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자동차다이얼전화 '카폰'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설립된 지 꼬박 40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1996년 당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차량에 카폰을 설치하고 있는 모습 [사진=SKT]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소위 ‘카폰’으로 알려진 이동통신 서비스는 과거 ‘자동차다이얼전화’라 불렸다. 1984년 수도권을 대상으로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도록 상용화됐으나 그 이전부터 극소수에게 특수한 상태로 보급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1967년 12월 ‘자동차다이얼전화’ 개통이 이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시세로 단말기 가격은 85만원, 기본사용료는 월 1만750원, 도수료 통화당 63원의 프리미엄에 준하는 엄청난 가격을 갖춘 서비스 였다. 당시 프리미엄만 대당 1천만원 수준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다이얼전화와 관련한 범죄나 사회적 현상이 간혹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용으로 보급된 모토롤라 카폰 14대를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있었기도 했다. 당시 14대 카폰의 가격은 7천490달러 수준. 현 시세로 환산하면 꽤 큰 규모다.

◆ 극소수 프리미엄 ‘카폰’…사회적 충돌 야기

극소수에게 서비스된 차동차다이얼전화는 1975년 약 200대 가량이 보급됐다. 적은 수이기는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을 활용했기 때문에 이 때부터 적체 현상이 심했다. 체신부가 전화공급확대를 위한 투자재원조달에 나서 전화공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 희귀성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과시용으로 쓰였다. 카폰의 본래 목적은 공중통신서비스 향상과 긴급한 업무연락을 위해서다. 이에 따라 정부 기관을 비롯해 공공단체 승용차에 가설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일정한 기준이 없어 개인승용차까지 가설이 가능해 특권의식을 조장하기레 이르렀다.

즉, 하루에 한 통화도 사용하지 않는 일반 고객들이 과시를 목적으로 카폰을 가설하는 사례가 발생한 셈이다. 카폰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유함과 특수함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가능했다. 이에 따른 위화감 조성도 한몫했다.

카폰은 사실 불편했다. 교환양에 의한 수동식 수신송신이 가능하고 이동 시에는 터지지도 않고 단선 방식으로 일반전화보다 떨어졌다. 하지만 그 인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시 체신부에 따르면 1980년 11월 20일 카폰 적체로 인해 신규접수가 중단되기도 했다. 정부기관차에 38대, 기타 단체 166대, 개인 승용차 102대로 총 306대가 가설돼 운용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카폰의 활용도가 크지도 않았다. 1981년 4월 22일 기준 서울 남산중계탑으로부터 5회선으로 운용된 차량용다이얼전화는 대당 평균 통화량이 월 20여회, 일부 가입자의 경우 월간 10여통화도 하지 않는가 하면 아예 사용이 없는 고객도 발생했다.

과시욕이 불편함과 비용부담을 앞지른 셈이다. 이같은 사회적 현상으로 인해 공중통신서비스 향상과 긴급한 업무연락을 위해서라는 당초 목적과는 점차 멀어졌다. 제한된 회선 때문에 정작 필요한 기관이나 단체가 사용하지 못했다.

다만, 활용도가 큰 사례가 있긴 했다. 대학 입시가 대표적이다. 정원에 따른 미달과 초과분에 대해 기민하게 대응했어야 하는 때이기에 곧장 정보 전달이 가능한 카폰은 유용한 도구였다. 이후에도 카폰은 대학입시 때마다 첩보작전을 연상케하는 주요 수단으로 부상했다.

◆ '카폰' 대중화를 위한 한걸음

극소수층에만 통용됐던 카폰의 대중화 바람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통신을 국가산업정책의 핵심사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10월 체신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경영체제개선위원회'가 구성됐다. 통신사업의 기본 골격을 재편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1년 3월 14일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을 제정해 공포하고 같은해 5월 12일 전기통신법을 개정했다. 이 법안을 기반으로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출범했다.

실제 서비스 도입을 위해서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장 이동전화를 실현화하기 위해 1979년 미국서 개발된 셀룰로 방식을 채택했다. 미국 모토로라와 AT&T, 스웨덴 에릭슨, 일본 NEC 등 장비업체들이 국내 문을 두드렸다. 이 결과 1982년 10월 '이동무선전화 현대화 계획'이 수립되면서 전세계 4번째로 AMPS(Advanced Mobile Phone Service) 도입을 천명했다.

이듬해인 1983년 11월 체신부는 '자동차다이얼 전화보급 세부계획'을 마련해 발표했다. 발표 당시만 해도 1984년 1월부터 1차로 수도권 지역에 3천대의 자동차 다이얼전화를 가입 신청받아 보급하고 2차로 같은해말 다시 5천대를 보급해 총 8천대로 늘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같은 목적 달성을 위해 도심지 고층빌딩전화국 등 10여개 건물 옥상에 고성능 안테나를 배치했다. 그간의 적체 현상을 딛고 도심 지역의 빌딩 숲으로 인한 전파 방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총 38억원이 투입됐다. 교환시설은 3천가입자 용량으로 구성됐다.

정부는 같은해 12월 전기통신법을 폐지하고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을 각각 제정해 현실에 밑바탕을 둔 제도 정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출범

체신부의 세부계획을 직접 실현해야 하는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무선호출과 함께 차량전화를 전담할 수 있는 전담회사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4년 2월 10일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전담회사 설립계획안'을 작성했다.

수권자본금 5억원, 납입자본금 2억5천만원으로 이우재 한국통신공사 사장을 발기인으로 8명 전원 공사 관계자들로 구성했다. 직원수는 32명. 최초 ‘한국차량전화서비스주식회사’로 회사명을 정했으나 이후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로 최종 낙점했다. 초대 사장으로는 유영린 전 전기통신공사 원주지사장이 선임됐다.

초기 모습은 초라했다. 별도 청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회사인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의지했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 광장전신전화국 2층 40평 남짓 공간에 최초 사무실을 마련했다. 1984년 5월 1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 카폰 청약접수 시작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설립에 앞서 카폰의 청약 접수는 4월 2일 한국전기통신공사로부터 시작됐다. 카폰의 청약 및 승낙절차를 일반가입자전화청약과 승낙순위에 따르기로 했다. 1차 보급량은 계획대로 3천대가 풀렸다. 다만, 기존 구형 카폰을 사용하던 고객 348대분을 우선적으로 교체해줬기 때문에 실제 청약대상 회선수는 2천652대였다.

카폰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단말기를 구입해야 한다. 당시 단말기 가격은 어마했다. 4개의 제조사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해외 유수기업의 기술 라이선스를 받아 제작했다. 일본 NEC 기술을 도입한 금성전기(현 LG전자), 미국 EF존슨 측의 동양정밀, 미국 모토로라는 대영전자와, 캐나다 모바텔은 현대전자와 손을 잡았다. 각각의 단말기 가격은 330만원, 300만원, 340만원, 330만원 수준이었다.

단말기를 구매했다면 허가를 받아 가입신청을 해야 한다. 초기 카폰의 서비스는 수도권에서만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서울과 안양, 수원, 성남시에 등록된 차량을 갖고 있는 거주자를 대상으로 신청받았다.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위치한 중앙무선전신국을 찾아가 청약서와 무선국허가개설서 등 소정의 서류와 함께 설치비와 채권매입액을 내야 했다.

설비비는 88만5천원, 채권은 20만원 수준이며, 기본료는 월 2만7천원이다. 도수료는 8초당 20원이며 시회통화 요금을 따로 책정됐다. 카폰 고객이 되려면 당시 시세로 최소 400만원 이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지비 또한 감당이 돼야 했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업무를 시작한 5월 1일 관련 사업을 이관한다. 일주일 후인 7일부터 카폰의 정식 개통이 이뤄졌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광장전화국 근처 중앙무선전신국 망당 한켠에 차량전화 설치를 위한 현장사무실을 마련했다. 천막을 둘러친 임시 건물이었기 때문에 낡고 초라해 보이기까지했다. 다만,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뜨거움 그 자체였다. 하루 20~30대씩 판매된 카폰은 3개월만에 초도물량에 대한 청약이 마감됐으며, 심지어 내년 공급분에 대한 청약 접수를 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사후서비스(AS)까지 책임지는 등 보다 원활한 가입자 유치가 가능해졌다. 하루에 무려 30~40건의 청약문의가 날아 들었다.

카폰의 인기비결로 셀룰러 방식이 도입돼 기존 대비 뛰어난 커버리지와 회선증설에 따른 기다림 없는 통화연결, 보다 자연스러워진 통화품질 등이 꼽혔다.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 자동차다이얼전화(카폰) [사진=김문기 기자]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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