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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i 과학향기] 한국의 파브르, '나비박사 석주명'


 

유리창나비(Dilipa fenestra takacukai SEOK), 수노랑나비(Apatura ulupi morii SEOK), 도시처녀나비(Coenonympha koreuja SEOK), 깊은산부전나비(Drina superans SEOK), 성진(스키타니)은점선나비(Bolorria selene sugitanii SEOK)….

일제 치하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 잃은 산하를 떠돌던 조선의 나비들에게 '이름(학명)과 주소(분포도)'를 찾아주는 데 일생을 헌신했던 석주명. 그는 우리 현대사 초창기의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 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의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나비 박사'라 일컫는다.

석주명은 나비에 씐 사람이었다. 그는 한반도 전역을 훑으며 75만 마리의 나비를 채집했다. 희귀종을 쫓아 흑산도까지 배를 타기도 했다. 송도고보의 학생들에게는 방학만 되면 나비를 2백 마리씩 채집해오라는 숙제를 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들 방학숙제의 단골메뉴였던 곤충채집이 실은 그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발로 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 찼고 개성의 명소가 됐다. 그는 채집여행에서 돌아오면 밤낮없이 채집한 것을 모두 정리하여 지도에 표시하였는데, 훗날 그렇게 해서 탄생한 <한국산 나비 분포도>는 생물지리학상 세계 학계의 유례가 없는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석주명이 나비연구를 시작할 즈음인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정도나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하고 관찰해서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 '신변종'을 발견했다고 발표하고 바로 자기 이름을 붙인 새 학명을 명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의 공명심이 새로운 종의 남발로 이어진 것이다. 때문에 한국산 나비에 대해 수많은 종과 아종이 이미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석주명은 한국의 나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연구 중 상당부분이 잘못돼 있다고 생각하고, 외국학자들에게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은 개체를 채집하여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잘못된 학명을 제거해 나갔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상이한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결국 석주명은 10년 연구 끝에 1940년 <조선산 나비 총목록>을 통해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도 다른 엉터리 학명을 붙여 844종이라고 분류한 한국나비를 248종으로 최종 분류함으로써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를 열었다. <조선 나비 총목록>은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됐으며, 이로써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라섰다.

석주명은 나비 연구에서는 세계적인 학자였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실패했다. 삶의 모든 부분을 나비에 바친 그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시간을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연구실이 있는 박물관과 자신이 맡은 학급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려고 학교측에 요청해 학급을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으며 집에서는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 일이 있을 때만 벨을 누르고, 서재의 문을 꼭 걸어 잠갔다.

집에 방문한 손님은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다. 때문에 신혼 초기부터 숱한 부부싸움을 벌였고 결국 1년 동안 재판을 거쳐 4년 만에 파경에 이르렀다. 이미 국내외에 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였기에 신문은 ‘꽃 모르는 나비학자’라며 연일 그의 사생활과 이혼 과정을 낱낱이 보도하기도 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던 석주명은 죽음마저도 비참했다. 아니 처연하기까지 하다. 석주명이 나비와 함께한 세월은 역사의 격동기였으나 그는 광주학생항일운동,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나비의 꿈만을 꾸었다. 전쟁통에도 피난을 가지 않고 박물관의 나비 표본을 지켰다. 그리고 전쟁 중에는 어딜 가나 생명보다 더 아끼던 지도 500장을 배낭에 넣어 메고 다녔다.

하지만 끝내 시대의 격랑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1950년 9월말 집중된 서울시내의 폭격으로 국립과학관이 불타는 바람에 그가 20여년간 수집한 그의 분신과도 같은 나비 표본이 모두 한줌의 재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나비들이 모두 불탄 열흘 뒤(1950년 10월 6일), 과학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둘러가던 그는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불의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그가 총구를 겨누는 청년들에게 외친 최후의 한마디였다. 나비를 쫓아 평생 산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처럼 그는 나비들의 뒤를 쫓아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간 것이다. 석주명!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세계 속으로 나아간 자랑스런 한국인 과학자였다. (글 :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 *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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