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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복] 벤처 경영 - 그 외로움에 관하여


 

한 벤처기업의 CEO를 맡고 있는 L사장은 요즘 술이 부쩍 늘었습니다. 전 직장 시절에는 주위 사람들과 어울릴 때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 아니냐”는 힐난도 들었던 L사장은 요즘 ‘술고래 대열’에 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두주불사를 합니다.

그는 원래 냉철하게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자리에 가더라도 좀처럼 흥을 돋구는 법도 없고 자신의 주량 껏 마신 뒤 딱 끊는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헌데 요즘에는 흡사 술에 걸신이 들린 사람 마냥 마셔댑니다. 그렇다고 추태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차분한 성격은 여전합니다.

얼마 전에 L사장은 집 근처의 카페 한 곳을 발굴했습니다. 전문직 종사자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술 한잔 하기 위해 들르는 스타일의 조용한 카페입니다. L사장은 이따금 퇴근을 하다가 이 집을 찾아, 맡겨놓은 술을 시켜 몇 잔을 마십니다. 어떤 날은 사업관계로 술을 마신 뒤에도 홀로 카페에 갑니다.

저는 이분이 어떤 이유로 술고래가 되었는지 직접 여쭈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설혹 여쭈어 보더라도 본인 스스로 그 해답을 알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명확한 것은 L사장의 술이 늘었고 무엇인가가 이 분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 분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내일의 일을 생각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 사업에 대해 고민도 해보는 그런 여유 말입니다.

저도 L사장과 함께 그 카페에 간 적이 있습니다. 홀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더군요. 아는 척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좀처럼 합류를 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이 벤처 언저리에 계시는 분들이더군요.

L사장 생각을 하다가 주위의 많은 분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많은 분들이 벤처 열풍을 타고 서울 강남지역에 경영자로서의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제조업 벤처부터 대형 지주회사, e비즈니스 컨설팅, 전자상거래, 인터넷신문 등등 경영을 맡은 업종도 다르고 하는 일도 제 각각 입니다.

한 분은 ‘옛날 계급장(전직에서는 꽤 권세를 누렸던 분이지요)’을 과감하게 떼고 장사꾼으로 돌변하는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꽤 큰 규모의 벤처기업 경영을 맡았지만, 고객사의 새파란 대리에게도 90도 각도의 절을 합니다. 만나주려 하지 않는 기업 간부를 설득하기 위해 늦은 밤에 집으로 찾아가 두세시간 기다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출신성분 지상주의가 아직도 대세인, 그리하여 신라시대의 성골-진골-육두품 따위가 명칭만 바뀌어 횡행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40대로서는 파격적인 변신을 한 셈입니다.

제가 여쭈어 보았습니다. “손에 물도 묻히지 않던 분이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가 있나요? 본전 생각은 안 납니까?” 그랬더니 이 분의 답변은 간결했습니다. “장사가 내 체질에 맞는 것 같아. 여기저기 굽신거려도 나 자신에게만 떳떳하면 되지. 뭘 또 바라겠나?”

또 한 분은 벤처기업 경영자로 변신하면서 ‘악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이 분의 주 업무입니다. 전 경영진이 마구잡이로 벌여 놓은 일을 뒷처리 하면서 자회사를 쪼개 팔고, 부적절한 인물들을 회사 밖으로 보내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구조조정이 끝났는지, 침체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사업을 함께 시작한 파트너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처음 강호로 출도(벤처 창업)할 때, 이 곳 실정에 밝은 전문가를 초빙한다는 것이 ‘꾼’을 만난 것이지요. ‘꾼 파트너’ 때문에 가는 곳마다 걸림돌이 산재해 있습니다. ‘꾼 파트너’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남발하는 통에 뒷처리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꾼과 결별하기 위한 단계적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각자 하고 있는 일이나 처한 상황은 이처럼 다릅니다. 사업이 그런대로 잘 굴러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이 있고, 사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기를 쓰지만 복병을 만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좀처럼 풀리는 일이 없어 고민을 하지만 별다른 묘책이 떠오르지 않아 허송세월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 벤처 경영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더군요.

술 실력이 엄청 늘었다는 점입니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이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는 만큼, 술자리가 많아져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회식 참석에 접대까지 하다 보면 하루하루가 술자리의 연속입니다. 이러니 당연히 술 실력이 늘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이 분들의 알코올 의존 성향을 살펴볼 때, 싫은 술을 불가피하게 마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약속이 없는 날이면 밤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주위의 선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술자리를 만듭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매일 이런 일과를 되풀이 합니다.

얼마 전 지주회사 성격의 대형 벤처회사에서 경영을 맡고 있는 분의 사무실에 점심을 얻어 먹으러 갔다가 크게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시느라 고생을 했다며 해장술을 시작했는데, 도무지 끝이 나지 않더군요. 대낮에 그토록 소주를 마셔보기는 근래 처음인 것 같습니다.

물론 혼자 있을 때는 책이나 자료도 보고 자기계발의 시간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좀처럼 홀로의 시간을 가지려 하지 않아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홀로 남겨진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은 있을지언정, 끊임없이 약속을 만들고 그 속에서 부대낌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요. 아니면 술 마시고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일까요. 항상 쓸데 없는 일에 관심이 많은 제가 한동안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분께서도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외로워서 그럴 것이라고…

기업을, 그것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벤처를 경영한다는 것이 그만큼 고독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일이 잘 풀려서 몇 달간은 먹고 살 수 있는 계약이 터져도 ‘그 다음에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불안합니다. 세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 두렵기도 합니다.

듬직한 임직원들과 좋은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변화를 모색하지만 뿌듯한 것은 그 때 뿐입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허전함과 외로움, 책임감이 경영자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희열은 잠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뭉치는 것을 좋아합니다.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농담이라도 하면 끝이 없는 불안감을 잊을 수 있습니다. 잠시라도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술과 술자리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요즘 한창 잘 나간다는 몇몇 젊은 벤처기업 경영자들은 몇 년 전부터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는 대표주자들입니다. 어려운 때 힘겨운 시절을 함께 지냈답니다. IMF 시절, 가진 것이라고는 잔돈 밖에 없을 때 호주머니를 털어 가겟집 앞에서 소주 몇 병으로 술판을 벌이던 그 때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 멤버 중의 한 분을 만났을 때 여쭈어 보았습니다. “당시에는 각자 먹고 살기도 힘 들었을 텐데, 뭣하러 그렇게 자주 모여 술을 드셨나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나라 살림이 거덜 났다고 하는데 우리도 언제 망할지 모르니, 가시방석이더라구요. 직원들 월급도 못 줘서 아버지 집 담보로 잡혀서 은행돈 빌려다가 주고 그랬어요. 사업하는 다른 애들은 어떤가 궁금하기도 하고, 쟤들도 버티는데 우리라고 망할소냐 하면서 술 마시다 보니까 벤처 열풍이 일어나데요?”

그 분은 농담처럼 흘리듯 이야기했지만, 저는 그의 눈가를 언뜻 스쳐 지나가는 그 당시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한없이 막연하며 아무런 보장도 없는 미래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는 것이.

경영자들이 자주 뭉치는 데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하는 열망 또한 감춰져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정보습득에서부터 앞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모임에서 좋은 아이템이 나오기라도 하면 공동으로 사업화를 모색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서울 강남지역에는 ‘확신범’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사업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긴 확신이 없었다면 벤처사업을 꾸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확신범’들도 술자리 모임을 만드는데 적극적입니다. 술자리에 나가 회사 자랑을 합니다. 얘기를 듣다 보면 그 회사가 조만간 떼돈을 벌 것 같습니다. 사업도 잘 풀리고 신규 사업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습니다.

그러나 호화로운 실적과 비전의 뒷켠에는 경영자의 불안한 앞날이 동전의 뒷면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겁이 나기 때문에, 스스로의 확신에 힘을 보태기 위해, 그래서 자신을 담금질해 ‘억지 희망’이라도 만들어 보기 위해 다른 경영자들에게 회사 자랑을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규사업에 대한 검증이라도 받아보고 싶은 심정에서 일겁니다.

결국 확신범 경영인들이 더욱 외롭습니다.

“머나먼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임직원이 있는데, 뭐가 외롭다는 말이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매달 이익을 내고 사장님도 저렇게 당당한데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질 만 합니다.

후배들과 사업을 하는 친구 녀석을 만났더니 고민에 빠져 있더군요. “온라인 사업이 힘들어 오프라인 영업을 강화하려고 했더니, 아무도 거들지 않아 영업맨은 나 혼자 뿐”이랍니다.

직원들 생각으로는 “나는 기획(또는 개발)하러 들어왔지 영업하러 온 것이 아니다”는 것이지요. 친구는 “죄다 기획자나 개발자가 되려고 할 뿐 막상 돈이 되는 영업을 할 사람이 없다”고 푸념을 합니다. 후배들과 하는 사업이 이 정도라면 사회에서 만나 계약관계로 맺어지는 조직은 굳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각자의 취향과 소질이 있습니다. 구성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조직이 제대로 된 회사입니다. 따라서 그 회사 직원들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옳습니다. 각자가 본연의 업무만 잘 처리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조금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논리도 가능합니다. 벤처 조직이라는게 몇 명 되지도 않는데, 여기서 각자가 맡은 일만 하고 만다면 어떻게 회사가 발전하겠습니까. 대기업에서 열명 스무명이 하던 일을 한 명이 도맡아도 잘 될 것이라는 기약조차 없는게 이쪽 동네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경영자와 직원들간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입장의 차이가 뚜렷하게 있습니다. 다수인 직원들은 무능한 CEO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팔자 탓을 할 수 있습니다.

경영자 역시 ‘지지리도 말을 듣지 않는 직원들’을 도마 위에 올려 놓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혼자인 그는 항상 허전합니다. 회사가 잘못 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가정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칩니다. 몇몇 CEO가 향락에 빠져 탐닉을 하다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도 이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수단을 잘못 택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저희가 절친하게 지내는 한 벤처기업이 있습니다. 이 회사의 재무담당 이사(CFO)를 만나 뵈면 서글퍼질 때가 있습니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성골 코스’를 밟다가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벤처로 왔는데, 막상 현실은 너무도 달라 이따금씩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술을 드신 나머지 건강이 많이 상했습니다. 몸이 약해지다 보니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부릅니다. 인사불성이 됩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벤처기업이지만 경영의 외로움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은 아직 넉넉치 않아 보입니다.

벤처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 외로움은 숙명과도 같은 모양입니다. 많은 경영자들이 “나는 외롭지 않다”고 강변하지만 그러다 뒤 돌아서면 외로움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알코올에 몰입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씩이라도 여러분 회사 CEO의 뒷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한상복(㈜비즈하이 파트너, 전 서울경제신문 기자) closest@bizhig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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