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우리말 '비단길'은 비단처럼 편안한 길이 아니다. 1877년 독일 지리학자(리히트호펜)이 고대 중국과 로마의 가장 대표적인 교역품이 '비단'인 점을 착안하여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아름다운 명칭을 붙였다.
'도로'(Road)라기 보다는 오아시스, 사막, 산맥을 통과하는 '오솔길 흔적'이라는 표현이 맞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길은 없어진다. 폭서의 여름, 혹한의 겨울은 피해야 안전하다. 사막의 여름 한낮은 40도가 훨씬 넘고, 겨울은 영하 30도 이하로 추운 것이 사막성 기후이다. 현재도 파미르고원의 자동차 통행은 눈이 내리는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차량 통행이 제한된다.
![실크로드 '3대 간선도로' 지도.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abb14bc896a93d.jpg)
2000년 전 한나라, 당나라 시대에도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현지인 가이드가 필요했다. 실크로드 개척자는 기원전 3세기 한나라 '장건'이고, 실크로드 전성기는 '당나라' 시대이다. 실크로드는 동양의 중국과 서양의 로마(동로마제국) 사이의 교역, 종교, 철학, 문화의 소통 길이다. 고대 험난한 동서 교역의 상인은 '소그드 상인'(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부하라 지방 선조)들이 서기 10세기까지 500여 년 동안 활약하였다.
실크로드는 '육로 길'과 '해상 길'이 있다. 육상 길은 사막로(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로(천산북로) 세 개로 구분된다. 우리는 서안에서 출발, 하서주랑(900킬로 회랑)을 지나서 돈황으로 향한다. 돈황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천산남로(서역북로)"를 통과할 것이다. 위구르족의 본거지인 '카스'에서 숙박하고,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따라서 중국의 서쪽 끝 파미르고원이 목적지이다.
장고한 흥망성쇠의 고도 서안(西安)에서 이틀 동안 달콤한 휴식을 보냈다. 아내가 서울에서 가져온 염색약으로 하얗게 변한 내 머리 염색을 해서 외관이 깔끔해졌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안까지 7천500킬로를 달려왔다. 이번 여행 거리의 약 1/3을 이동한 셈이다. 7월 24일 서안의 여름 햇살은 무척 뜨겁다. 아침 9시 호텔을 출발 서안성 '서문'에 있는 "실크로드 기념 조형물"에서 출정식을 할 예정이다.
실크로드 조형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고비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의 무사고 운전을 기원했다. 조형물은 쌍봉낙타를 타고 서역으로 떠나는 구도승, 소그드인 상인, 외교사절단, 출정하는 군인 등을 실물 크기의 2배 크기로 1990년대 관광상품으로 설치한 것이다.
실크로드 무역은 10세기 당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온 '소그드 상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세기 아시아의 강대국 당나라는 개방적 국가이다. 능력이 있으면 국적, 종족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등용했다.
![실크로드 '3대 간선도로' 지도.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4268a274735987.jpg)
당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부하라 출신 소그드인), 고구려 포로의 후손 고선지 장군(안서 절도사), 신라의 최치원도 당나라에서 벼슬을 했다. 외국인들도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서 자기 종교를 포교하고 장사를 자유롭게 하였다.
오늘 저녁 숙박지는 섬서성 서쪽의 '천수'이다. 서안에서 출발하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이름이 진시황제의 궁전 이름인 '아방궁'이라서 눈길을 끈다.
'관중 평야'를 지나며 크고 작은 도시, 평야의 무성한 옥수수, 밀, 유채밭, 농촌 마을을 지나고 있다. 작은 도시에도 30층, 40층 고층 아파트들이 많다. 제대로 분양이 되는지 궁금하다. 현재 중국은 미분양 아파트 수가 1억 여채로 중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서안을 조금 벗어나면 '강태공'의 낚시터로 유명한 '위수(渭水)'를 지나서 간다. 위수는 3천 년 전 강태공이 주(周)나라 건국자 문왕을 만날 때까지 낚싯바늘 없는 낚시로 '수십 년 세월을 낚았다.'는 일화의 유명하다. 위수 어딘가 낚시터에 강태공이 주(周) 문왕을 만나는 장면을 기념비로 설치했다고 들었다.
3000년 전 '주 문왕'이 사냥을 갔는데 그날은 짐승을 하나도 못 잡고, 우연히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는 강태공을 만났다. 주 문왕이 "낚시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말을 걸었다.
"물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강태공이 대답했다. 그때 강태공 나이 72세이다. 주 문왕과 강태공은 시국에 대한 짧은 대화 끝에 의기투합하여 정승으로 채용된다. 강태공은 72세 나이에 정승이 되어 주나라 창업 공신이 되었다. 강태공의 후손은 산동 지방 '제나라'를 봉토로 받아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춘추 5패'의 첫 번째 패자(제나라 환공)가 되기도 했다.
'실크로드' 명칭 이름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887년 지도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리히트호펜은 당시 중국에서 독일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실크(비단)라는 상품 이름 때문에 '무역의 길'이 강조되지만, 이 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파된 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마니교 등 '종교의 길'이다. 전쟁하러 병사들이 출발하는 '전쟁의 길'이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길'이다. 페스트 등 질병이 오갔던 '재난의 길'이다. 실크로드는 고대, 중세의 동, 서양의 문명의 교차로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졌던 실크로드 종단 꿈을 결혼 40주년, 나이 70살 기념으로 하고 있다. 당나라 장안에서 출발한 상품의 최종 목적지는 이스탄불, 페르시아, 이집트 등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이다. 반대로 서쪽에서 온 상품은 당나라, 신라, 일본 등이 목적지이다.
무역은 한 사람의 상인이 전 구간을 담당하지 아니했다. 로마에서 출발한 상인이 장안까지 오지 아니하고, 장안에서 출발한 상인도 로마까지 가지 아니한다. 오아시스 도시의 구간 구간을 이동하는 '중계무역' 형태이다.
오아시스 도시마다 통행세를 내고, 중간에 강도를 만나고, 전쟁을 만나고, 자연재해의 위험한 길을 통과해야 하므로 지중해 최종 소비자에 도달하게 되면 상품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된다.
실크로드 상인들은 중간에 재난과 위험을 피하고, 장사가 잘되어서 돈을 벌게 해달라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고, 많은 공물도 바쳤다. 당나라 시대에 실크로드 지역은 불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경교), 마니교 등 여러 종교가 성행하였다. 실크로드 곳곳에 많은 석굴과 불교 유적은 천 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서 완성된 것이다.
지배층의 권력 유지와 자손 대대 부귀영화, 사후 극락 장생 기원을 위해서 막대한 재물을 사찰에 투자했다. 돈황 등 많은 천불동 석굴에는 기부자의 얼굴을 조각하기도 하고, 부처님을 기부자의 모습으로 바꿔서 만든 곳이 있다. 중국에서 '천불동'은 천 개의 석굴이 아니고 '많다는 의미'이다.
낙타를 타고 이동하던 육로(陸路) 실크로드는 당나라 후기부터 중요성이 적어지고, 아랍상인, 인도 상인에 의한 해로(海路) 실크로드가 육로를 대신한다. 범선 배 한 척의 화물 운반은 낙타 500대보다 더 많은 짐을 나를 수가 있다고 한다. 장안까지 운하가 연결되어 바다로 온 상인들도 장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서기 400년경 법현 스님(중국의 3대 여행기 중 하나인 '불국기' 집필)은 육로로 천축(인도)에 갔다. 귀국할 때는 스리랑카에서 무역선을 타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신라의 혜초스님도 서기 723년 배를 타고 바닷길로 인도로 갔다가 돌아올 때는 육로를 통해 당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선원들은 계절별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몬순기후의 특성을 알고 있었고, 많은 무역선이 왕래했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당나라 시대 육로(陸路) 실크로드는 간선도로가 세 개이고, 지선(支線)은 수백 개가 넘는다. 실크로드 지선(支線)은 유라시아 대륙에 실핏줄처럼 많다.
신라의 계림(경주)에서 출발, 서해 당진항에서 중국 산동 반도를 지나 당나라 장안으로 가는 길도 실크로드 지선(支線)의 하나이다. 신라시대 청해진(현재 완도)에서 당나라와 신라, 일본까지 국제무역을 했던 해상왕 '장보고'도 실크로드 지선 무역상의 하나이다.
![실크로드 '3대 간선도로' 지도.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2e335ce5b10d39.jpg)
실크로드의 개척자는 2200년 전 한나라의 '장건'이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는 흉노족의 계속되는 침략과 증대되는 공물 물량의 요구 때문에 전쟁을 준비한다. 감숙성 '하서회랑'에 살던 유목민 '월지족'을 흉노족이 침략하여 월지족 왕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무제는 서쪽으로 쫓겨간 월지족이 흉노족에 원한이 많다는 정보를 접한다. 기원전 139년 서쪽의 월지족과 군사동맹을 체결, 흉노족을 협공하자는 한무제의 명령을 받고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하였다. 장건은 서역으로 가는 길에 흉노족에 붙잡혀 1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한다.
흉노족의 내분을 틈타 탈출하여 오늘날 중앙아시아 남쪽에 살던 월지족 왕을 만난다. 어렵게 만난 월지족 왕이 흉노족과 전쟁을 원하지 아니함에 따라 장건은 빈손으로 귀국했다. 귀국길에 장건은 또 흉노족에 포로로 잡혔다. 다시 탈출에 성공하여 포로로 있을 때 결혼한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장안으로 13년 만에 귀국했다. 장건은 우직한 충성심,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나이이다.
장건은 월지족과 동맹은 못 했지만, 복숭아, 수박, 포도, 무화과 등 서역 과일을 한나라에 가져오고, 한혈마(汗血馬)라고 부르는 천마(天馬)가 '대완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한혈마를 구하기 위해 중국의 비단과 유목민의 말을 교역하는 '견마무역'이 시작되게 된다.
동서 교역로 실크로드가 생기기 전에 흉노족은 공물로 받은 한나라 비단을 서역 상인에게 팔아서 이윤을 남기고, 서역 상인은 흉노에게서 산 비단을 로마 제국에 판매하였다.
기원전 로마의 영웅 케사르, 로마의 귀족 부인들은 비단으로 만든 옷을 무척 좋아했다. 흉노족은 한나라 공격과 종족의 내분에 의해 멸망한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이(夷)민족의 힘이 강할 때는 공물과 선물로 회유, 왕위 계승의 내분 조장, 다른 종족을 통한 이이제이 정책을 했다.
이민족이 분열되어 힘이 약해지면 공격하는 정책을 오랫동안 해왔다. 흉노족은 한나라 공격으로 멸망하고, 이후 동서 교역은 소그드 상인이 담당하게 된다.
'훈족'으로 불리는 일부 흉노 부족은 한나라 공격 이후 서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로마 제국의 변경까지 이동하였다.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에 살던 게르만족은 '훈족'의 침입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후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한나라는 흉노족이 지배하던 서쪽의 돈황, 주천 등에 "하서(河西) 4진'을 설치했다. 서쪽의 흉노족을 굴복시킨 한 무제는 동쪽으로 군대를 보내서 고조선의 후예인 평양의 '위만조선'을 기원전 108년 멸망시키고, 낙랑군 등 네 개의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다.
낙랑군은 중국 본토의 한나라가 멸망(서기 220년 멸망) 후에도 계속 존속하다가 서기 313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다. 고구려의 낙랑군 함락 관련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읽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낙랑군에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소리가 나는 북(자명고(自鳴鼓))이 있어서 고구려는 평양성 함락이 어렵다. 호동왕자가 낙랑공주에게 자명고 파괴를 부탁하고, 호동왕자와의 사랑을 위해 고국을 배신한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어서 낙랑군이 함락되었다는 얘기이다.
![실크로드 '3대 간선도로' 지도.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e24bd5f2909441.jpg)
흉노족은 시베리아 평원을 거쳐서 흑해 지방 유목민 '스키타이' 족의 정교한 금세공 문화를 신라에 전달하였다. 고대 한반도 역사는 실크로드 역사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후 '천수'에 도착하여 중국 4대 석굴의 하나인 '맥적산 천불동 석굴'을 관람할 계획이다. 천수에 도착했을 때 비가 심하게 내린다. '맥적산석굴'은 산 중턱에 설치된 계단을 타고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비 때문에 계단이 미끄러워서 관람이 폐쇄라고 한다.
맥적산 석굴은 유목민 왕조인 북위가 5세기에 석굴 조성을 시작하여 명나라까지 1000년 이상 걸려서 건설된 석굴이다. 위 사진은 필자가 6년 전 실크로드 여행 시 찍은 맥적산 석굴사원이다. 바위벽에 촘촘히 있는 석굴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한다. 문화혁명(1966~1976년) 시대에 석굴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망가져서 홍위병의 침입이 어려워 보존이 잘 되었다고 한다.
오후 아내와 함께 '천수' 숙소 근처 중국 편의점에 가보니 한국의 진로소주를 팔고 있다. 종업원에게 누가 소주를 사는지 문의하니 맥적산석굴에 관광하러 오는 한국인 관광객이 산다고 한다. 작은 도시 천수에서 진로소주를 반주로 고향의 맛을 느끼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였다.
![실크로드 '3대 간선도로' 지도.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9214052e0a4af4.jpg)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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