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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아에이오우의 가수 예민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아에이오우’ ‘귀로’ 등 섬세하고 맑은, 서정성 짙은 노래들로 알려진 가수이자 작곡가 예민이 자신의 노래와 꼭 닮은 삶을 살고 있다. 2001년부터 분교음악회를 기획해 진행하며 아이들과 자연 속에서 음악을 실천하고 있는 예민의 음악적 테마는 ‘소통’이다.

꽤 잘 나가는 가수이자 작곡가 예민이 분교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1996년이었다. 그는 1992년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가 수록된 2집 활동을 끝으로 돌연 감행한 미국 유학 중이었다. 시애틀 코니시 예술종합학교(Cornish College of the Arts) 현대음악 작곡과에 재학 중 잠시 한국에 들어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촬영을 위해 평창을 방문했다. 예민의 노래풍과 어울리는 그림 연출을 위해 찾은 곳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입탄분교였다.

“그 전까지는 분교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전교생이라야 고작 5명뿐인 아이들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으로 다가왔죠. 그 아이들과 개울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밭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한곡이 끝나고 ‘아에이오우’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개울가로 내려가 주섬주섬 조약돌을 주워온 아이들이 제 노래에 맞춰 돌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기 시작했죠.”

음악적 방황, 그에게 진정성을 선사하다

아이들과의 추억과 분교음악회에 대한 어렴풋한 밑그림만을 품고 예민은 시애틀로 향했다. 평생을 따라다녔고, 늘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던 그의 음악적 갈등은 한층 더 심해지고 깊어졌다. 제 아무리 많은 곡을 만들고 좋은 노래를 만들더라도 결국은 12음계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다. “좋은 소리로 그럴 듯한 리듬을 만들어 인기곡을 만든다고 해서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근본적인 회의에서 시작한 고민은 꼬박 6개월 동안 계속됐고 음악은커녕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피아노 앞에도 앉지 못하고 자신의 음악에 대한 고민에만 열중했다. 이는 고민이나 갈등을 넘어서 홍역을 앓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음악적 방황은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까지 계속됐다.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될 귀한 것들은 형태도, 색도, 맛도 없어요. 공기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물 역시 맛 자체가 없으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분명 소리를 내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들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소리이고, 그 소리가 없어지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의 음악활동은 그 소리들을 찾는 데 주력하자고 마음먹었어요. 그것이 좀 더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믿었죠.”

그 소리를 찾던 중 예민은 스스로가 악기임을 깨달았다. 쇼팽이든, 베토벤이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새는 새소리, 나무는 나무의 소리를 내듯, 사람은, 그리고 예민은 사람의 소리, 예민의 소리를 내야하는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11월 말, 비가 추적거리는 시애틀의 아파트 마룻바닥에 죽은 듯 누워 고독해하고 방황하는 저 스스로의 감정을 소리로 표현하면 그게 음악인 거예요. 저는 사람의 소리를 내기 위한 도구로 음악을 선택한 사람이니까요. 모든 것이 갖춰진 상태에서의 멋있는 연주나 합창도 좋지만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만큼 제 가슴을 울리는 음악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 같아요.”

논두렁에서 새참을 먹다가 흥에 겨워하는 할머니의 소리, 아이들끼리 모여 흥얼거리는 소리 등에서 깨달은 ‘진정성’은 오랜 음악적 방황 끝에서 만난 값진 선물이었다.

자신의 소리를 내는 아이들

입탄분교 아이들과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예민은 2001년 분교음악회를 기획해 진행했다. 책장수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이들을 설득해 영월의 한 분교에서 첫 공연이 있던 날이었다. 일곱 명의 아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고, 그는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부르고 있었다. 한동안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분교 아이들은 전부 입탄분교 아이들 같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2분쯤 잘 듣더니 산만해지기 시작했어요. 노래를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삶은 옥수수가 그득 담긴 바구니를 놓고 가시더라고요. 아이들은 더 떠들썩해졌고 한 녀석은 무관심 속에 노래하는 게 안쓰러웠는지 노래하고 있는 저에게 옥수수를 권하기도 했죠.”

1년 동안 120개 분교에서 음악회를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첫날부터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자신이 노래를 하면 조용해지는 줄만 알았던 예민은 큰 모멸감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때부터 자신의 노래를 일방적으로 들려주기 보다는 어떻게 아이들과 가까워질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악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야 할까를 고민하다가 코니시 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던 세계 민속음악을 떠올렸다. “인류학적으로 음악과 인간의 본질적인 관계는 소통이었어요. 근본적으로 악기는 연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통을 위한 것이었죠. 기우제를 하면서 비를 간절히 소망하는 남미 원주민들이 개구리 같이 생긴 악기를 연주한다든지, 제사상을 차릴 때 ‘팅샤(티벳불교의 종처럼 생긴 악기)’로 배고픈 영혼들을 부르는 식이죠.”

그때부터 예민은 전세계 희귀 악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람의 두개골, 당나귀 머리뼈, 신석기 시대 돌, 돌연변이 소라거둥, 악어·가오리 가죽 등으로 만들어진 희귀 악기 하나에 아이들은 3분의 집중력을 그에게 선사했다. 아이들의 눈길을 끌고 악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모으기 시작한 세계 민속악기들은 인류학적, 고고학적 가치가 높고 희귀한 것들로 가득 찬 박물관과도 같다. 이 악기를 보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소리를 내보면서 아이들은 소리의 본질을 알고 자신의 소리를 낼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음악의 소비자로 키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학교 음악교육은 어른을 흉내 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이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 음악의 주체자로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요. 이에 선행돼야 할 것은 스스로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자기만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라는 행위를 통해 일체감을 느끼는 거죠.”

이에 예민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어린이 예술창작학교 ‘온리 원(Only One)’을 진행하고 있다. 창작악기 수업을 통한 자기 소리 찾기 과정으로 아이들의 창의적 활동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첫 수업시간에 예민이 아이들에게 던진 질문은 “무엇과 소통하고 싶은가”였다. 누구나 ‘악기’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것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이다. 바이올린, 오카리나 등 악기를 부수고 조립하면서 소리의 본질과 부품별, 부분별 기능을 공부하고, 악기든 공명통이든 자신만의 악기를 만들고 소리를 내면서 아이들은 음악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음악가가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의사가 바라는 것은 환자가 없는 세상이지만, ‘의사’라는 직업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되는 아이러니가 존재하죠. 음악을 하는 사람이 꿈꾸는 세상 역시, 음악가가 없는 세상이에요. ‘음악가’라는 존재가치가 희미해진다고 해도, 음악가인 제가 꿈꾸는 세상은 모두가 음악가가 되는 세상, 음악이 생활이 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이들이 베토벤이 되는 세상, 그 세상은 각자의 소리를 창작하는 세계이고, 그 소리에 행복함이 넘쳐나는 건강한 세상일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소리를 사랑하는 예민이 꿈꾸는 것처럼 말이다. M

/글|허미선 기자 hurlkie@inews24.com · 사진|김선태 기자 kimstnemo@hanmail.net · 악기사진 제공|뮤뮤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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