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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전막후]④최영휘 경질과 한동우 등판


オヤブンって誰ですか?

|그룹 덩치 커지며 속속 드러나는 경영 정책 이견

|'뉴뱅크 vs 원뱅크' 10년 전쟁 후 6년의 잠복기

|사실상 뉴뱅크 재가동한 한동우 노림수 '조용병'

신한은행 현판 [사진=신한금융]
신한은행 현판 [사진=신한금융]

[아이뉴스24 김병수 기자] 신한금융의 경영 정책과 관련한 노선 차이가 대외로 노출된 건 2005년 5월 9일이다. 최영휘 신한지주 사장이 전격 경질됐다. 신한지주는 “최 사장의 업무 스타일이 통합 초기엔 적절했지만,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된 현 상황에선 잘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해임 배경을 설명했다.

최 사장은 신한금융이 굿모닝증권(2002년), 조흥은행(2003년) 등을 인수·합병(M&A)하면서 빠르게 덩치를 키우던 시기에 전략·기획통으로 라 회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2001년 12월에 맺은 BNP파리바와의 전략적 제휴다. 신한금융은 그해 9월에 설립됐다. 금융지주 체제로 전환하면서 유럽 자본을 유치하고 지분 4%를 넘겼다. 공격적인 M&A에 나선 기반이기도 하다.

2001년 9월 신한금융지주회사 설립한 후 그해 12월 12일 BNP파리바와 소비자금융 및 방카슈랑스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사진 아랫줄 중앙에 최영휘 사장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신한금융은 M&A를 통한 몸집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사진=신한금융]
2001년 9월 신한금융지주회사 설립한 후 그해 12월 12일 BNP파리바와 소비자금융 및 방카슈랑스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사진 아랫줄 중앙에 최영휘 사장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신한금융은 M&A를 통한 몸집 키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사진=신한금융]

최 사장 경질의 직접적인 배경은 신한이 나아갈 방향과 관련한 이견이다. 최 사장이 신한·조흥 어느 한쪽의 색깔을 빼고 새로운 형태의 ‘뉴뱅크’를 주장한 반면, 신한은행 중심의 ‘원뱅크’를 주장하는 신한은행 경영진이 충돌했다. 당시 은행장이 신상훈 씨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대형화 총론은 거부할 수 없는 대세다. 뉴뱅크는 글로벌(유럽식 유니버설뱅크)에, 원뱅크는 차별화에 가까운 개념으로 요약한다.

신한금융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인수·합병을 통해 빠르게 몸집을 키웠다. [사진=신한금융]
신한금융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인수·합병을 통해 빠르게 몸집을 키웠다. [사진=신한금융]

금융지주 출범을 계기로 만든 CI(Corporate Identity)가 이를 선명하게 대변한다. 지주회사는 그룹의 새 비전과 전략을 반영하고 대형화, 겸업화, 국제화라는 세계적 금융환경의 변화 속에서 대표적 종합금융 브랜드로 위상 정립이 필요하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창립 때부터 쓴 새싹 로고와 CI는 수명을 다했다.

라 회장과 교포 주주들의 신뢰에 이상기류가 감지된 것도 이때쯤으로 회상하는 이들이 있다. 거스르기 힘든 추세지만, 교포 주주들로선 유럽 자본 유치와 글로벌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라 회장이 홀로 서려는 독자 노선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의 1차 폭발이 '최영휘 경질'로 나타났다는 해석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한금융 이사회에선 교포 주주들이 단일하게 반대하면 경영진이 표 대결로 의사를 관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2005년 5월 이사회에서 라 회장은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최 사장을 경질했다. 대신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이후 5년 4개월 후 신한 사태가 터졌다. 2010년 신한 사태는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간 축적된 미세한 균열이 한 번에 쭉 찢어진 사건인 셈이다.

라 회장은 교포들과 벌어진 거리를 2010년 '신한웨이(Way)'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좁혀보고자 했다. 신한웨이는 신한정신(Spirit)으로도 불린다. 웨이는 한국 버전, 정신은 일본 버전인지도 모른다. 신한금융은 이를 '신한인의 생각, 행동 기준을 나타내는 가치체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허사였다. 이듬해 2011년 3월 21일 창업주 이희건 회장마저 별세하면서 교포 주주들도 구심점을 잃었다. 그렇게 신한금융의 내분 사태는 수습이라기보단 그냥 수면 아래로 꺼졌다.

신한금융은 2010년부터 신한웨이 캐치프레이즈 배지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9개월 후 신한 사태가 터졌다. [사진=신한금융]
신한금융은 2010년부터 신한웨이 캐치프레이즈 배지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고 9개월 후 신한 사태가 터졌다. [사진=신한금융]

구원투수로 한동우 신한생명 부회장이 투입됐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합리적 관리형으로 구원투수로는 안성맞춤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실제로 한 회장은 신한 사태 이후 실추된 대외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고, 주요 세력들도 각을 세우기보다는 자중하면서 조직은 안정을 찾아갔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연임(6년)을 하면서 안정된 관리 능력을 보여준 한 회장이 3연임은 극구 고사했다. 당시에도 금융권엔 'CEO 70세 룰'이 얘기되곤 했다. 신한금융은 CEO의 연령 제한을 67세로 했다. 연임 땐 70세까지만 할 수 있다. 이 룰에 걸리긴 하지만, 내부에 마땅한 후보가 있지도 않았다. 안정된 상태를 조금 더 이끌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많았으나, 한 회장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한동우 회장이 2017년 3월 30일 이임식에서 신한금융 깃발을 신임 조용병 회장에게 넘겨주고 있다. [사진=신한금융]
한동우 회장이 2017년 3월 30일 이임식에서 신한금융 깃발을 신임 조용병 회장에게 넘겨주고 있다. [사진=신한금융]

당시 한 회장을 집무실에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정식 인터뷰는 아니고,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퇴임 인사를 빙자한 티타임. 3연임에 도전하지 않는 이유를 안 물을 수 없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한 회장은 '불난 집 수습하고, 직원들이 마음을 추스르고, 그룹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조직이 다시 뛰게 만드는데 6년이면 됐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한 회장은 우리가 작은 나라에서 금융업을 하지만, 앞으로 이자 떼먹는 장사는 점점 힘들어질 테니 자산을 잘 굴려 고객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선진 금융기법을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시 금융계에선 비슷한 방향의 얘기가 많았고,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여서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고 말았다. 그 말이 차기 회장은 조용병 행장이라는 사실을.

한동우 회장이 말한 신한금융 최고 CEO의 임기 6년(연임)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다시 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감을 잡았다.

[막전막후 글 싣는 순서]

①새 대한민국 은행 '新韓'의 재림

②다시 확인하는 오너십

③반복된 위기의 실체도 오너십

④최영휘 경질과 한동우 등판

⑤기회인가? 위기인가?(끝)
/김병수 기자(bskim@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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