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뉴스24 이정일 기자] 한때 판교는 낭만의 상징이었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 자유로운 근무 환경, 풍요로운 복지와 보상. 그리하여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렸다. 위계보다는 소통을, 규칙보다는 자율을 추구하는 곳. 판교는 혁신의 아이콘이었고 IT(정보기술) 요람이자 자긍심이었다.
국가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조성된 판교테크노밸리에 주요 IT 기업들이 입주한 것은 2010년 무렵. 네이버는 2010년 3월 그린팩토리 사옥을 올렸다. 2년 뒤 카카오에 이어 넥슨, 엔씨, 스마일게이트, NHN 등이 합류했다.
이미 이때부터 판교는 남달랐다. 직장 내 서열을 보여주는 칸막이 책상도, 월급쟁이의 근면함을 상징하는 검은 정장도 거부했다. 셔츠나 후드티의 출퇴근길 행렬은 탈권위적인 판교 문화를 대변했다. 사옥마다 고급 카페가 들어섰고 구내식당과 휴게실, 체육관 등도 마련됐다. 휴가는 당연한 권리였고, 몇 주에서 몇 개월의 리프레시 휴가도 주어졌다.
호칭은 또 어찌나 판교스러운지. 카카오는 김범수 창업자를 '브라이언(Brian)'이라 불렀고, 네이버도 사석에선 ‘이해진 선배’라고 칭했다. 직급을 떠나 서로가 선후배이자 동료였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낭만적인 판교였다.
카카오 노조가 10일 ‘4시간 부분 파업’을 예고하면서 판교가 격랑에 휩싸였다. 판교 파업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8년 네이버 노조(공동성명)와 카카오 노조(크루유니온)가 출범한 이후, 2019년 네이버 노조의 첫 판교 파업을 시작으로 네오플, 한컴, 엔씨 노조가 줄줄이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이번 카카오 파업은 훨씬 더 치명적이다.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이 사정권이어서 국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카오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구조조정 중단이고, 둘째는 직원들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다. 사측은 사측대로 할 말이 많다. 노조 요구가 “회사 경영에 큰 부담이 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극적 화해 없이 노조가 파업을 강행하면 카카오 창립 이후 첫 파업이라는 씁쓸한 기록이 남게 된다.
카카오 노조는 4시간 부분 파업에 대해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연결된 카카오톡을 비롯한 여러 서비스의 중단이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업 때문에 카톡 장애가 발생할 가능성을 노조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추후 교섭 상황에 따라 파업 수위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경고했다. 이것이 노조 집행부의 협상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을 볼모로 삼는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카카오 노조의 대외적인 명칭은 ‘크루유니온(Krew union)’이다. 카카오에서는 모든 임직원이 크루다. 수직적인 상하 관계를 탈피하고 수평적인 소통과 공동의 목표를 지향한다는 의미의 크루. 그런데 지금 카카오는 소통이 멈췄고 공동의 목표도 사라졌다. 크루 대 크루의 대립으로 내홍만 깊어졌다.
노사간 이견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가느냐가 중요하다. 대화인가, 투쟁인가. 이쪽이 아닌 저쪽은 ‘적’인가. 예전보다 각박해졌지만 그래도 판교는 판교다. 여전히 창의적이고 혁신적이며, 조금은 덜 권위적이고 조금은 더 수평적이다. 이런 판교의 유산을 이어가는 책무는 노조도 예외일 수 없다. 성난 거리, 판교. 카카오 노조에게는 정녕 이 길 뿐인가.
/이정일 기자(ja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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