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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영어사전과 '크라우드소싱'의 힘


[고전으로 읽는 소셜 미디어-4]

[에피소드 1]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2009년 하원 의원들의 세비 지출 내역 문건 45만여 건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가디언이 자료를 공개하자마 2만7천 여 명의 시민들이 22만 여 건의 문서에서 각종 비리를 찾아냈다.

[에피소드 2] 탐사보도 전문 뉴스 매체인 뉴스타파가 지난 해 6월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180명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시민들이 명단의 한글과 영어 이름, 회사명, 주소를 보고 제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뉴스타파의 이 같은 결정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사전협의를 통한 것. 뉴스타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에피소드 3] 위키피디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제 아무리 인터넷 시대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사전을 만든다는 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위키피디아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참고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데이터 조작 등 일부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과제를 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성지’가 됐다.

소셜 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은 뭘까? 물론 처한 입장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더라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다. 대중이 직접 발언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저널리즘 영역에선 ‘대중의 참여’는 좀 더 직접적이다. 초기엔 이메일이나 댓글 등을 통한 소극적 참여가 주를 이루다가 점차 강도가 강해졌다. 최근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한 기사 유통에도 적잖은 역할을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아예 콘텐츠 제작 과정에 동참하기도 한다.

위에 소개한 세 가지 에피소드는 일반 시민들이 콘텐츠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사례를 뽑은 것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이라고 한다.

◆세상 모든 영어를 담아낸 옥스퍼드 영어사전

서두가 길었다. 고전으로 읽는 소셜 미디어 제4탄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만들 때 소셜 시대의 전유물로 꼽히는 크라우드 소싱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됐는 지를 중심으로 살펴볼 계획이다.

흔히 OED란 약어로 통칭되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영어 사전의 완결판으로 꼽힌다. 우리에겐 매년 그 해의 트렌드를 잘 반영한 ‘올해의 단어’를 선정 발표하는 기관으로 유명하다. 지난 해 OED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셀카’를 의미하는 selfie였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완간되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사전 제작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1857년이었다. “세상의 모든 영어를 담아내겠다”는 방대한 포부로 시작된 옥스퍼드 영어사전 프로젝트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28년 초판 10권이 완간됐다. 제작 기간만 71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 만큼 규모도 엄청나다. 초판은 총 1만5천490페이지에 41만4천825개 표제어를 수록했다.1989년 초판을 대폭 증보한 2판이 나올 땐 표제어가 61만5천100개로 늘어났다. 20만 개 가까운 영어 단어가 새롭게 만들어진 셈이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은 옥스퍼드 영어 사전 경쟁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최고 사전으로 인정받는 진짜 경쟁력은 ‘풍부한 예문’과 알기 쉬운 설명 때문이다.

편집진들이 그 때까지 유통되던 각종 고전 및 현대 작품들과 신문, 잡지에서 골라낸 예문들은 영어를 살찌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초판에는 총 182만7천306개 예문이 수록됐다. 이 수치는 1989년 발간된 2판에서는 243만6천600개로 늘어났다.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원 봉사자들이 예문 수집 역할 맡아

이 많은 예문들을 어떻게 수집했을까? 1857년 11월5일 개최된 언어학회에서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작업의 깃발을 높이든 트렌치 주교가 제안한 방법은 ‘모든 시민들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 크라우드소싱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로 그 방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만들기 70년 역사를 담고 있는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 에서 트렌치 주교의 그날 발언을 그대로 옮겨보자.

윈체스터는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전 세계의 영어권 사람들을 상대로 영어의 모든 단어를 망라하는 이 공동작업에 참여하도록 요청, 호소, 강요, 애원, 설득한다는 계획은 그럴듯해 보였다”고 평가했다.

한 사람이 백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백 명이 한 권씩 읽고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가장 예문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사전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업 편집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윈체스터에 따르면 이들은 “한 가지 뜻을 얻기 위해 최소한 5~10개의 예문을 비교, 검토”(97쪽)하는 작업을 했다. 앞에서 소개한 가디언이나 뉴스타파 사례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 셈이다.

◆살인자와 은둔자도 중요한 역할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 작업이 수월했던 건 아니다. 제임스 머리가 3대 편집장으로 취임한 1879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작업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정상궤도에 오르기까지 무려 22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제임스 머리는 취임과 동시에 자원 봉사자들을 돌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크라우드 소싱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참여자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 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선 창조적 소수가 꼭 필요하다. 20%가 전체 일의 80%를 책임진다는 ’80대 20 법칙’은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 그대로 적용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도 마찬가지였다. 수 많은 이들이 참여한 크라우드 소싱 작업에서도 유난히 빛을 발한 몇 몇 스타들이 있다. 사전 편집진들은 서문에 그들의 이름을 표기하는 것으로 감사를 전하고 있다.

‘정신 이상자 겸 살인자’였던 마이너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진들에겐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였다. 그는 편집진들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늘 적절한 예문을 찾아서 보내줬다.

(’영어의 탄생’ 저자인 사이먼 윈체스터는 ’교수와 광인’이란 또 다른 책에서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장인 제임스 머리와 자원 봉사자 마이너 간의 21년에 걸친 공동 작업을 잘 소개하고 있다.)

한 때 유명 대학교수였다가 분쟁에 휘말린 뒤 시골에서 칩거하고 있던 피체드워드 홀이란 인물도 눈부신 기여를 했다. 홀의 업적 중 일부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에서 그대로 옮겨보자.

“편집자에게 끝 없이 어려움을 안겨주었던 ‘develop’ 단어에 대해, 그리고 특히 대명사 He에 대하여 작업을 멋지게 해냈다. 그는 산과 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he에 대해, the noble Murray he와 같은 문구에서처럼 군더더기로서 he, he that의 복합어를 구성하는 he, 그리고 약간 다르게 anyone who 의 뜻으로 사용되는 he who에 대해, he of Oxford 혹은 he of six wives와 같은 전치사구와 연결된 he에 대한 예문을 보내왔다.” (277쪽)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름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 R. R 톨킨이다.

1919년 한 해 동안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팀에서 일했던 톨킨은 오늘날까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톨킨은 알파벳 중 ‘W’ 편찬 작업에 참여해 warm(따뜻한), wasp(말벌), water(물) 같은 단어들과 씨름했다.

◆크라우드 소싱의 모범 보여준 옥스퍼드 영어사전

세상에서 쓰이는 모든(?) 영어를 포괄하는 방대한 작업은 똑똑한 편집자 수 십 명의 힘만으론 도저히 해낼 수 없다.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힘을 보태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들이 읽은 부분에서 적합한 단어의 용례를 찾아서 한 곳에 모을 경우엔 순식간에 방대한 규모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오늘날까지도 영어란 원석을 잘 다듬고 모아놓은 보고로 꼽히는 것은 바로 이런 작업 방식 때문이었다. 사전 편집진들은 인터넷에 대해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이미 크라우드 소싱 방식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주도한 모바일 혁명은 인류에게 엄청난 혁신과 진화를 가져다 줬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는 세상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힘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훌륭한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뜻 밖의 선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참여 욕구’를 기술 발전과 잘 결합한 작품일 따름이다.

‘크라우드 소싱의 산물’인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이런 과감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멋진 작품이다. 문득, 오늘 저녁엔 멋진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한번 들쳐 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든다.

김익현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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