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 예선 네덜란드전에 나선 한국 국가대표팀은 충격의 패배를 당한다. 5대0. 국가 대항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점수 차로 지고 만 한국팀은 감독이 중도하차하는 아픔까지 겪으며 16강 진출의 꿈을 접는다.
그로부터 4년 후. 당시 네덜란드팀을 이끌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상암벌에서 붉은 악마들과 함께 포효한다.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그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토털 사커를 선보이며 '정신력'을 가장 큰 무기로 삼던 한국 축구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전술을 전해 준 히딩크 감독은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를 한 단계 성숙시킨 인물이 됐다.
그러나 히딩크와 같은 외국인 감독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 온 건 아니었다. 2004년 6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한국 축구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본 프레레 감독이 그랬다. 물론 본 프레레 감독이 대표팀에서 물러나기까지 과정과,히딩크 수준의 결과를 조급하게 원했던 당시 분위기를 세세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 축구팬들에게 히딩크과 같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외국인 감독(외국인 CEO)'이 무조건적 최선책이 아닌 건 기업들에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6월 취임한 하워드 스트링거 CEO 겸 회장에 대한 싸늘한 시선은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하던 소니가 최근 노트북 배터리를 연이어 리콜하면서 시작됐다. 일부 현지 언론은 "스트링거 회장이 추구한 비용 절감 위주의 미국식 경영이 품질저하를 야기했다"고 강하게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소니는 최근 사상 초유의 대규모 리콜 사태를 겪으며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난 8월 델이 자사 노트북에 장착된 소니 배터리 410만 개에 대한 리콜 결정을 내린 것을 시작으로 같은 달 애플 역시 180만 개의 노트북 배터리를 리콜하겠다고 발표했다. '리콜 행진'은 이달에도 이어져 지난 18일 도시바는 34만 개의 배터리를, 지난 28일에는 레노버가 52만 개를 리콜하기로 했다. 리콜 원인도 화재 가능성부터 충전 불량까지 다양하다.
일부 현지 언론의 시각이라고는 하지만 불량 제품의 원인을 외국인 CEO, 정확하게는 주주 중심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식 경영에서 찾은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금껏 국식 경영은 '효율 증대'와 '결과적 성과'를 극대화한다는 측면에서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이 배워나가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소니 노트북 배터리 리콜사태를 계기로 미국식 경영은 불량품을 만드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다. 주주 배당을 목표로 단기 실적 상승을 좇는 미국식 경영 때문에 품질관리에 필요한 비용마저 삭감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번 노트북 배터리 리콜 파문도 이 같은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물론,미국식 경영이 리콜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입증할 만한 근거는 아직 충분치 않다. 불량품의 정확한 원인이 나온다 해도 이를 비용 절감의 결과로 볼 수 있느냐는 시비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난 7월 발표된 2분기 결산 결과 소니는 가전부문 매출을 크게 늘리며 영업이익과 당기순익을 모두 흑자 전환했다. 매출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 증가했다. 이 같은 극적 반전이 나온 건 지난해 6월 취임 후 9개 공장을 폐쇄하고 9천600명을 정리한 스트링거 회장의 비용절감 방안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내에서 일고 있는 미국식 경영에 대한 경계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IMF 구제금융 후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극단적 평가절하를 경험한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식 경영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분위기가 더욱 강하게 확산돼 있기 때문이다.
기업 가치를 확대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당 국가와 기업이 발 딛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토양을 감안한 것이어야 한다.
미국식 경영이 추구하는 실적 위주의 기업 운영과 적극적인 노동 유연성 확보가 장기 투자 저하와 숙련노동자 퇴출로 이어지는 사례를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궁극적으로 품질과 연결되는 사안들이다. 주체적 수용은 이럴 때 필요하다.
/이정호기자 sunris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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