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 특히 지사의 최고 수장인 지사장은 어떤 자리일까. 세계 최고 기업의 한국내 전진기지로서 최첨단 기술 및 제품을 앞서 전파한다는 자긍심이 떠오른다. 더불어 고액의 연봉과 선진적인 글로벌 경영시스템을 전수받을 수 있는 자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비즈니스맨들에겐 더없이 매력적이다.
더구나 국내 IT 시장의 경우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과 제품이 거의 전 영역에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는 명예을 얻게 된 배경에는 이들의 인프라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명예와 보상'이라는 화려함 속에 글로벌 기업의 지사장은 또 감수해야 할 것이 적지 않은 자리다. '외국 자본의 국내 침투에 앞장서고 있다'는 곱지않은 시선은 여전하다. '국내 경제와 산업의 든든한 밑받침이 되는 기술과 제품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궁색한 변명'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 때문에 '첨단기술의 전도사'라는 명예는 홀로 곱씹는 위로일 수 밖에 없는 자리가 또 지사장이라는 자리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 지사장의 가장 큰 애환은 철저히 실적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냉정한 평가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가시방석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본사의 냉정한 평가는 때론 우리 기준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냉혹하기도 하다.
명예와 고액 연봉 뒤에 숨은 그들의 애환을 들여다 보자.
◆ 냉혹한 평가에 대한 부담...그 외로움
지금은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의 대표로 있는 A 사장.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외국계 소프트웨어 기업의 지사장으로 있었다. 그가 지사장 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기게 된 과정을 보면 '냉혹한 평가시스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A 사장이 그만 두게 된 것은 '이제 그만두라'는 한 통의 e메일이 전부였다. 그날로 쓸쓸히 짐을 쌌던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 다른 외국계 기업의 지사장 출신 B씨. 90년대 후반의 일이지만 출근해 보니 자신의 컴퓨터 접속 아이디가 삭제돼 접속을 할 수 없었고, 뒤이어 자기 아랫사람인 인사담당자로부터 '해고' 사실을 들어야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국계 기업의 지사장들은 실적 부진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 사전통보없이 그만두라는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게 일반적이다.
'세계적 기업의 한국내 전진기지, 그리고 사령탑'이라는 명예 뒤에는 하루하루 영업실적을 빠짐없이 본사에 보고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세일즈맨의 비애가 숨어있는 것이다.
사실 '사령탑'이라는 말도 과장된 표현이다. 지사장이 사령탑일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영업에 국한된 얘기다. 재무나 인사에 대한 재량권(결제권)까지 갖고 있는 지사장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국내 굴지의 외국계 IT 기업에서 수년간 지사장을 지냈던 C씨는 "그래도 우리는 현지 지사의 재량권을 인정해줬다고 하지만, 재무분야는 손도 댈 수 없었고 인사권도 제한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영업본부장의 역할이 사실 지사장의 역할이라는 얘기다.
외국계 기업의 지사장은 그런 면에서 일반적인 CEO는 아닌 셈이다. 실제 지사장들에게 본사가 부여한 직책은 '디렉터(Director)'나 '매니저(Manager)'가 보통이다.
지사장에 대한 평가는 흔히 말하는 '쿼터'가 기준이다. 올해 책임져야 할 목표량이다. 이른바 잘리지 않기 위해 달성해야 할 무시무시한 '숙제'인 셈이다. 쿼터를 채우지 못하면 앞의 사례처럼 냉혹한 평가가 기다린다. '외국계 기업 지사장 자리는 파리목숨'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통한다.
거대 컴퓨터 기업인 모업체의 한국지사는 2분기 연속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짤린다'는 얘기가 나돌았고 이 기업의 지사장은 '단기 낙마'하는 것이 전통처럼 이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쿼터를 적게 받기 위한' 노력이 회계연도 말에 가면 외국계 기업 지사장들의 지상과제다. 세계 정상의 한 외국계 기업은 분기 쿼터를 채우면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경우까지 관행처럼 지속하고 있다.
물론 쿼터에 대한 부담과 냉정한 평가 시스템은 지사장의 숙명이다. 그걸 감수하면서 자리에 오른 것은 실적 달성에 따른 두둑한 보상과 명예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외국계 기업 지사장 경험은 개인적인 커리어 관리에도 더 없이 좋은 자리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고 명예로워 보이지만 뒤에서는 이처럼 '목숨을 건' 외로운 분투가 매일 계속되는 셈이다.
◆ 시장의 변화...역할의 변화
글로벌 IT 시장의 변화, 또 우리나라 IT 시장의 변화는 또 다른 측면에서 지사장의 자리를 힘겹게 한다. 이는 실적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한국오라클의 김일호 사장이 지난 13일 사임했다. 취임 9개월여만에 이뤄진, 말 그대로 '전격적인' 사임이다.
한국오라클은 국내 IT 업계에서 글로벌 기업의 지사로는 최고의 자리로 평가되는 곳. 하지만 김일호 사장은 이 자리를 채 1년도 못 채우고 스스로 물러났다. 데이터베이스 시장의 세계 최고 기업이자, 국내 최대의 데이터베이스 업체인 한국오라클의 수장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이유는 본인이 밝히진 않았지만, 김 사장의 경우는 달라진 시장 환경, 이에 따라 달라진 지사와 지사장의 역할에 대해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풀이된다. 김 사장은 이미 오토데스크코리아의 지사장을 8년간 지낸 바도 있고 그에 앞서 20여년간 영업을 총괄해온 정통 영업맨이었다.
그러나 오라클은 한국오라클의 각 영업본부를 직할시스템으로 개편하고, 지사장에게는 대외마케팅 및 장기적인 국책 프로젝트의 로비스트 활동 같은 역할을 요구했다. 이같은 본사의 방침과 본인의 의지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강병제로 대표되는 '독불장군'식 영업전략을 상당부분 인정해줬던 오라클이 이제 글로벌 시장 변화에 따라 동북아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중앙통치하려는 큰 변화의 시기다. 우리나라 IT 시장은 성숙기로 보고 중국으로 대표되는 신흥시장을 집중 공략한다는 대대적인 전략의 수정인 셈이다.
한국MS의 지사장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온 손형진 전 사장도 지사장에게 요구하는 역할과 자신의 의지 사이의 차이로 인한 부담감이 큰 작용을 했다는 후문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전략의 변화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고 이로 인한 지사의 변화도 한국오라클만의 문제는 아니다. 금융권 솔루션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인 D사도 최근 지사장을 전격 교체했다. 교체의 배경과 관련, D사의 아태담당 부사장은 "회사의 전략이 이제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타깃을 설정했고, 그에 따라 지사의 역할도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에둘러 설명했다. '새로운 전략에 따라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다'는 뜻인 셈이다.
본사 차원에서 인수합병이라도 있게 되면 지사는 가시방석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최근에는 미국발 대형 M&A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경우 본사에서는 "동요하지 말고 현재의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통합 지사는 어떤 형태로든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만큼 좌불안석일 수 밖에 없다.
시만텍의 베리타스 인수가 그랬고, 어도비의 매크로 인수도 최근의 일이다. 시장이 요동치면서 이같은 일은 앞으로 더욱 빈번할 것이다.
이래저래 글로벌 기업의 지사장들은 그 어느 때보다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이며 퇴근길에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상범기자 ssanba@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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