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㉓ 한국이동통신 도박 통했다…PCS 표준 CDMA 확정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편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T]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T]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한국통신과 한국이동통신이 PCS 기술표준을 두고 날을 세웠던 1995년.

서정욱 한국이동통신 사장은 신의 한수(?)를 준비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95 정보통신 전시관 행사’에서는 CDMA 시연회가 열리기에 앞서 기자들의 검증을 받겠다는 것. 이미 전시관은 한국이동통신뿐만 아니라 신세기통신도 CDMA 시연회를 준비한 상태였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자칫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니라 CDMA 불확실성을 키움과 동시에 PCS 기술표준 선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서정욱 사장의 면면을 살펴봤을 때 이같은 전략이 우연하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텍사스 A&M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를 취득한 후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지내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과 과학기술부 차관, 한국통신 부사장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갖췄다.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에 일조한데 이어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을 맡아 CDMA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을만큼 성공 DNA가 밑바탕에 자리한 인물이었다.

업계에서는 그를 방대한 독서량을 가진 공학박사 또는 지독한 워커홀릭 등으로 평하기도 할만큼 일처리에 있어 실제적 완벽을 기했다.

즉, 서 사장의 입장에서는 CDMA 시연에 있어 실패는 없고 성공만을 염두에 둔 카드였다.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상용화되지 않은 불확실한 통신기술이라는 CDMA의 최약점을 어느 정도 벗을 수 있고, TDMA와의 싸움에서도 유리한 고지 선점이 가능했다. 한마디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이다.

그의 전략은 CDMA 시연회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셔틀버스에 오르는 기자들을 대상으로 이동하는 차량에서 CDMA 시스템 기반의 통화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끊김없는 통화가 가능하다면 실제적 불확실성을 줄임과 동시에 전국적으로 CDMA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같은 결정은 관련된 한국이동통신 직원에게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삼성동 코엑스까지 가는 모든 길의 시설을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해야 했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통화불량 버그 제거에 사장의 거센 채찍질까지 더했으니 사경을 해멜 지경이었다.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만큼 손에 땀을 쥐는 작업이었다.

◆ 지옥에서 천국으로…CDMA와 함께한 취재길

마침내 기자들을 대상으로 CDMA 시연회가 열리는 1995년 6월 12일의 날이 밝았다.

약속대로 기자들이 서울 광화문 정보통신부에서 서울 삼성동 코엑스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 탔다. 미리 대기해 있던 서정욱 사장 역시 승용차에 탑승해 셔틀버스를 인도했다. 무사히 출발한 두 대의 차량은 광화문을 지나 용산구 하얏트호텔을 지났다. 그리고 승용차로부터 셔틀버스로 통화가 시도됐다.

어찌보면 한국이동통신으로서는 코엑스로 향하는 그 시간이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한번의 끊김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목적지에 다다를 수록 불확신은 확신으로, 지옥은 천국으로 전환됐다. 무사히 코엑스로 도착한 승용차와 셔틀버스간의 CDMA 통화는 단 한번의 끊김도 없이 그 역량을 한껏 과시했다.

전시장에서 진행된 시연회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은 코엑스 3층 전시관에서 전시장 주위를 돌고 있는 차량 탑승자와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기를 이용한 통화에 나섰다. 끊김없이 고품질 통화가 가능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이동통신은 같은해 10월 9일 서울 장안동 사옥에서 경상현 정보통신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CDMA 방식 시험통화에도 성공했다. 이 자리에서 서정욱 사장은 PCS 기술표준으로 CDMA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국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같은날 권혁조 신세기통신 사장도 이듬해인 1996년 4월 CDMA를 상용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연말까지 장비 설치와 연동시험을 마무리한 후 1996년 2~3월에 걸친 시범서비스 후 4월부터 서울 등 수도권 21개시와 대전시에서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상용화 해에는 20만명의 가입자를 유치하겠다는 목표도 내걸었다.

1995년 10월 20일 정보통신부는 마침내 PCS 기술표준을 확정했다. 정통부는 통신사업자 허가관련 전자공청회에 앞서 ‘통신사업자 허가신청요령 2차 시안'을 발표했다. 경제성과 기술확보 측면에서 PCS 무선접속방식을 TDMA가 아닌 CDMA로 가겠다고 천명했다.

◆ 반항, 그리고 제자리

정보통신부가 PCS 기술표준을 확정했으나 일부 업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앞서 결정한대로 TDMA 방식을 고수했다. 명분은 해외 진출이었으나 표준이 바뀌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사업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는 측면에 더 강했다.

게다가 신세기통신은 CDMA와 동시에 아날로그 통신(1G) 서비스 도입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표면적으로는 10월 24일 신세기통신 지분 11%를 보유한 에어터치 샘긴 회장과 칼라 힐스 전 미국무역대표부 대표가 우리나라 정보통신부를 방문해 아날로그 방식 허가를 요청하면서 불거졌다. 또한 CDMA 장비를 국산뿐만 아니라 해외 장비도 수입할 것을 요구했다. 앞서 주파수 확보 논란에서도 신세기통신을 지원했던 에어터치의 로비력이 끝없이 우리나라를 괴롭혔다.

한국이동통신은 이같은 결정을 막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날로그 통신의 경우 한국이동통신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이기에 후발주자는 반드시 견제해야만 했다. 게다가 아날로그 통신은 정보통신 발전의 퇴보를 야기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이동전화의 디지털 CDMA 시스템 전환은 우리나라 통신기술진의 자존심과 국가의 경제적 이해가 걸려 있는 중요한 국책과제이다. 따라서 디지털 전환은 국익을 위해 반드시 성공적으로 조속이 이뤄져야 한다.

기존도로를 확장하거나 도로를 신설할 때 우회도로를 만들어 불편을 없애야 하는 것은 상식인데 기존 아날로그 주파수 대역 내에서 디지털 전환은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며, 오히려 어려운 방법의 선택이다.

더구나 현실적으로 올해 연말 이전에 아날로그 신규가입은 적체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디지털 전환 기간동안 고객의 사용정지 등의 고통이 따를 것으로 보아 큰 걱정이다.

국가가 주파수 사용료를 받는 상황에서 국가 공공 자원인 주파수는 국민의 편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향후 3~4년간 사용할 수 있는 여유 주파수를 유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1995년 10월 한국이동통신이 배포한 보도자료의 일부는 이같은 상황을 잘 대변해준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던 정부와 업계의 갈등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한국통신은 10월 31일 TDMA 방식을 포기하고 CDMA 방식으로 전면 수정하겠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한국통신이 정보통신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다 평가했다.

또한 11월 7일 정태기 신세기통신 사장이 기자간담회를 갖고 아날로그 방식 시스템 도입을 폐기, CDMA 방식으로 이동전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기본 원칙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이 역시 정보통신부가 허가취소 사유에 해당된다며 신세기통신에 최후통첩한 결과였다.

PCS 기술표준이 일단락되는 사이 한국이동통신의 CDMA 시스템 구축은 완성단계에 다달했다. 한국이동통신 연구원과 LG정보통신 연구원은 외풍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스템 개발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하지만 역시나 상용화 서비스에 대한 불안감이 확실히 사라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이동통신 내부에서조차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이동통신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전 내부 확신과 외부 홍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본격화했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목차

1편. 삐삐·카폰 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

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

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

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편. 1세대 통신(1G)

⑥ 삼통사 비긴즈

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

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

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

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

3편. 제2이동통신사 大戰

⑪ 제2이통사 大戰 발발…시련의 연속 체신부

⑫ 제2이통사 경쟁율 6:1…겨울부터 뜨거웠다

⑭ ‘선경·포철·코오롱’ 각축전…제2이통사 확정

⑮ 제2이통사 7일만에 ‘불발’…정치, 경제를 압도했다

⑯ 2차 제2이통사 선정 발표…판 흔든 정부·춤추는 기업

⑰ 최종현 선경회장 뚝심 통했다…’제1이통사’ 민간 탄생

⑱ 신세기통신 출범…1·2 이통사 민간 ‘경합’

4편.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⑲ ‘라붐’ 속 한 장면…2G CDMA 첫 항해 시작

⑳ 2G CDMA "가보자 vs 안된다"…해결사 등판

㉑ CDMA 예비시험 통과했지만…상용시험 무거운 ‘첫걸음’

㉒ 한국통신·데이콤 ‘TDMA’ vs 한국이통·신세기 ‘CDMA’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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