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산업이 글로벌 시장 점유율 1~2%대 정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산 칩 채택을 늘릴 수 있는 제도적 기반과 수요기업 중심의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왔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 회장은 지난 13일 아이뉴스24와 인터뷰에서 "임기 동안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할 과제는 시스템반도체 시장 점유율 3%의 벽을 깨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정부 내 시스템반도체 정책을 전담할 '과(課) 단위 조직 신설'을 이끌어내 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하고, 팹리스-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수요기업으로 이어지는 상생 생태계를 안착시키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김경호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 [사진= 한국팹리스산업협회]](https://image.inews24.com/v1/7d36985ff3d034.jpg)
김 회장은 삼성전자에서 시스템온칩(SoC) 설계를 총괄한 뒤 연세대 교수, 코아시아세미 대표, 어보브반도체 대표를 지낸 반도체 전문가다. 대기업과 학계, 중소 팹리스 현장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 지난달 한국팹리스산업협회 제3대 회장에 취임했다.
김 회장은 현재 국내 팹리스 산업을 '구조적 정체 단계'로 진단했다. 설계 기술력 자체는 세계 수준에 근접했지만, 이를 양산과 시장 확대로 연결할 성공 초기 적용 사례(레퍼런스)와 규모의 경제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글로벌 공룡들이 기술력과 자본으로 격차를 벌리는 동안 한국은 중소 팹리스 중심의 파편화된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려면 설계-파운드리-수요처로 이어지는 전주기 가치사슬을 국가 차원에서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산 칩 채택 늘려야 점유율 확대 가능"
김 회장은 한국 팹리스의 낮은 시장 점유율이 이어지는 가장 큰 이유로 '국산 칩 채택 기회 부족'을 꼽았다. 실제 제품에 탑재돼 검증된 이력이 없으면 글로벌 시장 진출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 수요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감수하며 국산 칩을 선택할 유인이 크지 않다"며 "국산 칩을 채택하는 기업에 세제 지원이나 보조금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해 정부가 초기 위험을 함께 분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산 칩 사용이 곧 양산 레퍼런스로 이어지고, 그 경험이 다시 팹리스 경쟁력으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은 "기획부터 검증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이 끊겨 있고, 인재가 대기업으로만 쏠리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며 "실무 인력이 부족해 성장이 정체되고, 성장 비전이 보이지 않으니 인재가 다시 외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과는 물량 아닌 고품질·맞춤형 전략으로 승부"
중국 팹리스 산업과의 경쟁 구도에 대해서는 양적 경쟁보다 질적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봤다.
김 회장은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과 물량 공세로 범용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만큼 한국은 저전력·고효율 설계 기술을 기반으로 기기내장형(온디바이스) AI와 엣지용 신경망처리장치(NPU)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자율주행과 로봇처럼 고신뢰성이 요구되는 분야, 그리고 중국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첨단 미세공정 기반 맞춤형 반도체(ASIC) 설계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수요기업과의 협력 구조를 만드는 것도 협회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김 회장은 "수요기업과 팹리스 사이를 잇는 기술 매칭 플랫폼을 구축하고, 수요 연계형 연구개발을 활성화해 초기 테스트와 공동 검증이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며 "대표적인 수요기업을 협회 특별회원으로 초청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생 쿼터제·MPW 확대가 단기 해법"
국내 파운드리와 팹리스 협력 강화를 위해서는 '상생 쿼터제(할당제)' 도입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국내 파운드리가 일정 비율의 공정 슬롯을 국내 팹리스에 우선 배정하도록 유도하고, 참여 기업에는 정부가 세제 혜택이나 인프라 비용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김 회장은 "국내 파운드리는 우리 팹리스의 생명선과 같다"며 "수급 불균형 상황에서도 국내 팹리스가 최소한의 회복 탄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40~90나노(㎚, 10억분의 1m) 공정 부족 문제와 관련해서는 나노종합기술원과 같은 공공 팹(공장)과 중소기업 전용 시제품 제작(MPW) 라인 확대를 단기 처방으로 제시했다.
그는 "정부의 MPW 지원 예산 증액은 필수불가결한 사항이며, 기업들이 적기에 설계 검증을 완료할 수 있도록 '공정 이용 바우처'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 실질적인 혜택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공공 팹 기반의 MPW와 민간 파운드리의 양산을 유연하게 잇는 상생협력 모델이 정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AI 스타트업, 결국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관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의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사업과 산업통상부의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사업에 대해서는 기술 개발을 넘어 상용화·시장 검증 중심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봤다.
김 회장은 "현재 정책 사업은 원천 기술력 확보와 설계 저변 확대에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도 "이제는 실제 기기에 칩을 탑재해 성능을 검증하는 실증 비용, 해외 인증, 현지화 지원까지 이어져야 글로벌 시장 진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리벨리온, 퓨리오사AI, 딥엑스 등 AI 반도체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기술력 자체보다 소프트웨어 생태계 완성과 실증 이력 확보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봤다.
그는 "개발자들이 엔비디아 제품처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스택과 소프트웨어 개발 키트(SDK)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며 "실제 데이터센터 등에서 사용 이력을 축적할 수 있는 대규모 실증 기회도 함께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설계 인재 확보와 관련해서는 주식매수선택권(스톡옵션) 제도 개편과 분야별 특화 교육 체계 도입을 주문했다.
김 회장은 "중소·중견 팹리스는 채용보다 이직 방지(리텐션)가 더 시급하다"며 "기업 성장의 과실이 구성원에게 돌아가는 보상 구조와 현장 수요에 맞는 특화 교육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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