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 기록은 어디까지 남을까? 1993년의 선언문이 지금의 학부모에게 던지는 경고
입시 준비로 분주한 자녀를 둔 학부모라면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 아이의 모든 기록은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남게 될까?"
학교생활기록부,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봉사활동, 그리고 아이가 무심코 올린 SNS 게시물까지. 우리 아이들이 생성하는 정보의 양은 부모 세대가 평생 남긴 흔적의 수십 배를 넘어선다. 문제는 이 방대한 기록들이 대학 입시에서 끝나지 않고, 취업과 사회생활 전반을 따라다니는 영원한 '디지털 문신'이 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93년 발표된 짧지만 강렬한 글 하나가 떠오른다. 수학자 에릭 휴즈가 쓴 '사이퍼펑크 선언문 (A Cypherpunk's Manifesto)' 이다. 30년 전 쓰인 이 글은 마치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을 예견한 듯하다.
'기록이 기본값'인 세상, 발가벗겨진 아이들
지금의 자녀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데이터가 축적되는 삶을 산다. 교육행정시스템에 저장되는 학습 데이터는 물론, 유튜브 시청 기록, 인스타그램의 교우 관계, 그리고 미래 경제 활동의 주축이 될 블록체인 상의 거래 내역까지. 이 모든 데이터는 단절되지 않고 연결된다.
우리가 아무리 아이를 보호하려 해도, 현대의 디지털 환경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실제로 기업의 AI 채용 시스템은 지원자의 이력서뿐 아니라 온라인 발자국과 행동 패턴까지 분석하려 든다.
블록체인 세계에서는 지갑 주소 하나만 알면 그 사람의 자산 규모, 소비 성향, 투자 패턴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숨 쉬듯 기록되는 환경, 삭제 버튼이 없는 세상. 부모로서 걱정이 앞서는 것은 당연하다.
프라이버시는 '비밀'이 아니라 '선택'이다
30년 전 사이퍼펑크 선언문은 이 문제의 해법을 정확히 꿰뚫었다. 선언문은 프라이버시를 단순히 무언가를 숨기는 '비밀주의 (Secrecy)'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나를 세상에 선택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힘 (the power to Selectively Reveal oneself)" 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AI와 블록체인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필수적인 생존 지침이다. 미래의 프라이버시 기술은 범죄를 감추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상황과 목적에 따라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골라서 제공하는 능력'이다. 대학에는 학업 역량을, 기업에는 직무 능력을, 금융기관에는 신용도만을 선택적으로 증명하고 나머지는 비공개할 수 있는 권리. 이것이 곧 미래의 디지털 경쟁력이다.
투명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산업
하지만 세상은 이 권리를 자동으로 쥐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개인의 데이터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거대한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데이터 분석 기업인 '체이널리시스 (Chainalysis)'는 지갑 정보를 기업, 금융기관, 정부 수사기관과 연결해 추적하는 기술로 10조 원 (86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치를 인정받았다. 투명성이 곧 돈이 되는 세상이다. 북한 해킹 자금 세탁에 쓰인 '토네이도 캐시' 사건에서 보듯, 공권력과 분석 기업은 마음만 먹으면 개인의 금융 내역을 끝까지 추적할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크립토 업계가 영지식 증명 (ZK), 다자간 연산 (MPC) 등 프라이버시 기술에 주목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는 단순한 '코인 기술'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디지털 전체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주체적인 '디지털 시민'으로 살아가게 할 방패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디지털 자기결정권'
혹자는 묻는다. "프라이버시 기술, 그거 범죄자들이나 쓰는 것 아니냐?" 이는 큰 오해다. 우리는 집에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생활을 보호받기 위해 커튼을 친다.
미래의 금융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소액 결제는 현금처럼 익명성을 보장받고, 고액이나 법적 이슈가 있는 거래는 조건부로 공개하는 방식이 표준이 될 것이다. 최근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 (BlackRock)의 래리 핑크 회장이 강조하는 '자산 토큰화 (RWA: Real World Asset)'의 미래 역시, 기관과 개인이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이 같은 '조건부 공개' 기술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할까?
첫째, '계정 분리' 습관을 길러주자. 입시용, 취미용, SNS용, 투자용 계정이 뒤섞이지 않도록 구분해 사용하는 것이 디지털 위생의 첫걸음이다. 둘째, '디지털 발자국의 무게'를 알려주자. 온라인상의 사소한 행동이 미래의 이력서가 될 수 있음을 인지시켜야 한다. 셋째, '선택적 공개'의 개념도 각인하자.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 솔직함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드러내는 것이 지혜이자 권리임을 가르쳐야 한다.
30년 전 선언문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진정한 엘리트는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아이' 일 것이다. 그 선택권을 쥐여주는 일, 그것이 당장의 입시 점수만큼 중요한 부모의 역할 아닐까.
김경규 세정 부사장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패션 기업인 세정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이커머스 및 AI 기반 패션 신사업인 세정글로벌을 설립하기도 했다. 블록체인 연계 신사업인 런투더퓨처랩스의 대표이사로 재직 중인 그는 블록체인 단체 '디사이퍼'의 리서쳐로도 활동 중이며 블록체인 영역에서 지속적인 VC 투자 조직 어드바이징 및 투자 집행 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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