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되고 있는 불황. 매출이 감소하는 현실에 정신이 아득해지고, 성장에 목말라 있는 IT업계다. 침체기의 매출 확대...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 하는 목표로 아로새겨진다.
'매출만 늘면 된다'
결과가 모든 수단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전쟁상황. 바로 IT업체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경기침체'라는 환경적 조건을 돌파할 만한 비책을 세우기는 어렵다.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 쯤 되면 '딴 마음'도 먹게 된다. 딴 마음은 '정상 궤도'도 이탈한다. 그러면 승부를 걸어볼 만한 시장 하나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현재 경쟁업체가 차지하고 있는 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윈백'이란 꼬리표를 붙인 영업전략은 이렇게 등장한다.
윈백(Win Back). '이겨서 찾아온다'는 뜻의 이 말은 IT업계에서 경쟁사 고객을 빼앗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윈백에 성공하는 업체는 경쟁자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남의 것을 빼앗아 전리품을 삼는다. 반면, 윈백을 당하는 업체는 안방에 있는 보물을 눈 뜨고 빼앗기는 처참함을 맛본다.
IT불황이 '사상 최악'으로 깊어지면서 IT시장에서 윈백이 횡행하고 있다. 한겨울 삭풍처럼 처절한 바람이다.
윈백은 2년 전만 해도 튀는 마케팅 전략중 하나 쯤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지금은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살기 위한 전략으로 돌변하면서, IT업계를 온통 뒤흔들고 있다.
업종 불문에다 큰 업체와 작은 업체 가릴 것 없이 너도나도 윈백에 뛰어들고 있다.
심지어 윈백을 제1의 마케팅 전략으로 취하는 업체도 늘어나고 있다. 윈백의 기세가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것이다.
◆장기 침체기에 나타나는 윈백 신드롬
윈백 열풍은 국내 IT 시장 침체와 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 신규 시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좀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호황기에는 경쟁사들끼리 굳이 남의 안방을 엿볼 필요가 없다. 반면, 침체기에는 시장을 찾아나선 기업들이 상대 고객을 빼앗는 '땅 따먹기'가 대세로 떠오른다.
최근 등장한 윈백 전쟁중 대표적인 것은 한국HP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손을 잡고 IBM을 겨냥하여 추진하는 'IBM AS400 윈백 프로모션'.
서울과 영남권에서 진행중인 이 프로모션은 IT 최강인 한국IBM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챔피언 도전전'의 요소까지 갖췄다. MS와 HP 연합의 잠재력을 검증할 수 있는 시금석의 의미도 담고 있다. HP와 MS 모두 IBM과의 경쟁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넥센타이어와 화영 등 종전에 IBM의 AS400을 사용하던 고객이 MS와 HP 손에 넘어갔다. 윈백 마케팅의 결과를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는 사례다.
한 번 도입하면 교체가 힘들다고 정평이난 메인프레임에도 윈백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한국HP·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등 유닉스 업체들은 "더 이상 IBM 메인프레임은 의미가 없다"며 교체할 것을 고객들에게 주문하기 시작했다.
메인프레임 윈백은 그 속성상 성공 사례가 드문드문 등장한다. 그러나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파괴적이다.
지난해 SK텔레콤이 차세대 빌링 시스템을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바꿨다. 전북은행도 메인프레임 기반 계정계를 HP 유닉스로 교체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게임은 지금부터다. 일례로 현재 한미은행이 차세대뱅킹시스템을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바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를 HP가 수주하게 될 경우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다.
PC서버시장 역시 윈백에 휩싸여 있다. 중저가 시장 공략에 본격 나선 LGIBM은 윈백 전문 채널까지 확보하려 하는 등 1위 업체인 HP를 겨냥한 윈백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델컴퓨터 역시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를 타겟으로 로우엔드 유닉스 서버에 대한 윈백을 추진하고 있어 열기를 더해가고 있다.
신규 프로젝트가 반토막 나버린 스토리지 시장도 윈백이 주요 전략으로 떠올랐다.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은 한국EMC 고객이던 한미은행과 SK증권을 자사 고객으로 전환시키는 수확을 거뒀다.
포화론이 번져가고 있는 백신시장. 이곳 역시 윈백 프로모션이 한창이다. 화끈한 가격전쟁이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고객을 빼앗은 경우도 있지만 경쟁사 채널을 가로채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채널 윈백'. 이렇게 되면 경쟁사 고객을 유혹하기는 더욱 쉬워진다.
대표적인 업체가 신화정보통신과 아이티센. 신화정보통신은 이미 IBM AS400 윈백 프로모션의 선봉장으로 업계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아이티센 역시 앞으로 LGIBM이 한국HP를 공격하는데 전면에 나설게 분명하다.
◆갈등과 비정의 무대, 윈백
'윈백'은 의미 그대로 남의 땅을 쳐들어가는 영업전략이다. 병법에 의하면 상대방보다 3배의 전력을 갖추고 도전해야 한다. 이는 윈백을 추진하는 업체 역시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윈백이 벌어지는 현장에선 사건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공짜 수주는 물론, 기업과 고객 외에 다른 세력(?)까지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국IBM은 현재 AS400과 메인프레임이 경쟁사의 윈백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두 제품 모두 IBM을 상징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쟁사의 이같은 행보는 IBM 입장에선 불쾌한 도전이다.
공식적으론 IBM은 경쟁사 공세를 대수롭지 않게 평가한다. 도전한다고 아무나 받아주면 같은 급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IBM은 HP와 MS의 공세를 차단하기위해 자사 AS400 고객 단속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인프레임 역시 HP의 공세에 공식 대응은 자제하면서도 시장에선 고객 방어에 적극 나선 상태다.
윈백이 뺏고 뺏기는 싸움이다 보니 업체간 감정 싸움도 종종 일어난다. 윈백에 성공한 업체가 이것을 외부에 적극 홍보할 경우 그 수위는 더욱 올라간다.
한국HP와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간 미묘한 신경전이 대표적이다. 저가 입찰로 알려진 이화여대 서버통합 프로젝트는 조선대학교에서 HP에 패한 한국썬이 HP고객인 이화여대 프로젝트에 저가로 입찰, 윈백에 성공했다.
이에 대해 한국HP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한국썬 측도 조선대를 예로 들어 HP를 걸고 넘어졌다.
바이러스 백신시장도 업체간 사이는 틀어져 있다. 윈백이 대세로 떠오르면서 감정이 개입한 경쟁사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기본적으로 윈백은 기업에서 마지막으로 꺼내드는 카드다. 신규시장을 찾다찿다 실패하면 무리수를 두더라도 윈백을 추진하게 되는 것.
소비재와 달리 엔터프라이즈 고객은 다양한 미끼를 던져주지 않으면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
저렴한 가격은 기본이다. 윈백 때 고객사가 떠안게 될 문제들도 해결해 줘야 한다. 최근 일어나는 윈백을 살펴보면, 당장 매출을 올리기보다는 미래를 위한 투자 성격이 강한 사례들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윈백은 정상적인 영업으로 보기 힘들다. 마케팅전략 일환으로 추진하는 것은 봐줄만 하지만, 영업전략의 '기본틀'마저 윈백이라면 시장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윈백 전쟁은 IT경기가 풀리지 않는 한,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IT업계에 횡행하는 윈백 전쟁이 해소되고 평화가 찾아오려면 근본적으로 'IT시장의 회복' 외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황치규기자 delight@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