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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유인택 기획시대사장


 

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입니다.코캄엔지니어링 홍지준 사장의 스케일크고 열정적인 벤처창업이야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제조업기반 벤처기업이지만 300억원대가 넘는 엄청난 투자로 승부수를 던진 홍 사장의 폭발적인 글로벌 사업이야기는 아직도 국내 시장에 머물고 있는 벤처산업계에 많은 것들을 시사하고 있었습니다.

홍 사장이 추천한 72번째 주인공은 영화제작회사인 기획시대 유인택 사장입니다. 홍 사장은 유 사장을 추천하면서 “문화운동가에서 영화제작사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CEO”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참담한 실패를 딛고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집념의 사나이라고 말했습니다.두 사람은 친구사이입니다.물론 사회에서 만났지만,허심탄회하게 지내는 조언자라고 합니다.

기획시대 유인택 사장이 어떤면에서 성공한 집념의 영화제작자인지,그의 영화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기획시대 유인택(47) 사장은 요즘 신이 났다.그동안 자신을 외면했던 충무로쪽 사람과 영화투자자들이 너도나도 만나자고 하기 때문이다.

유 사장은 CEO라기보다는 영화제작자란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영화인이다.강남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났다.유 사장의 웃는 모습을 두고 주위에선 하회탈같다고 한다.천진난만해 보이는 얼굴과 약간처진 눈매탓에 그의 웃는 모습은 영락없이 하회탈을 쏙 빼닮았다.

순진해보이는 첫인상,해맑은 웃음,거침없는 솔직함이 눈길을 끈다.작은 키에 왜소해보이는 체구지만 유 사장의 풍모는 강인함과 집념을 물씬 풍긴다.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랗게 물들인 머리하며,아무렇게나 걸친듯한 털털한 복장은 스스로 영화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93년 설립된 기획시대는 그동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너에게 나를 보낸다’, ‘이재수의 난’, ‘일단뛰어’, ‘미인’ 등의 영화를 제작한 영화제작회사.

초창기 사회성짙은 영화제작에서 탈피,최근에는 대중성을 중요시하는 영화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99년 ‘이재수의 난’흥행실패로 회사문을 닫을 뻔했지만,화려하게 재기,올해 100억원의 매출을 바라볼만큼 안정궤도에 진입했다.

반독재의 몸짓,마당극의 대부

‘피의자 유인택,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징역 10개월 구형’ 졸업을 1년앞둔 78년,유인택은 영등포구치소에서 영어의 몸으로 10개월을 보내야 했다.

유인택은 서슬퍼런 유신독재체제에 항거하며 민주화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운동권출신.75년,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약대에 입학한 유인택의 앞길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격정의 세월속으로 빠져든다.

유인택은 당시 숨막히는 캠퍼스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 때는 박정희정권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군사독재가 극에 달하던 때였습니다.학교앞 등교길에는 전경이 쫙깔려있고,수위실과 강의실에는 형사가 각각 배치돼 늘 감시를 했습니다”

숨막히는 현실은 유인택에게 무언가에 빠지게 했다. “그 때는 정말 뭔가에 미치지 않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정도로 숨막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가 심취하기 시작한 게 바로 연극이었다.

방황끝에 들어간 연극반은 유인택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축제때 우연하게 탈춤을 보면서 유인택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렇듯 문화적인 전통물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가 한껏 묻어있는게 믿기지 않았다.그가 마당극에 빠져든 결정적인 계기다.70년대 서울대 연극반의 중추멤버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해온 ‘마당극’운동을 주도했다.

반독재민주화 운동을 서클이 아닌 문화,예술활동을 통해서도 해낼수 있고,이러한 문화활동이 투쟁의 무기가 될수 있음을 깨달은 유인택은 이 때부터 반독재 문화운동의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유인택은 대학 2학년 시절,소설가 황석영씨를 비롯해 김지하,홍세화,김민기,임진택씨 등 다양한 문화운동 1세대들을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는다.

“문화운동을 하던 선배들을 만나면서 삶의 보람을 느꼈죠.이들 문화운동 1세대들은 저에게 인생의 스승이었습니다” 각종 마당극을 잇따라 기획했다.

고작 관객 100 여명 정도가 보는 언더그라운드 연극이었지만,유인택에게는 유일한 탈출구였다.83년 3월,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 맥네일에 입사했다.

이미 대학 4학년때 결혼,홀몸이 아니었던 유인택은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수밖에 없는 처지였다.하지만 유인택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었다.

낮에는 제약회사 샐러리맨으로,밤에는 연극기획일에 매달렸다.1년 6개월간 이중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84년 6월,사표를 던졌다.

“안되겠더라구요.마음은 콩밭에 가있는데 되겠습니까? 결국 하고싶은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약회사를 그만둔 유인택은 그 때부터 본격적인 문화운동가로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유인택의 대변신,영화를 잡아라

84년,연극기획사인 연우무대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이 때부터 그는 사회성짙은 연극을 집중적으로 기획하는 언더그라운드 연극 기획자로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결성,사무국장을 맡으며,본격적인 반독재 문화운동을 조직적으로 해나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87년,기획한 이애주 한판춤 ‘바람맞이’.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유료로 무대에 올렸다.늘 지하에서만 100여명의 관객들을 대상으로,무료로 하던 행사를 오픈된 무대에서 그 것도 유료로 기획했던 것.

늘 탄압의 대상이었던 반체제 공연을 공개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8000여석이 완전 매진됐고,암표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87년 6월항쟁,87년 대선을 거치면서 운동권이 분열양상을 보이자,유인택은 깊은 고민에 빠져든다.유인택의 대변신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6월항쟁이후 유인택의 생각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문화예술이 노동자,농민,도시빈민 등 이른바 민중을 위한 것이지만,민중의 주체가 시민사회로 변모하고 있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전에 접했던 대중은 매우 한정된 개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폭넓은 대중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리고 어느덧 문화운동을 한지 10년이 지나,30대중반의 나이지만,번듯한 직업이 없다는 점도 유인택의 대변신을 재촉한 또다른 요인이었다.

“전문적인 기획자가 되고 싶었죠.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했는데,제대로 해 직업으로 굳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3년간 문화운동계를 떠나,제대로 배울 것임을 천명했다.

좀더 폭넓은 대중을 만날수 있는 방법은 방송,가요,영화중 하나였다.좀더 친근한 영화쪽을 택했다.유인택의 변신은 당시 문화운동권에서는 대단한 이슈였다.89년 초,모가드코리아란 영화기획사에 입사했다.

유인택은 그렇게 제도권 영화산업에 첫발을 내딛는다.그의 인생은 이 때부터 조금씩 풀린다.30대중반의 나이였지만,그는 영화계 밑바닥생활부터 시작했다.“정말 그 때는 밤낮도,주말도 없었던 것같습니다”

영화 홍보기획쪽 일을 맡았다.매커니즘은 연극과 흡사했다.모든게 돈으로 연결되는 영화산업의 생리를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인택은 짧은 기간내에 영화산업에 눈을 뜬다. “영화만큼 폭넓은 대중을 접할수 있는 분야도 없더라구요.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대중과 접할수 있는 큰 무기가 될수 있음을 직감했죠”

영화 입문한지 2년이 지난 92년말,유인택은 고민에 휩싸였다.실망스런 대목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 “당시 영화를 왜 저렇게 만들고,회사를 왜 저렇게 운영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요”

93년,1월 유인택은 영화입문 2년여만에 ‘기획시대’란 영화제작사를 설립,주위를 놀라게 했다.직접하면 제대로 할것같았다.

통상 10년쯤 굴러먹다 제작자로 변신하는 충무로의 관행에 비추어볼 때 경력 2년 남짓한 유인택의 홀로서기는 놀라운 ‘비약’이었다.

이는 영화판에 말뚝을 박겠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다.자본금 5000만원으로 종로에 사무실을 냈다.하지만 영화사업에 임하는 유인택의 마인드는 애당초 불행을 잉태하고 있었다.

우선 그가 영화사업을 시작한 것은 돈을 벌려고 한 것도,영화에 미쳐서도 아니었다.그저 뭔가 의미있는,남들이 꺼려하는 영화를 만들자는 ‘독특한 영화만들기’에 초첨을 맞추고 있었다.즉 상업성과 사업성이 약한 개념이었다.

어린이들이 저질 홍콩비디오물에 노출된 것으로 보고,93년 내놓은 첫 작품,어린이비디오 영화가 보기좋게 참패하면서 유인택의 생각은 빠른 속도로 변하기 시작한다.이 때부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94년,당시 ‘예쁜 엉덩이’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여배우 정선경이 주연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란 영화를 통해 유인택은 본격적으로 상업적 마인드를 갖기 시작한다.

당시 이 영화는 선정적인 장면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는데,특히 유인택,장선우감독,문성근,여균동 등 이른바 문화운동권출신들이 만들어 더욱 화제가 된바있다.

처음에는 유인택도 제작에 반대했다.하지만 유인택은 “새로운 것이니까 한다”는 장선우 감독의 설명을 듣고 제작을 강행했다.“전 지금도 영화제작의 잣대를 새롭냐,안새롭냐로 결정합니다.저의 판단기준을 가르쳐준 분이 바로 장선우 감독이죠”

95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청년,전태일’은 서울에서만 25만명의 관객을 동원,대히트를 기록했다.사회성 짙은 주제의 영화가 성공을 거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역시 유인택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유인택은 각종 영화제관련 상을 휩쓸며,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그는 '아름다운 청년,전태일’을 통해 그동안의 짐을 많이 덜었다고 한다.유 사장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돈버는 사업성에 골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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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실패,죽음같은 좌절

하지만 금새 좌절이 찾아왔다.승승장구하던 유인택은 여세를 몰아 역사에 남을만한 대작을 만들어보겠다며 99년, ‘이재수의 난’을 제작했다.

“운동권 제작자의 한계가 아니겠느냐”, “사회변화를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사회파 제작자”라는 혹평이 쏟아졌다.무엇보다 “유인택은 좋은 영화는 만들지만,상업영화는 못만든다”는 평가는 유인택에게 치명적이었다.

단한번의 흥행참패로 유인택은 재기불능속으로 빠져들었다.10억원의 빚만 덩그라니 남았다.투자자들은 싸늘하게 돌아섰고,회사 직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돈도 사람도 다 떠났다.

앞이 캄캄했다.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90년대 영화산업계의 현안이던 영화진흥법과 영화진흥위원회 출범 등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어다녔다.

하지만,영화 한편 실패하자 모든 충무로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그는 냉혹한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고 회고한다.회사는 풍비박산났고,앞은 캄캄하기만 했다.

파산이라는 게 뭔가 처음으로 깨달았다.회사문을 닫고 영화산업계를 떠날려고 마음먹기도 했다.99년초는 IMF직후라 설상가상이었다.

‘이재수의 난’흥행실패후 3년간은 유인택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세월이었다.닷컴,벤처열풍에 힙입어 영상자서전사업,사이버캐스팅사업 등의 계획서를 만들었지만,지인들이 만류해 포기했다.

자포자기상태에 빠진 유인택이 찾은 것은 친구였다.고등학교 친구와 민주화운동을 하다 같이 옥고를 치른 이른바 ‘긴급조치9호 친구’들을 찾았다.

연우인더스티리 이건환 사장과 경북대 이장우 교수, 한국문화진흥 김준묵 사장등은 그에게 주옥 같은 사업적 조언을 해준다.

“두 쪽에서 하는 말은 영화계의 신망이 남아있는 만큼 회사조직을 재정비해 다시 재도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영화계를 떠나는 것은 이구동성으로 극구 말리더라구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던 방식에서 벗어나 영화제작과정을 시스템으로 처리하도록 조직을 바꾸고,개인회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라는 충고였다.

그리고 재기에 필요한 시드머니는 가까운 지인들에게 주식을 팔아 확보하라는 조언을 해줬다.어렵사리 30명에게 십시일반 지분을 매각,6억5000만원을 모았다.

실패후 3년이 지난 2001년 2월의 일이었다.그는 실패후 재기하는 과정을 인생에 있어 두번째 엄청난 변신을 한 시기였다고 진단한다.

그는 회사를 주주와 투자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형태로,그리고 시스템적으로 일이 처리될수 있도록 재조정한 과정을 ‘리모델링’이라고 설명한다.

“전 회사를 리모델링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제 2의 인생이 시작됐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식의 ‘주’자도,펀딩의 ‘펀’자도 모르던 그였지만,그는 주식 65%를 매각,많은 주주들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돈많은 사람이 아니고,자신을 가장 잘알고,자신의 사업에 도움을 줄만한 지인들 중심으로 지분을 매각하거나,자문위 멤버로 영입했다.

유인택, 그는 누구인가
47세.충북 제천생.서울대 약대(75학번)졸.70년대 반독재운동을 펼친 서울대 연극반의 마당극운동을 주도한 운동권출신.연극,마당극,영화 등 문화산업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도구로 활용하며 80년대 왕성하게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문화운동가.영화계에 뛰어들어 영화 ‘아름다운 청년,전태일’ 흥행에 성공,일약 스타덤에 오른 영화제작자.탁월한 기획력과 강한 추진력이 강점.영화산업계에선 마당발로 통할만큼 발이 넓다.
취 미 주말에도 거의 출근해 일을 한다
소주 한병(최근 건강때문에 술을 삼가고 있슴.올초부터 금연중)
운 동 골프(이제 막 시작해 십여차례 라운딩한 초보자.100대초반의 스코어)
존경하는 CEO 특별히 없다.
친한 IT맨 홍지준 코캄엔지니어링 사장,이장우 경북대교수,이건환 연우인더스트리 사장
10년후 모습 e메일이 ‘yit2020’이다.이는 65세가 되는 2020년까지 영화제작자로서 활동을 을 하겠다는 개인적인 의지의 표현이다.10년후쯤에는 헐리웃에 기획시대의 지사를 설립,글로벌 영화제작에 나서고 있을 것이다.

화려한 재기,유인택의 질주

3년간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유인택이 내린 결론은 절대 ‘이재수의 난’전철을 밟지 말자는 것.그리고 무조건 돈을 벌자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몸과 마음만 희생하면 뜻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어느 순간부터는 돈이 없으면 뜻있는 일도 할 수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목숨걸고 일에 매달렸다.사람도 새롭게 충원하고,조직도 정비했다.

그런 절박함 탓인지,그는 올해들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올 5월에 개봉한 영화 ‘일단뛰어’가 그런대로 선방한 데이어 6월 개봉한 ‘해적,디스코왕되다’가 1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것.

영화 두편이 불과 두달만에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자문을 할 정도다.지옥같았던 3년간의 고통스런 나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외면했던 투자자들의 전화가 이어지고,등돌렸던 충무로 사람들이 하나 둘 그를 반기기 시작했다.그는 여세를 몰아 올 9월에는 국내 영화사장 최대규모인 100억원을 쏟아부은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개봉,또한번 ‘대박’을 꿈꾸고 있다.

유인택이 요즘 영화산업계의 뉴리더로 떠오르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재기하자마자 메이저 영화제작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영화제작사는 통상 1년에 한,두편의 영화를 제작한다.한 두개만 떠도 먹고살기 때문이다.실제 메이저 제작사로 꼽히는 회사들은 대부분 1년에 3편정도의 영화를 제작한다.

하지만 기획시대는 두 작품을 연이어 히트시킨데 이어 올 하반기에 무려 3편의 영화를 개봉할 예정이다.게다가 내년에 제작할 서너편의 영화기획작업도 곧 시작할 예정이다.

기획시대는 이 때문에 벌써 강재규필름,싸이더스,명필름 등 국내 손꼽히는 메이저제작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빅5’대열에 합류했다.지난해 65억원의 매출을 올린데 이어 올해는 100억원의 매출을 자신한다.

3년간 나락에 떨어졌던 유인택은 이렇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국 영화산업의 뉴리더로 거듭나고 있다.특히 그는 운동권 제작자에서 이제는 대중영화 흥행수표로 서서히 인정받으며 투자자들로부터 연일 뜨거운 시선을 받고있다.

유인택의 성공론

기획시대 직원들은 요즘 거의 매일 새벽 1,2시에 퇴근한다.일감이 넘쳐 늘 손발이 모자라기 때문이다.굶어본 사람이 배고픔을 안다고,유 사장은 이제 철저히 수익성중심으로 영화제작에 나선다.

그는 “이젠 네가티스시대는 갔다.이젠 포지티브시대다.영화도 달라져야한다”는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한다.최근의 잇따른 흥행성공은 1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쳐 새로운 제작시스템을 구축한후 얻은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유 사장은 요즘 틈만나면 일끝내고 새벽녘 주주들에게 영화사업의 진행상황을 e메일로 보낸다.투자금확보는 어떻게 되었고,캐스팅은 어떻게 되었고 하는 것들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이젠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너무나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가 꼽는 첫번째 성공론은 ‘흥행의 성공’.

“흥행으로 승부해야 합니다.영화제작회사 CEO는 제작자 입니다.따라서 좋은 영화고 뭐고,무조건 흥행에 성공해야 합니다” 두번째 성공론은 작품의 판단기준을 ‘수익’으로 해야 한다는 ‘수익우선론’.

“이제는 영화를 제작할 때 주주와 투자자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아직도 많은 영화종사자들이 하고싶은 영화를 만들고자하는 욕망에 휩싸여 있습니다.위험한 생각이죠.주주와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안겨줘야 다시 재투자되고,확대재생산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목표가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타는 것’에서 이제는 ‘헐리우드 오피스박스 1위에 등극하는 것’으로 바뀐 것도 이런 수익우선론과 맥을 같이한다.시장을 키워야하는 것도 성공론의 또다른 키워드란다.

“지금은 10,20대와 여성이 주관객이지만,앞으로는 모든 연령층을 끌어들여야 합니다.주 5일제 근무로 인해 가족영화에도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유 사장은 국내 영화산업계도 이제는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야할 때라고 진단한다.영화산업은 한편의 도박같다고 한다.영화 한편의 흥행여부에 따라 제작자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획시대 유인택 사장.그는 이러한 도박을 즐기며,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고 있는 한국영화산업의 리더로 우뚝 서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유인택 사장은 지금도 주말이 없다고 합니다.넘치는 일감과 외부활동 등으로 늘 하루 하루가 정신없다고 하네요.가족들에게 이 점이 제일 미안하고 합니다.이제는 으레 그려려니 한다고 합니다.개인적으로는 가족들에게 보상할수 있는 길이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65세까지는 계속할 생각이라고 털어놨습니다.

김광일기자 goldpar@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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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대,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 93년 1월
종업원 20명
자본금 5억9600만원
연락처 (02)514-4242
사업영역 영화제작사
경영계획 2004년 코스닥등록.미국 헐리우드 시장진출
매출목표 2002년 100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