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U후폭풍…한국, 이젠 인터넷 규제국?


방통위 "선언적 수준 불과" vs 전문가들 "규제 물꼬 튼 셈"

[김익현-김영리 기자] "한국이 찬성한 것은 명분 있는 행동이었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규칙 개정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89개국이 서명하면서 발효된 새로운 국제통신규칙(ITRs)에 한국도 서명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연합(UN) 산하 기관인 ITU는 지난 14일(이하 현지 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폐막된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12)에서 개정된 규칙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ITU가 규칙을 개정한 것은 1988년 이후 24년 만이다.

ITU의 새 규칙에는 193개 회원국 가운데 89개국이 서명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한 55개국은 서명을 거부했다.

서명을 주도한 것은 러시아, 중국을 비롯해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말리 등이다. 세네갈, 베네수엘라, 자메이카, 요르단, 싱가포르도 찬성 대열에 동참했다. 한국 역시 새 ITU 규칙에 서명했다.

반면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유럽연합(EU), 페루, 필리핀, 말라위, 칠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인도 등은 서명을 거부했다.

일부 서방국가들은 막판에 서명 거부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대표적인 것이 스웨덴과 핀란드다. 당초 두 나라는 ITU 규칙 개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회의가 진행되면서 결국 반대쪽으로 입장 정리했다.

안나 카린 하트 스웨덴 IT 및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 IT전문 매체인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스웨덴은 자유롭게 개방적인 인터넷을 제한하는 움직임에 힘을 보탤 수 없다"고 밝혔다.

◆어떤 내용이 담겼나?

ITU가 발표한 30쪽 분량의 'Final Acts'에는 국제 인터넷 로밍을 비롯해 스팸 방지 등의 조항이 포함됐다. 또 국제 인터넷 네트워크 사업자들 간의 트래픽 처리 문제와 관련한 조항도 반영됐다.

반면 회의 시작전부터 관심을 모았던 인터넷 거버넌스 관련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1조 1항엔 "이번 규정은 통신 콘텐츠 관련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These Regulations do not address the content-based aspects of telecommunications)"고 규정하고 있다.

인터넷에 대한 내용은 24쪽에 처음 나온다. 인터넷이 좀 더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To foster an enabling environment for the greater growth of the Internet)는 제목 하에 몇 가지 항목들이 나와 있다.

이 중 '섹션1'에 포함돼 있는 "세계 통신/ICT 정책 포럼, '디지털개발. 브로드밴드위원회(BCDC)를 비롯한 ITU의 다양한 포럼 내에서 인터넷의 기술, 발전, 공공 정책 이슈를 다룰 때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조항이 인터넷에 관련된 부분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 관련 조항은 본 규정이 아니라 부가 세칙으로 돼 있다.

따라서 겉보기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통신과 인터넷이 융합되는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는 명분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선언적 의미를 담은 정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인터넷의 아버지로 꼽히는 빈트 서프 등도 ITU의 이번 규칙 개정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국 방통위가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이번 규약에 서명한 부분이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다.

◆미국이 결사 반대한 이유는?

물론 감정적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서방 국가들의 의견이라고 해서 전부 옳은 것도 아니다. 한국은 한국 나름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본 정신준수란 대의와 국익 극대화란 실익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냐는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먼저 미국이 이번 규약 개정 작업에 반대한 이유부터 살펴보자.

두바이 현지에서 반대 운동을 주도한 테리 크라머 미국 대사는 IT 전문 사이트인 리드라이트와의 인터뷰에서 ITU의 이번 행보에 반대한 이유를 크게 다섯 가지로 꼽았다.

일단 미국은 개정된 규칙에 포함돼 있는 용어를 문제 삼고 있다. 리드라이트웹에 따르면 크라머 대사는 '운영기관(operating agencies)'으로 규정됐던 규칙 적용 대상에 '허가받거나(authorized)' '운영기관으로 인정할 수 있는(recognized)'이란 문구를 추가한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줬다는 게 그 이유다.

미국은 5조에 포함된 스팸 방지와 네트워크 보안 부문도 악용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단 미국은 스팸도 콘텐츠의 일종이라는 입장이다. 따라서 스팸 규제가 명문화될 경우 언론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팸 방지 권한을 확대할 경우 콘텐츠에 대한 규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네트워크 보안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입장이다. DDoS 등에 대처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을 갖게 될 경우 반대 여론을 막는 수단으로 확대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보안'이란 용어 자체에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터넷 거버넌스란 측면에서도 ITU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미국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 동안 미국은 인터넷은 다자간 협력 모델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ICANN이나 IETF 같은 민간 기구들이 계속 인터넷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마두 뚜레 ITU 의장이 회의 시작전 공언했던 것과 달리 이번 회의에선 인터넷 관련 의제가 폭 넓게 다뤄졌다고 미국은 비판했다. 결국 이번에 개정된 규칙이 '트로이 목마' 같은 역할을 할 우려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이 찬성표를 던진 이유는?

이번 회의에서 한국이 찬성표를 던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강한 비판이 쏟아졌다. 방통위가 인터넷에 대한 정부 통제권을 강화하는 규칙에 서명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 방통위는 "규칙에 포함된 네트워크 보안-안전과 스팸의 경우 회원국이 노력하여야 한다는 선언적 규정만 있다"면서 "일부 언론이 언급하고 있는 국제 기구 공조에 대한 내용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방통위는 또 "정보보호, 스팸, 네트워크 침해 등과 관련된 인터넷 이슈는 ITU, OECD, ICANN 등 모든 국제기구와 국제 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다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면서 "폐막회의에서도 이런 입장을 회원국들에게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또 89개 서명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나라들이 이번 규칙 개정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방통위는 "서명에 반대한 국가는 20여개 국가이며, 나머지 회원국들은 본국과 상의 후 추후 서명여부를 ITU에 통보하겠다고 밝혔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ITU가 공식 발표한 투표 결과에 따르면 55개국이 서명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으로 돼 있다.

방통위 입장에선 ITU의 이번 규칙 개정 작업이 변화된 환경을 담기 위한 선언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찬성표를 던진 자체가 곧바로 인터넷 규제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는 입장인 셈이다.

반면 미국 등은 이번 개정 규칙 자체에 인터넷 규제에 대한 직접적인 문구가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향후 규제를 확대하는 빌미가 될 소지가 적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번에 개정된 규칙이 앞으로 '트로이 목마'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국내 전문가들은 어떻게 보고 있나?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번 규칙 개정에 찬성한 것은 성급했다는 비판의견을 많이 내놓고 있다. 선언적 의미에 불과한 수준일 수도 있지만 앞으로 상황 변화에 따라선 문제의 소지가 될 개연성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 이사는 "지금으로서는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문제가 발생할 개연성이 많다"면서 "이런 잠재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명했다는 것은 성급한 결정이다"고 비판했다.

전 이사는 조약 내용에 명시적으로 인터넷이란 문구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스팸 문제 등과 관련해 국가들이 협력해야 한다(should)는 문구가 구속력을 가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스팸이나 내부 통신 보안과 관계된다는 이유를 앞세워 특정 데이터를 허용하거나 제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방국가들이 거부한 반면 개발도상국, 독재국가들이 서명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란 게 전 이사의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방통위의 이번 서명은 문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지훈 관동의대 명지병원 교수 역시 비슷한 의견이었다. 스팸 처리나 보안 등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어쨌든 국가가 인터넷에 손을 대겠다는 타이틀의 규약에 찬성하고 사인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미국 등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고 인터넷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국가는 반대했는 데, 선진국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굳이 중국, 러시아, 중동 국가 등 인터넷 통제 국가와 발을 맞출 필요가 있나"고 비판했다.

송경재 경희대 교수는 "인터넷에선 뭔가 만들어지거나 가이드라인 제정하는 것 자체가 규제의 의미다"면서 "(따라서 이번 규칙 개정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제약 요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방통위는 선언적 의미에 지나지 않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기권표를 던져도 되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반면 박재천 인하대교수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박 교수는 "현재는 선언적 문구다. 국제적인 합의가 또 있어야 실행이 된다. 바로 실행하자는 게 아니라 협력하자는 것"이라면서 "어떻게 발전할지는 추세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 외국 전문가들은 어떻게 보고 있나?

ITU의 이번 규칙 개정을 놓고 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찬반 양론이 엇갈린다. 물론 미국 쪽에선 당연히 반대 여론이 더 많다. 인터넷 자유가 훼손될 우려가 적지 않다는 '명분' 못지 않게 미국 주도의 인터넷 거버넌스 구조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실리'가 함께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TCP/IP 프로토콜을 만들면서 '인터넷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빈트 서프 구글 부사장은 이번에 ITU가 채택한 규칙에 대해 날선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그는 IT전문 매체인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새 규칙에 담긴 용어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소비자단체인 민주주의와 기술센터(CDT)의 엘러리 비들 정책 애널리스트는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규칙 개정을 주도한 나라들은) 시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방식을 통제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지 메이슨대학 머카터스센터의 제리 브리토 수석 연구원 역시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규칙은 트로이목마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중국 등 규칙 개정을 주도한 나라들이 향후엔 규약 본문에 인터넷 관련 규정을 포함시키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브리토 연구원은 "개방형 구조로 되어 있는 인터넛 거버넌스 포럼(IGF)이나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 등에선 중국, 러시아 같은 나라들이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ITU에선 (인터넷 정책을 주도해나가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미국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데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시라큐스대학의 밀턴 뮐러 교수다.

뮐러 교수는 미국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건 잘못된 처사라고 비판했다. 상황을 극단적인 쪽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역시 IT전문 매체 아스테크니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끝까지 서명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고 주장했다.

김익현-김영리 기자 sini@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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