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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기 문화인사이트]강화도조약 체결 150주년 맞은 인천에서의 의미 있는 특강


[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이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朝日修好條規) 체결 150주년을 맞아 지난 4월 3일부터 17일까지 특강 ‘강화도조약을 되돌아보는 세 가지 방법’을 완료했다.

이번 특강은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 80년을 맞이해 열고 있는 기획특별전시회‘인 ’강화도조약 150주년 기획특별전-인천, 세계의 바다에 뛰어들다’(4월 1일 ~ 5월 10일)와 연계해 마련됐다.

이번 특별전시회에는 강화도조약의 조선 측 전권대신 신헌(申櫶)이 쓴 조약 체결의 전말을 기록한 공무일기로 흩어져 있던 '심행일기(沁行日記)' 상권과 하권을 함께 공개했다는 등의 의미가 있지만 대다수 전시 내용들은 개론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반면, 기획특별전 연계 특강들은 시의적절했고 유익한 내용들이 많아서인지, 진지하게 강의를 듣는 사람들로 붐볐다.

특강은 총 3회로 구성됐다. 1강인 박훈 서울대 교수는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관계를 중심으로 조약 체결 배경을 설명하는 ‘격변의 시대, 메이지유신과 조선’을 강의했다.

서울대 박훈 교수 [사진=서병기]

박훈 교수는 “일본을 욕하는데 아는 사람은 별로 없더라. 우리가 선진국이 되고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상대를 비판해도 알아야 한다. 욕하는 건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밀려오며 영향력을 확대해나가자 중국과 일본, 조선의 대응법은 각각 달랐다.

중국(청)은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젊은 관료를 기용해 양무운동을 전개, 군수공장 건설, 북양함대 제조, 근대기업 설립 등 상당한 성과를 보았으나, 서태후의 실정과 예산낭비 등으로 한계를 보였다.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1864년 집권해, 전제왕권강화와 서원철폐 등 내정 개혁은 과감했지만, 영남의 위정척사파를 기반으로 해야하는 정치기반 약화에 직면했고, 서양문물 도입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썼다.

반면, 일본은 1853년 미국 동인도함대 페리제독이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자, 결국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1854년)을 체결하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켜 신정부를 세웠다.

박훈 교수는 “외부에서 충격이 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페리 제독이 일본에 와 개항하라고 한 시점이 일본의 모더나이제이션의 시작(1854년)이며 강화도 조약보다 22년 빨랐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은 당시 시대의 핵심을 파악했다. 육군이 아닌 해군 육성, 농업이 아닌 무역 신장, 석재나 목재가 아닌 제철의 중요성을 쨉싸게 파악했다”고 3대 개혁 드라이브 정책을 설명한 뒤 “나가사키 해군학교를 개항 1년후 만들고, 하코다데 운상회소(運上會所 무역회사), 나라야마와 쓰키지, 하기의 반사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 터가 지금도 남아있다”고 했다.

메이지 유신 3걸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는 군함건조의 주역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반대를 무릅쓰고 철도건설에 집착했다. 그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많은 철도를 건설했다. 그 행동대장격이 제일국립은행 초대 총재를 역임한 기업가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다. 시부사와는 새로 바뀐 1만엔 지폐의 모델이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기업인도 지폐의 얼굴이 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야기된 큰 갈등 중 하나는 사무라이 처리문제였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사무라이 편이었다. 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의 죽마고우인 오쿠보 도시미치가 주도하는 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 신분을 해체하고 칼 차기 금지, 가산박탈, 평민 징병제 실시 뿐만 아니라 다이묘와 사무라이 자금을 산업에 투자함으로써 사무라이들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혔다.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메이지 정부에서 이탈, 사무라이 2만명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인 사쓰마번(가고시마현)으로 돌아가 최대의 사무라이 반란(세이난 전쟁 西南戦争))에서 패해 사망한다.

1870년대 반정부 사무라이들은 정한론의 소굴이었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이기도 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내가 혼자 조선에 가겠다. 조선인들이 날 죽이면 그것을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하라"고 했다.

게다가 대원군 정권 시절 메이저 정권은 황제국임을 표방한 외교문서인 서계(書契)를 조선에 보내 국교를 제안하며 외교관계에 변화를 주고자 했지만 조선은 이를 계속 거부했다. 이에 일본 정계에서는 기도 다카요시 등이 정한론을 주창하며 조선을 공격함으로써 일본의 국위를 떨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실권은 외무경을 역임하고, 서양 문물과 제도를 조사하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이끈 아와쿠라 도모미와 이토 히로부미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반정한파 오쿠보 도치미치 정권에게 넘어갔다.

박훈 교수는 “당시 일본도 한덩어리가 아니었다. 강화도 조약은 반정한파의 작품으로, 일본 내 정한파와 반정한파의 권력 투쟁 가운데 급하게 체결된 것이다”면서 “우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유리한 측이 누군지 파악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오쿠보 정권은 정한론을 잠재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교를 추진했다”면서 “심지어 청나라의 이홍장도 조선에다 일본과 수교하라고 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에 이은 강화도 조약은 1876년(고종 13년) 2월 27일 경기도 강화유수부 연무당에서 체결됐다. 조선은 판중추부사 신헌이 접견 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이 부관으로, 일본은 육군 중장 구로다 기요타카가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가 부전권 변리 대신으로 참가했다.

일본은 이후 구로다가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일본 제2대 총리대신이 되고, 이노우에 가오루도 이토 내각에서 외무대신과 내무대신, 조선공사를 역임하는 등 강화도조약파들이 승승장구했다.

특히 강화도 조약의 실무를 담당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 히로부미보다 5살이 많지만 이토의 친구이자 오른팔이다. 그는 영국 런던대학에 이토와 함께 유학을 갔다왔으며, 해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한 현실파였다.

강화도 조약은 전문 12개조로 돼 있다. 일본의 치외법권, 조차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긴 하지만 신헌은 구로다와 이노우에의 지나친 요구에 논리적인 대응으로 기를 꺾어놓았다. 조선의 요구도 상당히 관철시켰다. 신헌의 조약체결 결과를 보고받은 고종은 “문답한 장계를 보니 실로 잘 응수하였다”고 했고, 오쿠보도 “뜻밖의 운(運)”이라고 했다. 서로 협상을 잘했다는 식이다.

조약만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은 수호조규 부록과 통상장정을 동시에 조인케 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경제 침략 기반을 공고히 했고, 우리는 국내 산업 보호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통상 장정에 양곡의 (일본으로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식량(녹미)이 모자라 6년 후인 1882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국가간 외교조약을 처음 작성해봤지만, 일본은 구로후네(흑선)를 끌고가 일본을 강제개항시킨 미국의 페리 제독이 요구했던 '모범답안'이 있었다.

박훈 교수는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국제무대로 힘차게 내닫는 제일보였다. 좌절과 성공으로 점철된 한국 개방의 역사는 인천(강화도조약)에서 비롯됐다. 좀 더 과감하게 빨리 체결했어야 했다. 메이지 유신후 8년간이나 미룰 이유가 없었다. 일본의 야심을 제어하면서 일본 지원을 확득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조선성(省)을 설치해 직접 지배하려 했고, 이홍장은 직접 지배하면 뒷탈이 생기니 간접지배해야 한다고 했다.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조선개혁에 나선 개화파 김옥균은 흥분해서 자멸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훈 교수는 마지막으로 “단결(컨센서스)이 중요하다. 우리는 문화, 기술, 교육, 법치, 시장은 잘한다. 그러나 정치 리더쉽이 안나온다”면서 “난세에는 유능하고 효율적이며 존경받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물론 유권자가 이런 리더를 만든다. 전략적인 사고를 하며 난세를 헤쳐나가는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서병기 기자(wp@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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