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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의 성수대교'를 조장하는 국가계약법


 

1998년 초. 한국SW산업협회 A 회장은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다. 소속사가 저지른 덤핑 수주 때문. 당시 회원사 대표들은 회장사인 B사의 덤핑 행위에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고, A 회장은 결국 회장직을 내놓아야만 했다.

덤핑 자제에 대한 업계 자정 노력이 힘을 받았던 것.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 다시 협회 회장사인 C사가 덤핑을 쳤다. 경쟁사인 D사가 강력히 반발했다. D사 사장은 다시 회장을 몰아 부쳤다. 98년에 그랬던 것처럼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회장은 그럴 수 없다고 '당당히' 맞섰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간음 중에 잡힌 여자한테도 사랑을 베푼 예수처럼 그 회장도 말했다. "덤핑을 하지 않는 업체가 어디 있느냐. 당신 회사의 덤핑 사례도 수두룩하다." D사 사장은 더 말이 없었다.

덤핑이 밥먹듯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업계 수뇌부들이 인정한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덤핑을 자제하자고 업계가 10년 이상 논의했지만 매번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 않다.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안되지만 업계 자정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가계약법'을 대폭 손질해야 한다. 적당히 고쳐서는 효과가 없다. 근본적으로 법의 정신과 철학을 바꾸어야 한다.

덤핑 조장하는 국가계약법

지난해 한국전산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가와 계약한 IT 프로젝트 가격은 예가의 평균 48%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래가지고 도대체 예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가란 게 무엇인가. 사업 기획을 수립하고 과학적으로 미리 비용을 뽑아본 것이 예가, 사업 예상 가격 아니겠는가.

그런데 실제 계약 가격은 이의 50%도 안된다. 뭔가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 그러고서도 10년 이상 버젓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되풀이된다.

국가가 '정정당당'하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계산해 100원짜리 가치라고 믿는 물건을 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50원에 팔도록 해왔다는 뜻이다.

문제는 정부가 '최저가 입찰'을 조장한다는 데 있다. IT 민간 기업은 치열한 경쟁상황에 있다. 끊임없이 수주경쟁을 한다. 사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프로젝트를 수주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마련이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줄'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를 조장했다면 반(反)국민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잘못이다. 민간의 상황을 알고 조정하는 게 정부의 일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왜 내는가.

비용절감과 이익창출이 최우선인 민간 기업이라면 몰라도 정부가 '최저가 입찰'을 조장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우선 기업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건전한 경쟁구도보다 시장질서를 파괴하고 왜곡하게 만든다. 또 페어플레이를 하는 우수 기업보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부실 기업에 혜택을 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업하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줄서기'를 하게 하는 원인이다.

민간 기업 뿐만이 아니라 정부로서도 득보다 실이 크다.

당장 예산을 줄일 수는 있다. 하지만 뒷수습이 문제다. 100원짜리 물건을 50원만 받고 제대로 만들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부실이 불가피하다. 결과적으로 뒷수습하는 데 돈이 더 든다. 수많은 IT 프로젝트가 누더기처럼 구성되고 유지보수 비용이 엄청난 것도 이 때문이다. 왜 성수대교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겠는가. 이른바 'IT의 성수대교'도 숱하게 있다.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최저가 입찰'이 대세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정부 예산에 대한 철학'의 문제다. 예산은 국민의 세금이다. 아주 잘 써야 한다. 낭비하면 안된다. 그리고 예산은 한정될 자원이다. 아껴 써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업의 등을 치는 방법'만 동원해서는 안된다.

예산이 부족하면 사업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예산에 맞는 사업을 제 값 주고 제대로 해야한다. 뒷수습도 안되는 사업을 벌여놓고 덤핑을 조장해 예산을 절감하는 방법은 옳지 않다. 이를 개선하려면 사업 기획단계부터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면밀한 계획을 짜야한다. "우리 올해 이 만큼 했소" 하는 '전시행정'에서 질을 중요시하는 행정으로 바뀌어야 가능한 일이다.

관료 조직의 경직성에도 문제가 있다. 특히 감사가 그렇다. 소신 있는 행정 전문가가 부실공사를 우려해 '최저가 입찰'을 피하려 할 때 골치 아픈 경우가 많다. 왜 예산을 절감하지 않고 함부로 썼느냐는 질책을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 덤핑 업체보다 좀 더 비싸게 제 값을 써낸 우수 업체에 사업을 맡길 때 감사원 등으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따라서 발주 공무원을 좀 더 전문화하고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게 이의 해결 방법일 수 있다.

국가계약법 손질 움직임

재정경제부를 중심으로 국가계약법을 손질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최저가 입찰'을 줄이기 위해 '협상에 의한 계약 체결'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특히 IT 분야에서는 국가계약법 43조 '협상에 의한 계약 체결'에 SW 조항을 명문화하는 게 목적이다. 강제조항은 아니지만 SW도 계약 때 협상을 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자는 것. 지난해말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가 재경부가 준비중인 국가계약법 시행령 개정안에 '지식기반용역사업'을 별도로 삽입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 이야기이다.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국가계약법에 '최저가 입찰' 대신 협상을 통해 계약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조달청의 '국가계약법 시행령에 근거한 협상에 의한 계약 체결 회계 예규' 같은 것이다. 이 예규는 국가와 계약을 할 때 △예가의 95% 이하에서 계약을 해야하고 △사업자가 제시한 입찰가격의 평균치부터 협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예규를 적용할 사업에 대한 규정이 현재로서는 애매모호하니 SW도 이 기준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또 그 예규를 조달청이 아니라 국가계약법 주무부처인 재경부 예규로 직접 만들자는 것.

그렇게 되면 '최저가 입찰' 관행이 다소 개선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감사는 있게 마련이고, 일선 행정 관리들로서는 결국 최저가 입찰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안은 입찰가격 하한제 도입

근본적인 대안은 입찰 가격 하한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현재 상한은 있다. 95%다. 그런데 하한은 없다.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정부가 상한을 정해놓은 것은 예가를 믿기 때문이다. 그 '상한의 논리'를 차근히 분석해보자.

A라는 사업을 기획했다. 예가가 100이다. 이는 이 정도면 기업이 손해 안보고 충분히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A라는 사업을 위해 최대 100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받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다른 부대 비용도 있으니 기업더러 5는 양보하라는 뜻이다. 그렇잖으면 사업 비용 예상가가 100인데 상한이 95%이어야하는 논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그 정도는 기업도 양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반대 '하한의 논리'에 대해서도 분석해보자.

A라는 사업에는 역시 100이 든다. 3개 회사가 참여했다. 모두 기술평가는 통과했다. B는 90, C는 70, D는 50을 적어냈다고 하자. 현재 관행대로라면 이 사업은 D가 딴다. 그렇다면 D업체에 사업권을 준 행정관료에게 물어보자.

D사는 100의 사업을 50만 들이고 처리할 만큼 기술적으로 뛰어난 회사인가. 아니면 경영효율성이 아주 높아 비용을 반으로 줄일 수 있는 회사인가. 과연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해봤단 말인가. 그리고 혹여 있을 부실의 우려에 대해 따져볼 것을 다 따져봤단 말인가. 아니면 1년 혹은 2년 뒤이면 어차피 다른 부서로 옮길 예정이기 때문에 그냥 "나몰라라"하고 말았단 말인가.

그 관료가 D사를 선택해 50만 들이고도 A 사업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다고 당당히 대답한다면 그는 '예산 낭비 기획죄'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업 기획단계에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아 자칫 엉뚱한 예산을 탕진할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찮게 D사가 나타나 그 우매함을 깨우쳐 준 꼴이 된다.

그러나 공무원의 무책임을 논하기 전에 이는 너무 비상식적이다.

상한이 있으면 하한도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다. 95%의 상한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규모 있는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기 위한 마지노선이라고 얼마든지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것처럼 하한에 대해서도 대국민 서비스의 품질을 관리하기 위한 마지노선으로 이해돼야 한다.

그래서 부실이 우려될 만큼 덤핑이 분명한 입찰 가격을 써낼 경우 입찰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 지금부터 그 과학적 기준을 마련해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IT의 성수대교'는 계속 건설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균성기자 gs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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