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 주소 추적 기술 발달로 인터넷 이용자들의 사이트 접속 기록에 대한 추
적이 용이해지면서 '자유 공간'이란 인터넷의 매력이 크게 위협 받고 있
다. 익명으로 자신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익명의 섬' 역시 점
차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고객이나 사이트 이용자들의 서핑 경로를 추적, 유형화함으로써 맞춤형 마
케팅을 하고자 하는, 주로 상업적 용도로 개발된 IP 추적 기술은 이제 인
터넷 이용자들이 어떤 사이트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가
려 낼 수 있게 됐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이 이 같은 IP 추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과학 기술이 갖는 양면성과 아이러니를 새삼 재확인하게 된
다.
인터넷 이용자들이 방문한 곳에는 어김없이 흔적이 남게 되고, 사이트 운
영자들이나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자, 나아가 수사 당국은 이들 흔적을 추
적해 인터넷에서 '한 일'을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넷
의 익명성을 방패 삼아 ‘허튼 짓’을 했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지난 해 모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시민단체의 낙천 낙선 운동을 매도한 글
을 시민단체 게시판에 올렸다가 발각 일보 직전까지 갔던 사례가 대표적이
다. '익명'이란 외피를 두르긴 했지만 IP 추적을 통해 그 글이 국회 의원
회관 몇 층 사무실에서 올린 것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하지만 국회 사
무국이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최종 출처 확인을 거부해 정확한 신
원까지는 드러나지는 않았다.
최근 삼성생명 임직원 일동 명의로 참여연대 게시판에 올라온 삼성그룹 비
판 글에 대한 경찰의 IP 추적 수사는 사이버 공간이 더 이상 익명의 공간
이 아님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 사례라고 할 만 하다. 경찰이 대동했던
전문가가 삼성측 사람인 것으로 드러나 수사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고, 참
여연대가 이 글을 이미 삭제한 뒤여서 IP 추적은 불가능했지만 사이버 공
간의 익명성을 활용해 회사나 조직의 내부 비리를 고발하거나 제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가슴 뜨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옳은 일이든, 아니면 그른 일이든,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
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적인 소식 또한 없지 않다. IP 추적을 불
가능하게 해주는, 말하자면 ‘IP 세탁 사이트’들이 인터넷 검열을 피하려
는 사람들에게 ‘위장 IP’를 제공해주고 있다.
IP 세탁을 해주는 사이트들로서는 세이프웹(www.safeweb.com), 어노너
마이저(www.anonimyzer.com), 사일런트서프(www.silentsurf.com),
클록(www.the-cloak.com) 같은 곳들이 있다. 이들 사이트는 ‘자유
웹’, ‘익명 만들기’, ‘소리소문 없는 서핑’, ‘가면’ 등 사이트 이
름이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인터넷 이용자들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서비
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IP 세탁 사이트들이 채택하고 있는 기법은 간단하다. 서비스 이용자
들과 이들 IP 세탁 사이트간의 ‘교신’을 암호화해 제3자가 그 내용을 추
적할 수 없게 한다. 이용자들의 웹 서핑은 이들 IP 세탁 사이트의 서버 IP
를 통해 접속하게 되기 때문이 이들 이용자들이 접속한 사이트에서의 IP
역추적도 불가능하다. 접속자의 IP를 추적해 본들 나오는 것은 이들 IP 세
탁 사이트 서버일 뿐이다.
2000년 4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세이프웹은 이메일과 입소문을 통해 전세계
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IP 세탁 사이트로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당국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관문 서버(gate server)’를
통해 사우디 사람들의 인터넷 이용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사우디 당국
과 세이프웹이 서로 막고 뚫는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다.
사우디에서는 포르노 사이트를 비롯해 왕족이나 이슬람 문화에 반하는 사이
트는 물론 야후의 채팅 서비스나 인터넷 폰 서비스도 이용할 수 없다. 의
대생이라고 할지라도 해부학과 관련한 사이트 접속 조차 금지돼 있을 정도
다. 이들 사우디인들에게 세이프웹은 ‘금지된 영역’으로의 여행을 가능
하게 해주는 ‘위장 여권 발급소’와도 같다. 이메일과 입소문을 통해 세
이프웹이 알려지면서 세이프웹 열람 건수가 매일 수만 건을 넘어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사우디 당국이 이를 눈치 챈 것은 사우디 인들이 세이프웹을 이용하기 시작
한 지 수주 후. 당국의 감시와 규제를 피해 국민들이 ‘외도’를 즐기고
있는 것을 알아 챈 사우디 당국은 즉각 세이프웹 접속을 차단시켜 버렸
다.
금단의 열매를 맛본 사우디인들은 세이프웹에 긴급 구조신청을 타전했고 세
이프웹은 ‘트라이앵글 보이’라는 새로운 ‘복수 IP여권’을 이들 사우디
인들에게 공수했다. 트라이앵글 보이는 냅스터의 음악 파일 공유 방식과
유사한 P2P(Peer to Peer) 방식으로 이용자들간에 IP를 공유하도록 하
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다운 받은 사람들은 서로 IP를 공유하게 되고 사
우디인들처럼 당국의 규제를 받는 나라의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의 IP
로 웹 서핑을 할 수 있다.
사우디 당국은 세이프웹이 트라이앵글을 공수하자 트라이앵글 프로그램을
깐 컴퓨터가 발견되는 대로 이 컴퓨터와의 접속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맞서
고 있다. 사우디 당국의 이 같은 차단 노력은 원시적이긴 하지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인권’과 ‘알권리’ ‘자유로운 인터넷’을 기치
로 한 세이프웹의 무료 서비스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우디 당
국의 차단 노력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의문이
다.
세이프웹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규제하려는 권위적인 국가
와 정부를 상대로 한 IP 세탁 및 공유 서비스가 자칫 국제 범죄조직 등
반 사회적이고 반 인권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범죄조
직이나 테러조직들이 이러한 IP 세탁 및 공유 서비스를 이용한 사실이 드
러날 경우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직면할 소지가 크다.
이와 함께 이들 서비스가 인터넷 이용자들의 세계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 규제에 나서는 각 국가들의 국제적 연대 움직
임 또한 만만치 않다. IP 세탁 및 공유 서비스 자체를 차단하고 있는 사우
디나 중국과 같은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영국, 오스트레일리
아, 그리고 유럽연합 등에서도 포르노 등 콘텐츠 내용 및 ‘불법행위’나
‘반사회적 행위’를 문제삼아 일부 사이트를 차단하고, 인터넷 서비스 제
공업자의 IP 추적 및 관련 정보 제공을 의무화하거나, 수사 당국이 열람
할 수 있도록 관련 법제를 정비하는 데 공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렇게 될 경우 이들 나라에서도 IP 세탁 및 공유는 법률적으로 제한될 개연
성이 적지 않다.
‘자유’와 ‘규제’라는 해묵은 갈등이 인터넷 세계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도 주목되는 일이지만, IP 추적 때문에 내부 고발이나 제보에 망설이는 사
람들이 있다면, 혹은 익명 IP 여권으로 인터넷 여행에 자유로움을 만끽해
보고자 한다면 한번쯤 이들 사이트를 둘러볼 만 하다.
/백병규 미디어오늘 전 편집국장, inews24 객원기자href="mailto:bkb21@hananet.net">bkb21@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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