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1세대 통신(1G)…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G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설립된 지 꼬박 40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사진은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장면. [사진=대한체육회]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1980년대초 ‘무선전화’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소위 선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집전화 ‘코드리스폰’을 뜻했다. 나중에 휴대전화가 상용화됐을 초기에는 무선전화와 혼용돼 쓰이기도 했다. 이후 이 두 전화는 ‘무선전화’와 ‘이동전화’로 구분되면서 그 경계가 확실해졌다.

무선전화와 혼용돼 쓰이던 시절에도 이동전화가 있기는 했으나 전화라기보다는 휴대용 무전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소니 워크맨’의 특징을 따 ‘워크폰’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선전화와 휴대용 무전기 이외에도 자동차다이얼전화(카폰)가 보급돼 있는 상황이었기에 단말 제조사들의 경쟁 역시 뜨거웠다. 즉, 그 때는 유선전화 무선전화 휴대용무전기 카폰 무선호출기가 주요 통신단말이었다.

정보통신시장은 그 때까지만 해도 국영독점이었기에 경쟁의 양상은 제조사로부터 시작됐다. 금성통신(현 LG전자),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동양정밀, 대우통신, 현대전자, 맥슨전자, 태흥정밀 등은 카폰과 무선전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기술개발에 집중했다. 전화기 시장의 강자는 금성통신으로 그 뒤를 삼성반도체통신과 동양정밀이 치열하게 경합했다.

이들의 다음 숙제는 언제 어디서나 통화가 가능한 ‘이동전화’, 완전한 의미의 휴대폰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88서울올림픽은 자체적인 기술력을 알릴 수 있는 주요한 무대였다.

‘휴대폰 첫걸음’…이동전화 시작

1988년 4월 30일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독자적인 운영이 가능해짐에 따라 휴대전화 서비스 보급을 서둘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이동통신 도입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에게는 첫 도입하는 개척자이기도 했으나 국가적 사명을 현실화해야 하는 의무자이기도 했다.

물론, 어려움도 있었다. 앞선 휴대용 무전기의 경우 전파를 붙잡아 보다 멀리 중계해줄 시설이 미비했다. 단말 전파 도달거리도 10~30Km 수준, 고속도로의 경우 중계시설이 20~60Km간 벌어져 있었다. 중계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시설간 연결방식은 유선이었기 때문에, 이같은 네트워크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서울과 제주 정도였다. 사실상 이러한 인프라 부족으로 특수보안상황에 따른 무선전파 사용제한이 있고, 일반에게 개방되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발전이 제자리 걸음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88서울올림픽은 우리 정보통신을 한단계 도약시킬 수 있는 주요한 계기가 됐다. 유선분야에서는 1998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와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삼성전자 등 4개 업체가 공동개발을 착수한 전전자교환기 TDX1B 개발이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이렇게 탄생한 국산 전전자교환기는 1989년만 37만 회선이 가설됐다.

또한 1984년 셀룰러 방식을 도입한 카폰의 무선 중계망 역시 커버리지를 넓히고 있는 상태였다. 단말 역시 주요 제조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기술 발전 속도가 나날이 높아졌다. 이같은 네트워크 인프라 발전은 디지털 통신망으로의 전환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향후 종합정보통신망(ISDN) 실용화에 한발 더 다가간 계기가 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같은해 5월 13일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한 후 실제 서비스 도입을 위해 체신부에 휴대용 전화 설치 및 요금안을 제출했다. 체신부는 이 안건을 6월 7일 최종 승인했다.

한국이동통신은 곧장 대대적은 홍보에 돌입했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의 자신감이 표현된 문구는 아래와 같았다.

‘저희 회사는 88년 6월 1일 정부로부터 공중전기통신사업자(이동체통신분야)로 지정받아 상호를 한국이동통신서비스에서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수도권 무선호출 서비스 지역도 88년 7월 1일부터 수원, 성남, 안양 지역으로 확대했다’

이동통신 서비스에 대해서는 ‘휴대하기 간편한 이동가입전화로서 차량전화망을 이용해 국내외 일반가입자, 차량전화 가입자, 휴대용 전화 가입자, 상호간에 착발신 통화가 가능한 편리한 전화’라 정의했다.

커버리지는 최초 서울과 수원, 성남, 안양, 안산시 등 수도권 중심으로 형성됐다. 같은해 9월부터 부산과 마산, 창원, 진해, 김해 개통을 예고했다.

7월 1일부터 청약 접수를 받았다. 청약제한은 딱히 없었으나 커버리지를 고려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조건이었다. 전화가입청약서와 무선국 허가 신청서, 신원 증명서를 갖춰 서울 서초구 방배동 서초전화국 옆 건물인 한국이동통신 서울지사로 와야 했다.

설치비는 65만원으로 해지시 반환됐다. 장치비는 1만원, 무선국허가신청료는 1만2천원, 무선국 준공검사료 2만4천400원이다. 요금제는 기본료 월 2만7천원, 도수료 서비스 지역 10초당 25원이 설졍됐다. 시외구간은 일반전화 DDD 요금과 동일했다. 전화기는 별도 구입해야 했다.

당시에도 휴대전화의 한계를 표시한 문구가 걸려 있었다. ‘차량전화보다 소출력으로 저지대나 기지국에서 원거리에서는 통화 불량일 수 있습니다’라는 솔직담백한 고백이 실려 있다. 물리적으로도 대형 안테나를 달고 있는 차량과 그보다 작은 안테나를 갖춘 휴대용 전화기의 전송품질을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구매 가능한 단말은 극히 적었다. 7월 1일 청약 접수를 받기는 했으나 단말은 한진전자 제품 1대뿐이었다. 한진전자는 영국 테크노폰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는데 수입시판가격은 280만9천400원이었다. 폭 7.5cm, 두께 3Cm, 길이 18.5Cm, 무게 530g으로 국내 형식검증을 받아 정식 도입됐다.

한국모토로라가 8월말 두번째 휴대전화를 보급했다. 유니텍시스템을 총판으로 260~270만원 대로 판매됐다.

1988년말과 1989년에는 미국 폰텍사의 설계기술을 도입한 금성통신, 트랜스텍인터네이션(TTI)와 기술 제휴해 설계한 삼성반도체통신이 각각 휴대전화를 내놨다.

88서울올림픽 통신 지원 감사패(좌)와 1984년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 현판식 [사진=SKT 뉴스룸]

‘정보통신’…88서울올림픽의 숨은 공로자

휴대전화 첫 상용화와 함께 9월 17일 88 서울올림픽이 개최됐다. 10월2일까지 열린 올림픽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기술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무대였다.

통신운영 주관기관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는 대회통신운영지휘본부를 설치하고 통신영업단, 방송중계단, 통신운용단, 종합상황실을 배치했다. 6개소 영업센터와 42개소 전신전화취급소, 35개 임시우체국을 설치했다. 대회통신시설을 직접 운영할 운영요원을 3천명 선발하고 2만부의 대회용 전화번호부를 배치했다. 종합정보시스템, 경기정보시스템, 대회관리 및 지원시스템 등 3개 전산 시스템을 통신망에 물려 운용했다. TV방송중계회선은 총 3만2천회선을 준비했다.

구리전선 대신 광섬유를 깔아 통신품질을 높이기도 했다. 올림픽 직전인 9월 12일에는 사무실 또는 이동 중인 사람과 차량간 통화할 수 있는 무선통신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보증금 4만5천원에 장치비 5천~2만원, 월 사용료는 기본료 1만~1만3천원, 통화료는 50원으로 책정됐다. 특장 가입자집단 내에서 통화가 가능한 다자간 통화였다. 예를 들어 특정 회사가 직원 50명을 호출하면 50명이 동시에 통화가 가능한 서비스였다. 물론, 별도 단말이 필요했다.

한국이동통신(현 SKT) 역시 거들었다. 대회운영용 1만7천776회선, 방송보도용 8천68회선, 관람객을 위한 공중용 4천200회선 등을 지원하고 서울조직위원회와 종합수리센터 등에 총 19명의 인원을 파견해 상주시켰다. 한국데이터통신(현 LG유플러스)도 14대의 주전산기, 960대 단말기, 450대 프린터 등의 설치를 끝냈다.

대회운영요원과 보도요원 등의 편의를 위해 휴대용전화 190대, 주파수공용무선서비스 400대, 워키토키 900대 등을 지원키도 했다.

성공적인 88서울올림픽을 마치고 난 후 우리나라 정보통신 기술이 국제 무대에 오르자 통신 강대국에게 한국은 주요 공략 대상으로 부상했다. 저력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본격적인 경쟁에 나서야 하는 숙제가 남은 셈이다.

이후 1G를 대표하는 휴대전화 서비스는 1989년 전국 2만3천여 회선을 증설하면서 35개시와 경부와 호남, 중부, 구미 등 4개 주요 고속도로로 반경을 넓혔다. 1993년까지 71만7천500회선이 설치되면서 전국 74개시와 107개 읍면 및 주요 고속도로 주변 지역까지 확장되면서 명실상부 전국망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1990년 6월 1일 전국 단일요금제가 도입되면서 거리별로 차등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이 이동전화에서는 단일요금을 매기는 것으로 변화했다. 또한 단말 경쟁 심화로 인해 단말 가격 인하가 지속되면서 보다 대중화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⑥ 1세대 통신(1G)…삼통사 비긴즈⑦ 1세대 통신(1G)…삼통사 경쟁의 서막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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