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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기의 문화인사이트]노산군은 왜 사후 241년이나 지나서야 단종대왕으로 복위됐을까


[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요즘 가장 ‘핫’한 역사적 인물은 단종(이홍위)이다.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淸泠浦)와 그가 묻혀있는 장릉(莊陵)을 방문하는 사람들로 만원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대박 때문이다. 청령포가 위치한 서강의 끝자락에서 유유히 흐르고 있는 물결만 봐도 눈물이 날 뻔하다.

단종표준영정 [사진=문화부]

단종은 8살 때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년만에 할아버지인 세종이 승하한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종도 2년만에 승하한다.

이 때문에 12살에 조선 6대 국왕이 된 단종은 대신들과 집현전 학자들이 보좌해서 정치력을 키워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단종이 왕에 오른 지 1년만인 1453년 10월, 단종을 보좌해줄 김종서와 황보인이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됐다. 계유정란이다.

단종이 즉위 3년 2개월째 되던 1455년 8월 3일 수양은 조카인 단종을 상왕에 올리고 자신이 조선 7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형식은 단종이 숙부인 수양에게 왕위를 선위하는 것이었다.

상왕이 된 단종은 불과 15살. 경복궁이 아닌 ‘창살 없는 감옥’ 수강궁(창경궁의 옛 이름)에서 생활한다. 아무런 힘도 없는 상왕임에도, 여기서 채 2년을 넘기지 못하고, 1457년 6월 21일 영월로의 유배령이 떨어졌다. 22일 궁을 출발해 엿새가 걸려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그해 여름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불자 청령포에 온 지 두달 후 처소를 영월읍내 관풍헌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해 10월 유배된 지 넉달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엄청난 속전속결이다.

단종은 영월에 유배되면서 노산군으로 강봉(벼술이나 지위가 낮아짐)됐다. 그해 9월 경상도 순흥부(현 경북 영주시)에 유배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계획 발각으로 단종은 다시 서인(庶人, 평민)으로 강봉됐다. 단종은 왕세손, 세자, 왕, 상왕을 거쳐 폐서인됐다.

노산군(魯山君)이라는 이름에서는 귀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하다. 한때 조선의 최고 통치자에게 ‘군’을 붙이는 것도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그런 노산군은 숙종 24년인 1698년에 와서야 단종(대왕)으로 복귀된다. 단종이 죽은 지 241년이 걸렸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관광객들로 만원인 영월 청령포 일대 [사진=연합뉴스]

세조 이후의 왕들이 단종 후예가 아닌 수양대군(세조)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단종의 명예가 회복되는 일, 즉 단종을 복원하는 것은 자신의 직계 할아버지를 부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단종 복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충신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잠깐 나왔을 뿐이다. 선조때 판서 박계현이 선조에게 “성삼문은 참으로 충신입니다”고 말했다가 뼈도 못 추릴 뻔했다.

단종 복원은 숙종 때의 정세에도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본다. 이 점은 3일 방송된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20회 “단종과 수양 2부- 단종, 죽은 왕을 위한 파반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뤄졌다. 숙종은 사육신을 복권하고 단종을 복위한다. 이후 영조와 정조도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명예 회복 조치를 이어 나간다. 이때 단종과 부인인 정순왕후는 위패가 만들어졌고, 지금도 서울 종로구 종묘 영녕전에 신주가 모셔져 있다.

조선 정치사는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왕권 확립과정에서 왕자의 난, 계유정란, 반정을 거칠 때마다 공을 세운 훈구 세력들이 대거 요직을 차지했다. 이들을 의식해야 하는 왕은 점점 골치가 아파지자 훈구 세력 대신 성리학과 도덕 공부를 열심히 한 사림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성종대에 사림들은 중앙 정계에 본격 진출했다. 하지만 사림들도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력들이 나눠져 대립했다.

그러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 한 쪽 세력(파벌)이 반대파에게 몰려 큰 화를 입는 사화(士禍, 선비들이 화를 입는 것)가 자주 발생한다. 무오사화등 4대 사화는 연산군~명종대에 발생했다.

숙종대에 이르면, 왕이 한 파벌의 손을 계속 들어줄 수는 없었다.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세력 다툼 속에서 적절하게 한쪽 손을 들어주며 권력의 균형을 취해 왕권을 강화한 왕이 숙종이다. 심지어 남인과 서인 세력의 향방에 따라 인현왕후와, 후궁에서 왕비가 된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하기도 했다.

숙종은 어릴 때부터 권력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했다. 12살에 즉위했는데도 수렴청정 한 번 없이 친정부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도 머지않아 자연사할 ‘노론의 거두’ 송시열을 82세 나이에 사약을 먹게 한 사람도 숙종이다. 이 때 숙종의 나이는 28세였다. 그것도 송시열은 제주에서 귀향 생활중이었고, 한양에 올라와 국문을 받아야 하는데, 걸어서 올라오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들었다. 송시열의 연고지가 아닌 전북 정읍시 수성동에 송우암수명유허비(宋尤庵 受命 遺墟碑)가 있는 이유다. 역모를 일으킨 것도 아닌 사람을 이렇게까지 해서 재판도 열지 않고 처단부터 하는 것은 왕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대립하는 세력들을 적절히 이용하려다 보니 숙종때는 유독 환국(換局)이 많았다. 환국은 ‘정국 전환’이다. 환국이 되면 의정부 3정승, 6부의 참판이 모두 다 바뀐다.

숙종은 28살이 되어서야 아들을 얻었다. 숙종은 정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죽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에게는 아이가 없고, 역관 집안의 자식으로 후궁인 장희빈에게서 아들 윤(훗날 경종)을 얻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숙종은 윤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고 원자에 정호하려 했지만, 서인들, 특히 노론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노론의 영수로 당시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인 송시열은 태어난 지 두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건 너무 이르거니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분노한 숙종은 원자 정호 반대파들의 관직을 삭탈하고 송시열과 ‘안동김씨의 실질적 시작’인 김수항을 사사했다. 서인들은 대다수가 실각하고, 남인들은 대거 기용됐다. 여기까지가 1689년의 ‘기사환국’이다.

장릉 [사진=문화부]

숙종은 이런 환국정치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세력의 몰락과 한 세력의 득세를 보면서 군신의 의리와 충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단종을 끝까지 지킨 사육신과 생육신이 충신이었다며 이들에게 포상을 명령했고, 숙종 17년에는 사육신의 작위를 복구하라고 왕명을 내렸다. 이를 통해 당시 붕당 세력에게도 경계하는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숙종의 아들인 영조도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으로 인해 왕권 약화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며 탕평책을 실시하게 된다. 영조는 “선왕(단종)이 계셨던 옛터를 찾아내거라”라며 단종 유배지의 집터를 찾게 했고, 1726년(영조 2년) 청령포 주변에 금표비를 세워 일반 백성들이 다른 시설을 못짓게 했다.

영조의 손자로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계승한 정조는 아예 사육신 중 한 명으로 유일하게 자손이 있는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정을 영월부사로 보내 단종의 자취, 충신,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 그림으로 정리한 화첩인 월중도를 제작하게 했다. 정조 15년(1791)에는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제단인 3단계 배식단을 만들어, 단종 관련 3대 사건으로 죽은 268명을 모셔놓고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의 긴 호흡을 통해서 보면 승자냐, 패자냐가 그리 간단치 않다. 당대에는 세조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임에도 지금 승자는 세조가 아니라 단종이다. 이는 정치가들이 역사를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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