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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비폭력의 등불로 평화를 비춘 '위대한 영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란찬드 간디지만, 보통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린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이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비폭력 저항 운동을 이끌었고, 많은 종교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인도를 하나의 힘으로 이끈 민족 지도자.

'who?시리즈-마하트마 간디'(다산어린이)는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집안은 상인계급(Bania Caste)에 속했고 식료품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줍음이 많았던 간디는 학교를 그만두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891년 22세가 되던 해 영국 유학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게 되고 1895년 인도인에 대한 인두세 반대 투쟁을 시작으로 본격적 민족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1917년,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 '사티아그라하'를 시작하게 된다.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지킨다'는 뜻으로 간디는 비폭력 저항 운동 이라는 유례가 없는 저항 방법을 실천해 낸다.

사티아그라하는 남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간디는 잘못된 법을 어김으로써 그 법이 얼마나 옳지 않은 법인지 남아프리카 정부에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 취지에서 간디는 인도 노동자와 행진을 벌여 아시아인 등록증 없이 트란스발 국경을 넘었고, 그것은 아시아인 등록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정부가 깨닫게 하여 스스로 법을 고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평화적인 행진으로 악법에 대응한 인도인을 폭력으로 다스렸다. 이 일을 통해 간디는 단숨에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인사가 되었고, 남아프리카의 정부는 미개인으로 보여져 세계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이후 인도로 넘어온 간디는 인도 독립을 위해서 사티아그라하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르탈 운동과 스와데시 운동을 주도했다. 하르탈 운동은 인도의 모든 노동자가 일손을 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자 인도의 모든 경제, 교통, 교육, 무역이 멈춰 섰다. 인도를 통해 상당한 이득을 취했던 영국에게 인도의 산업이 멈춘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영국 경찰은 하르탈에 참여하는 인도인을 강제로 일을 시키기 위해 폭력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사티아그라하 정신을 지키며 결코 폭력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간디는 이로써 영국 식민 정부를 향해 인도인이 뭉쳐 한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식민 지배 시대에 비폭력 저항이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독립으로 이어진 예는 인도가 유일하다.

"비폭력은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무기이다. 약한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폭력이 짐승의 법칙인 것처럼 비폭력은 인간의 법칙이다" ('Who?시리즈-마하트마 간디' 153쪽)

간디의 사례는 인류가 야만적인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그릇된 정책과 제도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으로 의미가 깊다.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인도 민중의 영웅이자 지도자가 된 간디에게 시인 타고르는 '마하트마'라는 별칭을 지어 주게 된다.

마하트라마는 별칭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퍼졌고, 인도인은 간디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렀다. 간디의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후세에도 영향을 끼쳐 미국의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 대중적 시민 불복종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인 네루는 그의 죽음을 두고 큰 빛을 잃었다고 했지만, 그는 지금도 온 세계인의 가슴에 평등과 용기라는 찬란한 등불을 비추고 있다.

좋은 책의 발견 북스커버리 cbci 서하나 jindalae@cb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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