지배하는 풍토 때문이다.

중국의 황해 연안 대도시들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중국의 실용주의는 대도시민, 기업가, 공산당 간부들에게는 유용한 결과를 안겨줬다. 하지만 내륙의 농촌 대부분은 대도시로 저임금 노동자들을 공급하는 기지로 전락했다. 농촌은 대도시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 중국에서 인권문제는 여전히 끄집어내면 안되는 금기이다. 중국의 실용주의는 이처럼 가시적인 결과를 거두고 있지만 한편으론 온갖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명박 당선자의 살아온 역정을 보면 실용의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돼 있는 듯 하다. 그 자신의 입으로 굳이 실용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렇게 보인다. 그는 지난 1965년 현대건설 입사 이후 1992년까지 27년간 근무했다. 그 중 사장, 회장으로서 지낸 기간이 무려 15년간이었다. 그는 CEO로서 목표(결과)를 정해두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로 정평이 났다. 서울시장 4년을 지내면서도 그의 실적주의 철학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같은 큰 일을 벌였다. 끝내 '자, 보라'는 듯 결과를 내놓았다.

2008년 이명박 당선자가 바람을 일으킬 실용주의를 중국식 실용주의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것이다. 이미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상당 수준 정착했다. 언론도 높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 국가사회 곳곳에서 선진화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식 개발독재형, 권위주의형 실용주의를 한다 한들 이제 안통하는 사회가 한국이다.

그러나 '이명박 실용주의'를 바라보자니 한 켠에서 이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것은 실용주의 자체의 '본성' 때문이다. 현실 정치메커니즘에서 실용주의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크다.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에게 유용한 결과를 낳는 쪽으로 정책 수립과 집행이 이뤄질 가능성이다. 도덕성 공방을 지긋지긋하게 지켜본 국민들은 더욱 더 '이명박 실용주의'에서 그런 예감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이명박 당선' 뉴스가 나오자마자 인터넷에는 '아파트 사두길 잘했네'는 식의 댓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아파트 한 채라도 장만할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실용주의란 그런 것으로 해석된 것일까. 지지자 재산 불려주는 게 실용주의? 만일 많은 지지자들이 '이명박 실용주의'를 그렇게만 해석하고 있다면 이명박 당선자가 직접 나서서 오해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실용주의가 앞으로 5년간 정부를 떠받칠 탄탄한 정책철학으로 거듭나도록 하려면 '천박한 실용주의'의 너울을 벗겨내야 할 것이다. 한국과 똑같이 침체한 경제에서 출발한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는 '재산을 불려주겠다'고 사탕발림하는 대신 '고통을 분담하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또 대학에서 기초연구, 인문학 분야에 있는 교수들은 벌써부터 '연구비 지원이 줄 것'을 걱정한다고 한다. 이는 '이명박 실용주의'가 당장 눈에 보이는 곳에만 투자를 하고, 여타 분야는 소홀할 것이라는 일단의 우려를 대변한다. 만일 이명박 실용주의가 이들의 우려대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이 역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가 경영은 주식회사와 다르다. 분기별로 실적 변화를 주주들에게 보고해야 하는 주식회사 CEO와 대통령은 다르다. 3개월 단위, 1년 단위로 실적을 만들어낼 수 없는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 국가다. 과학기술이 그렇고, 인문학이 그렇다. 교육·문화·환경 분야도 그렇다. IT를 봐도 휴대폰·반도체 수출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국민의 건강한 정보 이용 기반 조성, 정보 격차 해소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한 정책이슈다. 이명박 실용주의가 '초단기 실적주의'의 다른 이름이지 않기를 많은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이명박 실용주의'가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은 것은 '노무현 정부 5년이 실패했다'는 시대공감의 연장선에 있다. 그를 당선시킨 실용주의 노선에 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에 이명박 당선자는 마땅히 화답해야 한다. 국민들은 '이명박 실용주의'가 수사법이나 단순 구호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고급스러운 정책철학'을 담은 실체이기를 원한다.

/이재권 논설실장 ja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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