➈ 1세대 통신(1G)…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G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첫발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설립된 지 꼬박 40년이 흘렀습니다. 그간 이동통신 역시 비약적으로 성장해 슬로우 무버에서 패스트 팔로우로, 다시 글로벌 퍼스트 무버로 도약했습니다. 5G 시대 정보통신 주도권 싸움은 더 격렬해졌고, 다시 도전에 나서야할 절체절명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부족하지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동통신 연대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담긴 독자의 제보도 받습니다 [편집자주]

세계 최초 휴대폰인 모토로라 다이나택 [사진=위키피디아]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이동통신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때다. 한국전기통신(현 KT)과 한국데이터통신(현 LGU+)가 각각 영위해오던 전화와 데이터 사업을 함께 수행할 수 있게 됐으며,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한국이동통신으로 사명을 변경한 뒤 국내 첫 휴대폰 사업을 전개했다.

이같은 변화는 글로벌 행사인 올림픽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 시장에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경쟁력을 확인시켜준 계기로 부상했다. 이에 따라 통신 강대국에게 한국은 주요 공략 대상으로 설정됐다. 대외적인 압박이 가시화되기는 했으나 이를 통해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후 이동통신 시장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빠르게 성장했다. 그 중심에는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독립의 깃발을 올린 ‘한국이동통신’이 자리했다. 당시 차량다이얼전화(카폰)과 무선호출서비스(삐삐), 휴대폰 서비스 등 이동통신 서비스는 한국이동통신이 독점화한 상태였다.

물론 비싼 단말 가격과 유지보수비, 높은 통신요금제, 까다로운 가입절차 등 대중화를 가로막는 여러 요소들이 즐비하기는 했으나 그 수요만큼은 대단했다.

◆ 한국이동통신 독립…정부재투자기관의 첫 기업공개 사례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정부는 정보통신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안 마련에 골몰했다. 한국통신공사의 민영화 역시 이때부터 제기됐다. 국가주도의 독점운영을 벗어나 시장경쟁체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숙제도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간자본이 유입돼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기업공개가 전제돼야 했다. 또한 더 나아가 민간의 직접적 사업 참여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이에 따라 체신부는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돼 국내 불모지인 이동통신 시장을 견인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자율경영을 위한 기반조성계획’과 그 시행측면에서 ‘이동통신서비스 발전계획’을 1989년 5월 1일 시달했다.

주요 내용은 이동통신 경쟁력 강화로 요약된다. 대안은 민간자본 참여 확대, 기업공개 추진으로 양분된다. 아직 시장이 대중화되지 않은 이동통신 시장에 무리하게 경쟁을 끼워넣기 보다는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바탕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즉, 한국이동통신의 자율경영에 보다 힘을 실어주기로 한 것.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이동통신이 가파른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사실상 가입자는 차량다이얼전화 2만3천회선, 무선호출 8만1천회선 정도 수준으로 약 10만 가입자를 소폭 상회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기업공개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한국이동통신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00% 출자한 회사다. 정부재투자기관이 기업공개에 나서는 사례가 없어 난항을 겪었다.

수요 대비 적은 가입자 수준과 기업공개 난항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관심은 높았다. 아무래도 정부라는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재투자기관이 기업공개를 했다는 사례는 국가의 육성의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미래 전망이 밝다고 판단됐다.

1989년 9월 청약을 실시해 11월 9일 한국증권거래소의 상정 요건 심사를 통해 정식 상장됐다. 앞서 한국전기통사 단독 주주에서 12만8천124명의 주주가 탄생했다. 이후 주식은 계속해서 급등해 주주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 수의입찰에서 경쟁입찰로…장비 경쟁 시대 개막

이동통신은 구조적으로 유선을 기반으로 한다. 즉, 탄탄한 유선 인프라가 없다면 무선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공원에 분수를 설치한다고 가정해보자. 분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분수대까지 물을 전달할 수 있는 파이프라인이 갖춰져야 한다. 그래야 사방으로 물을 뿜을 수 있다. 여기서 물이 고인 수조와 이를 전달하는 파이프라인이 유선 인프라라 할 수 있고, 분수대가 물을 뿜는 것은 무선장비가 사방에 무선전파를 쏜다고 비유할 수 있다.

즉, 이동통신을 위해 유선장비 측면에서의 경쟁력도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는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소(현 ETRI)와 한국전기통신공사, 금성반도체, 대우통신, 동양전자통신, 삼성전자 등 민관이 함께 공동개발에 착수해 전전자교환기 TDX1B 개발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후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0까지 나아갔다.

다만, 국산 장비가 개발되기 전 어쩔 수 없이 외산장비에 기대야 한다. 국산 장비가 개발된 이후에도 장치산업의 특성상 순차적인 교체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국산과 외산의 공존은 한계점이 명확했다. 외산장비가 득세할수록 기술자립을 기대하기 어렵고, 발 빠른 대응도 어려워 제대로된 운영관리에 어려움이 컸다.

한국이동통신 역시 같은 고민에 빠졌다. 해결책은 크게 두가지로 양분됐다. 국산장비 개발뿐만 아니라 외산장비 사업자의 경쟁을 부추겨 그에 따른 이득을 가져와야 했다.

우선적으로 한국이통통신은 무선호출 송신기 국산화에 성공했던 삼성전자와 손을 잡았다. 이후 끝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1992년 11월 9일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한 TDX-PS 상용시험 결과 보고대회를 열 수 있게 됐다. 세계 최초의 무선호출 전용 시스템으로 우뚝 섰다. 1993년까지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개 지사 1차 설치, 1995년말 전북, 강원, 제주 지사까지 전량 대체됐다. 망 구성 단순화뿐만 아니라 원가절감과 수입대체 효과까지 거뒀다.

외산장비에 대한 경쟁입찰의 경우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숙제였다. 1983년부터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미국 모토로라와 단독 수의계약으로 유선장비를 들여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유지보수 문제가 부상했다. 다만, 경쟁입찰에 대한 전례가 없었기에 그에 따른 준비도 만만치 않았다.

1989년 5월 31일 한국이동통신은 외자구매협의회를 열고 공개입찰경쟁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심의위원회를 구성해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조달청과 함께 실제 입찰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같은해 7월 7일 조달청에 이동전화 교환기 3만회선과 기지국 장비에 대한 공개경쟁입찰을 공고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AT&T가 선정됐으며 예산절감과 유지보수 기술을 전수받기에 이르렀다.

전례가 쌓인 공개경쟁입찰은 그 이후로도 지속됐다. 특히, 기존 단독 수의계약 대상자였던 모토로라는 장비 가격을 절반 가량 낮추는 강수를 던지기도 했다. 캐나다 그레니어, 스웨덴 에릭슨 등도 국내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됐다.

◆ 이동통신 100만 시대 개막

1988년 상용화된 이동전화를 기점으로 무선호출과 차량다이얼전화(카폰)의 성장세가 날로 가파른 곡선을 이뤘다. 이 결과 1991년 12월 14일 한국이동통신 이동전화 100만 가입자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이동전화와 무선호출 가입자 추이 (자료=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사진=자료=정보통신부]

당시 이동통신 가입자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이동전화’와 삐삐 단말을 통한 ‘무선호출’, 차량에 탑재하는 형태의 ‘차량다이얼전화(카폰)’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을 말했다. 또는 이동전화에 카폰을 포함시켜 통계를 내기도 했다.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100만 가입자 달성 시기인 1991년말 이동전화 가입자는 11만6천198건, 무선호출 가입자는 85만515건으로 101만8천704건을 유치한 바 있다. 100만 가입자 시대를 연 이동통신 시장은 이후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이동전화의 경우 2배수에 달하는 가입자 증가폭을 보일 정도로 큰 인기를 구가했다. 1991년 10만 가입자 수준이었던 이동전화는 1993년말 50만 고지에 다달했다.

무선호출 역시 대중화 바람을 타고 1992년 4월 10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이후 무려 1년 3개월만인 1993년 7월 19일에는 200만 가입자까지 넘어섰다.

폭발적인 가입자 증가는 한국이동통신에게는 희소식이었으나, 반대로 네트워크 인프라 전면 확산이라는 과제도 풀어야 했다. 적체 현상 해소가 고객 가치 향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앞서 외산장비 경쟁입찰을 통해 대량의 장비를 들여왔기에 그에 따른 설비 개설에도 속도를 내야 했다.

단적으로 한국이동통신에 따르면 이동전화 시설장비를 전담하는 전용비행기까지 운항될 정도였다. 대한한공과 대한통운이 이동전화 장비운송전담팀까지 구성했다.

또 다른 과제는 고객 서비스 응대였다. 적체 해소나 통화품질 제고 역시 중요했으나 폭증하는 가입자를 대상으로 신속하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대응 체계 역시 갖춰야 했다. 또한 아직까지 이동전화를 체험해보지 않은 소비자들을 대상으로한 프로모션도 필요했다.

우선 대면 접점을 늘려야 했다. 1992년 1월 31일 무선호출위탁대리점 개설 시범안을 내놓은 한국이동통신은 경기도 안산시에 최초 위탁대리점을 개설을 위한 공고를 냈다. 같은해 5월 실제 안산대리점이 개설됐으며, 7월에는 부산 북구와 공주시, 수도권, 부산권, 충청권 등에 69개 대리점을 개설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한차례 더 대리점을 모집해 같은해말 총 113개의 대리점으로 늘었다. 1994년 2월에는 178개까지 뻗어나갔다.

이동전화 서비스 포트폴리오도 다양화했다. 1993년 2월 1일 이동무선공중전화를 보급하는 한편, 임대이동전화 사업을 전개하고 같은해 10월 1일부터 일반 고객에 확대했다. 부담스러운 이동전화 설비비 분납제를 지방에 우선 도입하고 1994년에는 수도권으로 확대했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부. 삐삐·카폰…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부. 1세대 통신(1G)…삼통사 라이즈

⑥ 삼통사 비긴즈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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