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올림픽

[최용재기자] *2012년 8월11일, 19일차

최악의 하루였다. 짜증이 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며 울분을 토했다. 마치 '짜증·분노·울분 종합세트'를 선물 받은 느낌이다.

오전부터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숙소에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좀 하려는데 인터넷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기자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가장 큰 장점이 한국의 PC방처럼 빠른 인터넷 속도였다. 영국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신기의 속도다. 그런데 인터넷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짜증이 밀려왔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배구장으로 향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숙적' 일본과의 한판 대결을 벌이는 날이었다. 그것도 동메달 결정전이다. 한국 여자 배구가 36년 만에 동메달을 따내는 것을 상상하며 경기를 지켜봤다. 그런데 경기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자꾸 일본이 앞서가는 것이다. 너무나 당당하게 오심을 내리는 심판의 능력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결국 한국은 일본에 세트스코어 0-3으로 완패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국 대표팀이 못해서가 아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몇몇 선수들은 굵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안타깝고 가여웠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이유는 하나였다. 간단한 이유다. 단지, 그냥, 일본이 이겼기 때문이다.

여자배구 한일전 패배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엄청난 일들이 몰려왔다. 왜 오늘 하루에만 이렇게 많은 시련이 한꺼번에 찾아오는지 감당하기에 벅찼다.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 했나? 하늘이 벌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국이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태권도에서 이인종과 차동민이 모두 8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늘도 태권도의 금빛 발차기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나섰지만 소득 없이 돌아와야만 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생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너무나 감동스러운 투혼을 발휘했지만 동메달 결정전에서 스페인에 무너졌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심난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사이 오늘 악재 쓰나미의 '하이라이트'가 찾아왔다. 축구대표팀 박종우의 '독도 세리머니' 논란이었다. 짜증, 분노, 울분에 어이 상실감, 멘붕, 낮술을 과하게 먹었을 때의 신체적 반응까지 함께 찾아왔다.

그러다 금세 침착해졌다. 이런 격한 반응을 바라는 악마의 술수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썩소' 한 번 날리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생각하자니 머리 아프고 말하자니 입이 아프다. 무관심, 무대응이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최악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오늘 처음으로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이런 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런던에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혼자 끙끙 앓으며 분을 삭이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영국에서 소주는 또 왜 이렇게 비싼 걸까.

<20편에 계속…>

런던(영국)=최용재기자 indig80@joynews24.com 사진 최규한기자 dreamerz2@joy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