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한얼 기자]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 GS칼텍스, HD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가 중동 사태에 따른 유가 급등 효과로 올해 1분기에 일제히 역대급 실적을 거뒀다. 다만 업계는 이번 호실적을 적극 부각하기보다는 '래깅효과'와 '재고 관련 이익'에 따른 일시적 성과라는 점을 강조하며 몸을 낮추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정유사업 자회사 SK에너지는 1분기에 매출 11조 9790억원, 영업이익 1조 2830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1409% 증가했다. 에쓰오일도 매출 8조 9427억원, 영업이익 1조2311억원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했다. GS칼텍스의 영업이익은 1조 6367억원으로 1310% 증가했고, HD현대오일뱅크는 영업이익 9335억원으로 2902%나 늘어난 역대급 호실적을 거뒀다.
실적의 드라마틱한 개선에도 정유업계는 잔뜩 몸을 낮췄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13일 실적 발표 자료에서 "유가 상승에 따른 래깅효과 반영 및 재고 관련 이익 증가 영향으로 정유사업을 영위하는 SK에너지의 영업이익이 전분기 대비 대폭 증가했다"면서도 "다만 래깅효과 및 재고 관련 이익은 회계 장부상 숫자로, 향후 유가 하락 시 줄어들거나 소멸될 수 있는 일시적 이익"이라고 설명했다.
GS도 "연결실적은 중동사태에 따른 일시적 재고효과로 전년대비 증가했지만, 정유부문은 석유 최고가격제의 영향으로 재고효과를 제외하면 정제마진 이익은 전분기대비 감소했다"며 호실적이라는 데 선을 그었다.
정유업계에 래깅효과와 재고 관련 이익은 익숙한 개념이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불거질 때마다 국제유가가 요동치고 정유사의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이 일제히 상승한다. 이를 통해 리스크 이전 싼 가격에 구입했던 원유가 시차를 두고 원가에 반영되면서 큰 이익을 거두게 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후였던 지난 2022년 1분기 실적에서도 이같은 래깅효과와 재고 관련 이익에 따라 정유사들은 견조한 수익성을 기록했는데 당시 SK이노베이션은 실적 발표에서 "일시적이지만 드라마틱한 반등"이라고 자평하며 실적 개선을 적극 부각한 바 있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 같은 온도 차의 배경으로 정부의 석유 최고가격제에 따른 손실보전 논의를 꼽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월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유류 가격에 상한을 두는 최고가격제를 시행했고, 현재까지 누적 손실 규모가 3조~4조원에 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는 추가경정을 통해 4조 2000억원 규모 예비비를 편성했지만 최고가격제 시행 장기화 시 손실 보전 재원 부족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제는 손실액 산정 기준을 둘러싼 정부와 업계 간 시각차다. 정부는 생산원가 기준 보전을 검토하는 반면, 정유업계는 국제 시세인 싱가포르 석유제품 가격 기준(MOPS)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정유사들이 대규모 흑자를 강조할 경우 손실 보전 필요성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손실보전을 위한 최고가격 정산위원회가 1분기 실적 발표가 마무리 된 후인 이달 말 정도에 출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정유사들의 손실보전에 대한 당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1분기 역대급 실적을 근거로 일종의 고통분담을 요청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제기되는 상황이다.
여기에 최근 사정당국이 담합 혐의로 정유업계를 압수수색 한 데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정유사·주유소 간 불공정 관행 개선 논의까지 겹치면서 업계는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이와 함께 고유가로 국민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정유사만 폭리를 취한다는 여론도 일정 부분 형성되면서 정유업계로서는 실적 호황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정유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은 업계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훨씬 민감한 상황"이라며 "손실보전 논의와 각종 제도 개선 이슈가 동시에 진행되는 만큼 대외 메시지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한얼 기자(eol@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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