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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염정순 한국토프톤 부회장


 

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코너입니다.20년여간 국제입찰시장을 누비며 성공신화를 일궈낸 이글코리아 방성석 사장의 치열한 해외시장 개척기는 주위에서 쉽게 보기 힘든 드라마틱한 창업역정으로 평가됩니다.

방 사장이 바통을 넘긴 98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세계적 스피커전문기업인 한국토프톤의 염정순 부회장입니다.

“일치감치 중국시장에 진출,글로벌기업가로 자리잡은 기업가입니다.여성 특유의 섬세함에 추진력까지 정말 대단한 경영자입니다”

두 사람은 뒤늦은 만학의 열정으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된 사이라고 합니다.MBA공부에 이어 박사 과정도 같이 밟고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늦깎이 향햑열을 불태우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토프톤 염정순(55) 부회장의 글로벌비즈니스와 20년넘는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25년간 스피커 한 제품만 파고들어 5개의 해외공장을 거느리고 수출로만 연매출 800억원대의 매출을 보이며 세계적기업으로 발돋음한 토종 스피커 전문벤처기업이 등장,주목을 끌고있다.

특히 이 회사는 벤처산업계에선 보기드물게 온가족이 경영에 나서는 가족경영을 하면서도 투명한 회사운영과 폭발적인 성장세를 구가,성공적인 ‘벤처가족경영’사례로 꼽히고 있어 눈길을 끌고있다.

경기 포천시 내촌면에 위치한 한국토프톤 공장.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위치한 사무동빌딩의 대형 창문유리가 눈길을 끈다.창문은 한두개가 아니고 빌딩전체에 테를 두른것처럼 길게 빙둘러 만들어져 있다.

허리높이보다 낮게 설치돼 안에서 일하는 경영진의 모습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부회장 집무실 역시 밖에서도 대충 뭘하는지를 파악할수 있을만큼 안이 훤히 보인다.

염 부회장은 비즈니스계에 뛰어든지 25년째를 맞는 베테랑 여성기업가다.산전수전 다겪은 노련함 그 자체다.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차분함이 한눈에 들어온다.오랜 세월을 견뎌온 탓인지,매우 보수적인 느낌을 준다.

염 부회장은 사무실 유리창을 늘 밖에서 훤히 보이도록 해놓는 것은 물론,집무실 문은 1년내내 열어놓는다.스스로 열린,그리고 투명하게 하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염 부회장은 직원 10여명에 불과했던 회사를 이젠 해외법인 5개에 해외공장 직원만 2,000명을 넘어설만큼 글로벌경영에 주력,성공한 열성기업가다. 그는 전형적인 관리형 리더다.

그는 기업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그리고 성장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뭘해야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고있다.항상 먼저 내다보고,항상 고객보다 먼저 생각해야하는 앞선 마인드를 강조한다.

염 부회장은 기업부침에 따른 위기관리와 성장시 보수적으로 챙겨야할 요소 등에 대해서는 대단히 높은 경영식견을 갖고있다.아마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실전경험에서 터득한 듯하다.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아직도 세세한 것까지 챙기는 등 열정이 넘친다.한국토프톤은 80년 설립된 스피커전문회사.국내 삼성전자,LG전자를 비롯해 마쓰시타,필립스,톰슨 등 세계적 기업이 주고객이다.

중국에만 4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지난해 폴란드에 현지공장을 설립,유럽시장에도 본격 진출했다. AV시스템 스피커를 PC용에 이어 휴대폰,PDP 및 LCD TV용 스피커시스템을 생산, 연매출 800억원대를 자랑한다.

◆ 경리직원이 CEO를 맡은 까닭은

“마음대로 하세요.대신 중국공장 설립 및 셋업은 책임지고 진행하세요” 88년말, 염정순 부회장이 태국공장을 극구반대,중국을 고집하면서 불거진 경영진간 갈등은 결국 대표이사가 태국공장설립을 포기하면서 중국으로 전격 결론이 났다.

염정순 부회장은 대학 졸업후 전업주부에서,전혀 생각지 않게 비즈니스계에 뛰어든 케이스다.염 부회장의 인생은 80년,자그마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시아주버니(남편의 형)가 갑작스레 작고,남편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비즈니스와 인연을 맺게된다.

회사는 직원 10여명 남짓한 규모로 스피커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이었다.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어떨결에 회사 경리일을 도와준게 끝내 비즈니스계에 몸담게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회사규모가 작아 경리직원을 따로둘 형편이 아니었다.

당시 성원전자(한국토프톤 전신)는 매년 10억여원의 매출로 근근히 꾸려가는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하지만 다행히 남편은 사업초기부터 해외수출에 주력했다.스피커부품을 생산,일본 마쓰시타와 소니,산요 등에 수출했다.

작지만 이미 해외마케팅에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었던 것. 86년엔 30억원,87년에는 50억원규모의 매출을 올렸다.염 부회장이 회사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88년,중국진출이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인도 회사와 5대 5의 합작으로 태국에 공장을 설립키로 합의를 끝내고 투자를 코앞에 둔 88년 중반.염 부회장은 당시 중국을 우연하게 방문한후,태국공장설립에 제동을 걸었다.이유는 중국 청도를 방문한 후 느낌이 딱 왔었다고 회고한다.

태국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 “청도는 한국과 가깝고,사람들이 무지하게 부지런했습니다” 게으르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태국과는 비교할수 없었다.

무엇보다 5대 5 합작투자시 경영상 이견이 생길 경우,불같은 성격의 남편과 합작사사이에 마찰이 생길수도 있다는 우려를 떨칠수 없었다.

반면 중국은 단독투자를 통한 독자경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태국공장건은 이미 되돌릴수 없는 상황이었지만,염 부회장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결사 반대에 나섰다.

CFO같은 역할로 늘 조정자에 머물렀던 염 부회장의 강경한 자세에 사장인 남편은 크게 당황했다. “남편이 무지 황당해했죠.이미 99% 결정이 끝난 상태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으로 가자고 하니 말입니다”

끝내 뒤집었다.염 부회장은 이때부터 경영전면에 조금씩 나서게 된다.중국으로 결정난 이상,누군가 책임을 지고 중국공장을 성공시켜야 했다.

당시만해도 한중관계는 수교전이었고,89년 당시는 천안문사태가 터지면서 정치상황이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다.국내 정부조차 정정(政情)불안을 들어 투자를 만류했다.

진출하기로 한 청도 공장은 잡초만 무성한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공장건물 하나 달랑있는 풍경이었다.허름한 의류공장을 인수했던 것.하지만 염 부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89년 10월 45만달러 투자를 시작으로 총 340만달러 투자를 단행,청도에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를 설립했다.여직원 9명을 데리고,홍콩을 거쳐 중국에 들어갔다.

홍콩을 경유하며 느낀 살벌한 출입국분위기, 말이 공장이지,폐허같은 분위기에 여직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어쩔줄 몰라했다.그의 뚝심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한다.

국내 공장의 생산라인을 이전했다.불안해하는 직원들을 다독거리며,밤낮없이 24시간 매달린끝에 통상 1년정도 걸릴 라인이전작업을 불과 2개월만에 뚝딱 끝냈다.거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89년 11월 공장가동에 들어갔다. 번개불에 콩뽁아먹듯 몰아친 데는 이유가 있었다.89년 당시만해도 수출주문이 밀려,납기가 빡빡하게 돌아가는데다,한국 공장에 노사분규가 발생,생산에 차질이 생겼던 것.

중국공장을 곧바로 가동하지 않으면 납기를 맞출수 없는 절대절명의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현지인 100명을 뽑아,단기코스로 교육시킨뒤 곧바로 양산에 돌입했다.

예상은 적중했다.불가능할 것같던 납기를 맞출수 있었다.게다가 마쓰시타와 소니사의 AV제품수요가 폭증하면서 90년,91년 주문량이 쇄도하기 시작했다.생산하는대로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곧바로 대지 1900평규모의 제 2 공장을 설립,월 300만개의 스피커를 쏟아냈다.

특히 마쓰시타는 한국토프톤이 자사 AV제품라인별로 맞춰 납품해주자,아예 청도공장에 상주인력을 파견,자사의 해외공장처럼 관리하기에 이른다.마쓰시타는 이후 자사설비를 갖다주면서까지 중국 공장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92년말까지 탄탄대로였다.호황의 연속이었다.매출은 매년 200%이상 증가했다.89년 첫해 5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한데이어,90년에는 1천만달러를 훌쩍넘어 원화로 100억원대의 매출을 넘어섰다.

92년에는 2800만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등 지칠줄 모르는 성장세를 이어갔다.그의 중국 대결단은 30억원대 남짓한 회사가 연매출 수백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커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염정순,그는 누구인가
51년생. 경남 함양.안의産. 서강대 수학과(70학번),MBA 출신. CFO출신의 재무통.차분한 성격에 매우 치밀한 기획력의 소유자.외모와는 달리 강한 추진력을 갖고있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스타일.소탈하고 뛰어난 친화력이 강점.오랜 중국사업경험을 바탕으로 한 중국통.
취미 독실한 크리스챤
운동골프
존경하는 CEO특별히 없다.
친한 IT맨장흥순 터보테크 사장,김병기 지오인터랙티브사장,장명식 화인반도체사장
10년후 모습뒤에서 조언하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감명깊게 읽은 책이순신관련 서적

◆ 죽음 같은 세월, 처절한 재기의 몸부림

“절대 회사문을 닫을 수는 없습니다” 94년중반,염 부회장은 회사 오너이자 사장인 남편과 회사운영을 놓고 긴박한 갑론을박을 하고있었다.사장은 이미 재무적으로 부도상황인 회사를 정리하기로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회사문을 닫을수 없다며 버티는 염 부회장의 주장에 지친 사장은 염 부회장에게 “그러면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경영에서 전격 손을 떼기로 결정한다.

그간 조정자 역할을 해온 염 부회장이 경영전면에 나서는 순간이었다.대표이사로서 선택한 마지막 카드였다.부실은 이미 10년간 양적팽창을 하면서 잉태된 것이었다.

“마쓰시타,소니 등 메이저 고객 마진이 갈수록 줄어드는 상태였습니다.설비확장을 위한 은행차입은 늘고,영업이익은 계속 떨어졌죠.즉 외형은 커지는데 속은 곪고있었던 거죠”

외형위주로 경영을 하다보니,거품이 잔뜩 끼었던 것.94년,공장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95년,염 부회장은 고육지책으로 최대거래처 소니와의 거래를 중단했다.더 이상 출혈공급을 할 수는 없었다고 판단했다.

‘손절매’는 매출급감으로 이어졌다.매출이 100억원대로 급격히 떨어지자,은행권에서 부실기업으로 분류,대출회수등 금융제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행권의 제재로 중국공장과의 외상거래 등에 적신호가 잇따라 켜졌다.대출금 상환으로 자금은 말랐고,급기야 부도를 내야하는 상황에 직면했다.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하지만 여기서 그만둘수는 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처절한 생존게임에 들어간다.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었다.그가 내린 결론은 무조건 버티는 것.놀라운 점은 급여가 제대로 나가지 못한 1년 6개월간의 처절한 세월동안 250여명 직원중 회사를 그만둔 사람은 딱 1명에 불과했다.

그만둔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재무담당 상무.그는 이미 재무적으로 부도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부도를 막기위해 임금체불은 물론 구내식당조차 운영할수 없었다.

94년,95년 두해는 250여명 전직원이 월급없이 개인카드등으로 근근히 연명했다.염 부회장 스스로도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사무실을 떠야했다.

“전 정말 직원들이 흔들리지 않고,버텨준데 대해 한없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가족같은 분위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카드깡,대출과 여기저기 돈빌려 생활을 이어간다는 직원들의 숱한 생활고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중국 청도공장에서 번 돈으로 근근히 본사운영을 끌고갔다.염 부회장은 94년부터 4년가까이 10여억원의 사재를 털어 회사에 투입했다.여성 특유의 보수적인 스타일로 숨넘어가기 직전에 몇 억원씩 야금야금 꿔다 넣으며 겨우겨우 96년말까지 버텼다.

답은 없었고,삐걱하면 ‘끝’인 상황이었다.벼랑끝에서 지푸라기 하나 달랑 잡고있는 그런 세월이었다.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죽음 같은 세월뒤에 드디어 햇살이 찾아들었다.

97년 불어닥친 IMF는 염 부회장에게 생명수와 같은 단비였다.수출에 주력한 탓에 엄청난 환차익의 수혜를 본 것. “당시 달러당 800원하던 환율이 1800원까지 뛰었습니다.생각해보세요.800원짜리 수출대금이 갑짜기 두배,세배로 뛰었죠”

98년까지 불어닥친 IMF는 아사직전의 한국토프톤을 기사회생시킨 ‘마법의 손’이었다. 99년초,전직원의 밀린 급여는 물론 몇 년치 상여금도 일시에 지급했다.

염 부회장은 당시 표정관리를 하느라 무지 힘들었다고 회고한다.IMF로 다들 시름이 깊던 시절,환차익으로 갑짜기 회사에 돈이 넘쳐났기 때문이다.그의 두드린 돌다리 다시 두드리고 무차입경영을 최우선하는 ‘짠돌이 경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염 부회장은 그 여세를 몰아 2003년말,현재의 본사공장이 있는 포천에 대규모 부지를 매입,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회사는 자금적으로 문제였지,문닫을 회사가 아니였습니다.기술력있고,거래선이 있는 터라,무조건 버티면 성공할거라 확신했습니다”

중국진출후 노트북PC시장이 활황기에 접어들면서 노트북PC용 스피커수요가 급증한 것도 호재로 작용했다.

◆ 거칠것없는 확장의 세월

“당장 내일 납품해주기 바랍니다.물량,납기 반드시 지켜주세요” 국내 모 대기업이 하루납기를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주문도 한국토프톤은 거뜬히 맞춰납품한다.

비즈니스관례상 상상하기 힘든 ‘하루납기’가 가능한 것은 한국토프톤의 뛰어난 양산기술력때문이다.스피커에 관한한 세계적 수준의 양산기술을 갖추고 있다.

4년전부터는 스피커단품위주에서 홈씨어터에 들어가는 스피커시스템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오디오에서 PC로,그리고 노트북PC에 이어 PDP,LCD TV용으로,최근에는 휴대폰으로 빠르게 제품군을 옮긴 앞선 개발력 역시 핵심 경쟁력이다.

보수적 경영스타일을 보이고 있는 염 부회장은 청도공장의 대성공에 이어 대대적인 사업확장에 나서고 있다.국내만 해도 직원 100명에 연매출 200억원을 올리고 있다.

중국 청도 1,2 공장은 현재 2000여명의 직원을 두고,연간 550억원대의 매출을 거뜬히 올리고 있다.염 부회장은 청도공장의 수익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판단,98년,광동성 동관시에 또다시 100% 단독투자를 통해 ‘동관토프톤전자유한공사’를 설립,중국 거점을 잇따라 확대하고 있다.

중국내 떠오르는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다.동관공장을 통해 생산하는 스피커는 중국현지 삼성전자와 LG전자,대우,아남전자 및 필립스전자,톰슨오디오HK 등에 납품하고 있다.

이와함께 비슷한 시기,동관시에 ‘S&S전자유한공사’를 추가 설립,스피커시스템 현지생산을 통해 지난해 100억원규모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염 부회장의 글로벌경영은 최근 중국을 넘어서고 있다.2004년말,폴란드현지에 또다시 단독투자로 현지공장을 설립,현지 LG전자 납품을 시작으로 유렵시장공략에 나서고 있고,중남미 시장진출도 2년전부터 타진하고 있다.

한국본사를 포함,6개 법인을 통해 한해 800억원대가 넘는 매출을 보이고 있다.망하기 일보직전에서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염 부회장은 98년이후 해외 현지공장을 잇따라 설립,해외무대를 향한 본격적인 확장경영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DVD플레이어,리시버를 개발,생산에 들어간 것을 비롯해 다양한 사업아이템발굴도 진행하고 있다.

한국토프톤,어떤 회사인가
설립일1986년 3월
종업원 2,500명(중국공장등 총 6개 회사전체)
자본금9.5억원
연락처031)534-0685 www.koreatoptone.com
사업영역 스피커 및 스피커시스템제조
경영계획 세계 최대 스피커회사로 발돋음
매출목표 2005년기준 800억원

◆ “가족경영을 아세요?”,염정순의 성공론

한국토프톤은 회사 회장,부회장,사장은 물론 부사장,그리고 해외법인장 모두 창업자의 가족들이다.오랜 부침을 겪어오며 나름대로 터득한 생존기법으로 보여진다.

우리의 근대 경제사에 가족경영이 가져온 폐해와 불투명한 경영관행에 대해 질문을 던지자,염 부회장은 강한 톤으로 설명을 이어간다.

“이 회사는 이미 94년께 죽었던 회사입니다.부도직전의 상황이었죠.하지만 든든한 가족간의 신뢰가 없었다면,아마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1년이상 월급없이도 꿋꿋이 버텨준 임원진의 역할이 컸습니다”

물론 직원들도 많은 고생을 했지만,결정적인 순간에 믿고 버텨준 가족중심의 경영진이 한국토프톤 생존의 핵심이었다고 단언한다. 해외현지공장에 대해서도 직설적으로 설명한다.

“해외공장은 정말 관리가 중요합니다.문화도 다르고,언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적당히 했다간 망하기 일쑤죠.오너정신없이는 힘듭니다.해외 법인장들이 오너쉽을 갖고 내 회사처럼 정말 헌신적으로 일한 덕분입니다.전문경영인은 오너만큼 안합니다”

그는 한국기업이 중국에서 숱하게 실패한 것 역시 전문경영인중심으로 운영하다,현지인과 마찰을 일으키거나,정부기관과의 유대를 잘 풀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문제는 목숨걸고,내 사업처럼 헌신적으로 일할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가족경영은 위기상황에서 매우 적합한 시스템입니다.물론 투명한 경영시스템을 구축하는 등의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죠”

중국 시장 진출과 관련,염 부회장은 할말이 참 많은 듯하다. “한국기업이 중국에 진출해 핵심기술을 몽땅 이전해주고 결국 다 뺏기는 걸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치솟는 인건비와 원부자재가 인상으로 한국기업들이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은 정부차원에서 잘 짚어봐야한다고 지적한다. 기업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기술을 갖고 해외로 나갈수 밖에 없고,청년실업은 어쩔수 없는 수순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진출시 합작투자의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게 염 부회장의 분석.단독투자가 유리하단다. 중국투자시 사전지식이 정말 많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국은 세제혜택 등 눈에 보이는 장점은 무지 많습니다.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세금 등 걸림돌이 한둘이 아닙니다.우리 기업이 결국 기술과 설비투자를 다 뺏기는 일이 허다한 게 이런 함정때문입니다”

지역선정 역시 물류비와 납기,영업상황 등을 고려,잘 선정해야한다고 주문한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기업의 경우 핵심기술을 너무나 쉽게 이전해준다는 점이란다.

“일본기업은 한국진출시 마지막 핵심기술은 절대 이전하지 않았습니다.이런 기술조차 일본이 30년걸려 한국에 이전했다면 한국기업은 중국에 채 3년도 안돼 기술을 몽땅 이전하는 느낌입니다”

잘된다고 하면 우르르 몰리는 한국기업의 ‘냄비근성’도 문제란다. “최근 동관쪽에 스피커사업이 된다고 하니,한국기업이 무려 9개사가 진출했습니다.그 전에 스피커의 ‘스’자도 모르던 기업까지 가세해서 말입니다.결국 제살깎아먹기밖에 안되죠”

염 부회장이 꼽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신뢰’다. “비즈니스를 함에 있어 절대 거짓이 있어서는 안됩니다.무리한 욕심을 내지말고 신뢰를 쌓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도전정신이다. “위기를 절대 피하면 안됩니다.피하지 말고 해결해야 합니다.요즘 젊은이들은 끈기와 인내가 정말 부족합니다.쉽게 포기하죠”

세번째는 투명경영이란다. “이제 글로벌경영시대에 경영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을수 없습니다.투명경영이 핵심입니다” 염 부회장은 직원들에게 ‘주인의식을 가져라’고 주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인의식은 가지라고 가져지는게 아닙니다.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질수 있도록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충실히 해주는게 중요합니다”

사훈을 사랑으로 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직원에 대한 사랑은 물론,고객관리도 사랑이고,회사 물건,건물에 대한 것도 모두 사랑으로 대해야한다는 것.

그는 여전히 가족경영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을수 있었고,그 바탕에는 강한 ‘믿음’이있다고 자랑한다.그는 직원들에게 늘 스스로 공부하고 발전해야한다고 강조한다.50대 중반의 나이지만 MBA공부에 이어 박사과정을 밟고있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 흔한 투자유치나 기업공개에는 전혀 관심없고,오로지 자기자본으로 우직하게 흑자경영을 일궈낸 한국토프톤 염정순 부회장.

염 부회장은 25년간 한우물을 파는 외길경영을 통해 한국토프톤을 세계적 기업으로 일궈낸 벤처기업가의 전형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염 부회장은 독실한 크리스챤입니다.부도와 숨막히는 생존과정,그리고 대박행진까지의 숱한 우여곡절을 견디고 오늘날 탄탄한 기반을 다질수 있는 것 역시 모든게 하느님이 도와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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