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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대선]권영길 후보는?


올 대선에서 300만표 목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1941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권우현은 '빨치산'이었다. 해방 후 자주독립국가 건설투쟁과정에서 산청 단성면의 인민위원회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54년 빨치산 소탕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권 후보는 '빨치산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아픈 성장기를 보냈다.

권 후보는 경남고 시절 농민운동에 관심을 가져 '김해지역 농촌에 관한 실태보고서'를 작성해 "굶주리는 농민에게 가장 좋은 정치는 밥을 주는 정치"라고 주장하는 등 조숙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농민운동을 펼쳐 볼 요량으로 그는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 61학번으로 입학했으나 당시 5·16 쿠데타 등 뒤숭숭한 정치환경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군 제대 후 권 후보는 1969년 대학을 졸업, 1971년 사회운동에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서울신문에 입사해 기자가 됐다.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일한 1980~1987년, 그는 인생의 큰 분기점을 맞는다. 프랑스의 진보운동에 깊이 감명받은 그는 귀국하자마자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활발한 활동으로 언론노조연합 초대, 2대, 3대 위원장을 맡게 된다.

노동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권 후보는 1990년대 중반 당시 전노협 사수론과 민주노총 건설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뛰어난 '술 실력'을 바탕으로 지역순회 간담회를 300번 이상 참여하며 민주노총 건설 명목을 관계자들에게 설득하기도 했다.

1996~1997년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을 지낸 이후 권 후보의 정치 행보는 한국 진보정치의 행보와 궤를 같이 한다.

그가 국민승리21 대선 후보로 나왔던 1997년 당시만 해도 나온 그는 대중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3자 대결 속에 권 후보는 부각되지 않았다. 심지어 방송 토론회조차 공화당 허경영, 바른정치연합 김한식 후보 등 이른바 '군소후보'들과 경쟁했을 정도였다. 최종 스코어는 30여만표.

이후 권 후보는 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의 초대 대표를 역임하며, 같은 해 4·13 총선에서 진보정당 최초로 지역구(창원-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권 후보는 이 여세를 몰아 2002년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그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멘트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다.

그를 흉내내는 개그맨이 나타났을 정도였다.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3자 대결 구도에서 정몽준 후보가 낙마 아닌 낙마(?)를 하게 되며 권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은 측면도 있었다. 이 해 권 후보는 1997년의 세 배가 넘는 95만여표 가량을 얻었다.

대선에서 선전을 바탕으로 2004년 17대 총선에서 권 후보는 창원(을)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한다. 이때 민노당은 비례대표 후보 8명이 국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지난 2002년 대선 때 합의추대 방식으로 후보가 됐지만 2007년 권 후보는 민노당 최초의 대선후보 경선을 거쳤다. 초반 지지율은 경쟁자인 노회찬 의원, 심상정 의원을 압도했다. 그러나 결선 투표에서는 심 의원과 박빙의 승부 끝에 5% 내외의 근소한 차이로 세 번째 대선 후보가 됐다.

1997년 30만표의 세 배인 90만표를 2002년에 받은 권 후보는 올 대선에서는 2002년의 세 배인 300만표 득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가족관계는 모친 하영애 씨(86), 아내 강지연 씨(65)와 장녀 혜원(39·기혼), 장남 호근(38·기혼), 차남 성근(36·미혼) 씨 등이다.

현재 권 후보 캠프는 민노당 문성현 대표가 상임 선대위원장으로, 노회찬 심상정 의원이 공동 선대위원장으로 있다. 상임선대본부장으로는 김선동 사무총장이 있으며, 공동선대본부장으로는 김창현 전 사무총장, 이용길 전 충남도당 위원장, 최규엽 집권전략위원회 위원장 등이 뛰고 있다.

정병묵기자 honnez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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