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세대 통신' 편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KT), 한국데이터통신(LGU+), 한국이동통신서비스(SKT)가 설립된 지 꼬박 4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한국통신(좌)과 데이콤 로고 [사진=각 사]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정부는 그간 독점체제를 유지해오던 각종 통신망 사업에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민영화와 개방화 등 다각적인 구조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보산업과 첨단산업의 육성과 기술개발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

1990년 4월. 제주 성산읍에서는 제주-육지간 해저 광케이블 건설 준공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해저망 연결과 함께 향후 통신시장에 경쟁체제를 도입하겠다 선언했다. 이미 1980년 후반부터 국제적 압박과 내부 자생력 강화라는 숙제를 떠안고 있었지만 대통령이 나서 향후 정보통신 비전을 선언한 일은 이례적이었다.

이 후 체신부는 보다 본격적으로 통신사업에 대한 재편을 단행했다. 같은해 5월 10일 공중통신사업자 제도를 회선설비를 보유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와 그 회선을 빌려 서비스하는 부가통신사업자로 구분했다. 이같은 분류는 어느 정도 숙고가 있기는 했으나 현재까지도 법상 유지되고 있다. 또한 특정인의 소유지분과 외국인 자본참여를 제한해 수평화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제도 정비에도 나섰다.

그 결과 같은해 7월 체신부는 국내 정보통신시장을 대대적으로 바꿀 ‘통신사업 구조조정’을 발표한다. 구체적으로 ▲시장경제원리 도입을 통한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 ▲통신수요의 다양화와 고도화에 따른 신규 서비스 창출과 확대 ▲직접적인 규제와 지도를 벗어나 자율을 바탕으로 한 간접적 조정 정책으로의 전환 ▲민간경영기법에 의한 시장 활성화와 창의적인 육성 도입 ▲경쟁력을 바탕으로 해 결과적으로 통신사업의 발전을 가속화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정보통신 서비스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해볼 수 있다. 전통적인 음성 전화를 이용한 통신과 네트워크를 활용한 데이터 통신, 카폰과 삐삐, 휴대폰 등 무선 기반의 이동통신이다. 각각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한국데이터통신(현 LG유플러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이 독점운영을 하는 분야다.

즉, 체신부의 ‘통신사업 구조조정’은 각 분야별로 독점운영 구조를 깨고 경쟁원리를 도입해 정보통신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의미인 셈이다. 또한 이같은 결정은 각각의 제2사업자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잘 나간다는 기업들이 군침을 흘릴만한 내용이었다.

◆ ‘한국전기통신 vs 한국데이터통신’ 뒤늦은 경쟁 점화

이 중 가장 먼저 구조조정이 일어난 분야는 전화 사업과 데이터 전송사업 분야다.

이미 체신부가 1988년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터통신에게 ‘공중전기사업자업무영역 조정지침’을 전달했으며 전기통신공사가 데이터 사업을, 한국데이터통신이 전화 사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조율을 일찌감치 진행한 상태였다.

음성전화 서비스의 경우 국제와 시외, 시내 전화로 구분해 2~3개 사업자가 경쟁할 수 있도록 했으며, 비음성 서비스(데이터 전송)는 한국데이터통신이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광케이블 전용회선망 구축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터통신은 서비스 경쟁을 위한 기반을 닦는데 전념했다. 특히 민영화 바람이 거셌던 한국전기통신공사에 맞서 한국데이터통신은 자립성장 배경을 마련하기 위해 분주했다.

구체적으로 1990년 3월 29일 한국데이터통신은 창립 8주년을 맞아 2~3년 내 독자적인 사업영역을 확립하는 한편 비음성 자료 전송 서비스에 전념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앞서 1987년 4월 국내 최초로 컴퓨터 통신 전용망인 데이콤네트를 구축해 국내 주요 도시와 해외 52개국을 컴퓨터와 컴퓨터가 연결될 수 있도록 데이터망을 구축했다. 443명에 불과한 가입자와 기업은 7천400여회선으로 늘어났다. 꾸준한 사업 고도화를 통해 대기업과 국가기관, 금융기관과 중소기업, 학교 연구소 등도 연결하는 특정통신 가입자의 경우 5만7천400여 회선까지 증가했다. 국내 부가가치통신망(VAN) 사업과 행정전산망사업을 전담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한국데이터통신은 사업확장이 지속되기는 했으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민영화를 이룰 한국전기통신공사가 경쟁 대상이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내부적으로 팽배했다.

경쟁이 본격화된 시기는 1990년 6월 12일 체신부가 한국데이터통신이 1992년 하반기부터 국제뿐만 아니라 시외전화 사업까지 참여할 수 있다고 발표하면서부터다. 통신위성을 임차해 별도 국제통신망을 갖추게 하고, 시외전화의 경우 설비에 따른 비용부담이 크다면 한국전기통신공사 네트워크를 임차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즉각 반발했다. 국제전화에 대한 경쟁은 감내하겠으나 시외전화만큼은 기존 독점을 보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국데이터통신이 선호했던 식별번호 ‘007’에 대해서도 기존 사용처를 감안해 난감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국제전화로 식별번호 ‘001’을 사용해왔다.

시장에서는 이같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반박에 대해 급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앞서 1988년부터 진행돼왔던 상황인지라 최종 결정을 앞두고 반박 논리를 펼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독점화를 유지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설명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간 잠자코 있었다는 점 역시 거론됐다.

다만,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제시한 시내전화사업의 적자 등을 감안했을 때 시외 전화 경쟁 도입이 이른 판단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따랐다.

서로 간의 공방이 격화되기는 했으나 체신부는 그로부터 2개월 뒤 기존 결정을 뒤엎었다. 국제전화에 경쟁도입은 기존 계획대로 하되, 시외전화는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독점 방침으로 선회한 것. 결과적으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국제전화 001 [사진=KT]

강승윤 국제전화 002 광고 [사진=HS애드]

◆ 100년 통신독점구조 깨지다

국제전화 경쟁도입은 단순히 2개 사업자로 늘어났다는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국내 정보통신 역사에 견줬을 때 한 획을 긋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는 1880년대 전화기를 도입했을 당시, 1902년 서울과 인천을 잇는 시외전화가 개통됐을 때도 국영독점으로 사업이 이어졌다. 100년 동안 국가가 독점적으로 통신사업을 키워온 셈이다. 즉, 통신사업에 경쟁원리를 도입하고 또 다른 제2의 사업자를 둔다는 것은 100년간 유지됐던 독점구조가 깨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만큼 두 사업자에게 통신시장에서의 경쟁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인식됐다. 즉, 사활을 걸 정도로 예민하기도 하고 절실하기도 했다. 그에 따른 절치부심은 약 10여년간 이어온 명패를 바꾸는 작업에서 두드러졌다.

한국데이터통신이 1991년말부터 국제전화 사업을 영위할 수 있다고 확정된 때인 1990년말. 12월 10일 한국전기통신공사는 ‘기업문화헌장 선언 및 기업이미지 통일화 발표식’을 개최한다. 기업 약칭을 새로 만들고 심벌마크를 세웠다. 이 때부터 한국전기통신공사는 ‘한국통신’으로 명패를 바꿔 달았다. 현재 영문명으로 쓰이는 ‘Korea Telecom’은 이 때 세워진 명패다.

한국통신은 1991년 민영화 절차에 따라 주식 상장이 예정돼 있는 상황이었으며, 통신서비스 시장 개발과 통신사업 구조조정 조처로 환경변화에 대응하고자 이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조치에 한국데이터통신 역시 민감하게 대응했다. 1991년 10월 19일 국제전화산업진출을 계기로 기업 이미지 통일화 작업에 착수해 회사명을 기존 영문 약칭으로 썼던 ‘데이콤(DACOM)’으로 확정했다. 이전에는 국문인 ‘한국데이터통신’과 영문 ‘데이콤’이 혼용돼 쓰였으나 이 때부터는 모든 명칭이 ‘데이콤’으로 통일됐다.

약 100여년의 통신국영독점구조가 깨진 날은 1991년 12월 3일. 데이콤이 드디어 국제전화를 개통하면서부터다. 식별번호는 당초 선호했던 ‘007’ 대신 ‘002’를 부여 받았다. 미국과 일본, 홍콩을 대상으로 서비스가 시작됐다.

데이콤은 한국통신보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분단위 과금체계를 초단위로 전환했다. ‘쓴만큼만 내세요’라는 마케팅 문구가 쓰인 거의 첫 사례다. 일각에서는 ‘1천원 수준(당시)인 다방커피 한잔 값이면 미국과 통화할 수 있다’라는 홍보 문구가 탄생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통신의 ‘001’보다 국제전화요금을 5% 더 저렴하게 책정해 고객 확장에 나섰다.

이같은 대대적인 마케팅 활동에 따라 데이콤 국제전화 ‘002’는 3개월도 채 걸리지 않은 시기에 전체 국제전화 사용률 10%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한국통신 역시 데이콤이 독점운영해온 데이터 전송에 불을 당겼다. 1991년 12월 9일 국제 데이터통신 시장에 뛰어 들었다. ‘하이넷-P’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통신은 데이콤보다 5% 더 저렴한 요금을 내세워 사업 확장에 나섰다.

여담으로 데이터 전송 부문에서 경쟁에 나선 한국통신과 데이콤은 이후 한 시대를 풍미한 PC통신 시장에서 자웅을 겨루기도 했다. PC통신 서비스의 양대산맥인 ‘천리안’은 데이콤이, ‘하이텔’은 한국통신이 운영한 포털이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부. 삐삐·카폰…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부. 1세대 통신(1G)…삼통사 라이즈

⑥ 삼통사 비긴즈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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