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올림픽

[이성필기자] 몇 해 전, 한 지역에서 열린 유소년축구대회를 취재할 때의 일이다. 꽤 오래된 축구대회로 초, 중, 고교부로 나눠 치러 축구계 안팎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우승을 할 경우 상급학교 진학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많아 다른 대회와 달리 경기의 질이 상당히 높았다.

마침, 대회가 열리는 지역의 명문팀과 타지역의 팀이 겨루는 경기가 열렸다. 경기는 매끄럽게 흘러갔고 양 팀 벤치에서는 선수들에게 쉼없는 주문이 쏟아졌다.

팽팽하던 상황에서 지역 명문팀에 유리한 페널티킥 판정이 나왔다. 수비수가 공을 밖으로 차내면서 재빨리 발을 뺐는데 갑자기 곁에 있던 공격수가 넘어진 것이다. 관중석에서는 "저 동작이 어떻게 페널티킥을 주는 파울로 인정되느냐"며 야유가 쏟아졌지만 심판은 요지부동이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판정이었지만 심판은 눈을 질끈 감았고, 경기는 결국 타 지역팀의 패배로 끝났다. 양 팀 감독은 악수로 조용히 경기를 마무리했고 곧바로 다음 경기가 이어져 별 일 없이 넘어가는 듯했다.

그런데 잠시 뒤 본부석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패한 팀의 감독이 "이럴 수가 있느냐. 우리가 언제까지 희생당해야 하느냐"라며 격한 항의를 했다. 이어 "이런 식으로 판정해서 떨어트릴 것이면 우리 보고 이 대회에 왜 참가하라고 했느냐. 더러워서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경기감독관은 "어이 A감독,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래. 참고 돌아가면 안되냐. 경기는 잘했잖아. 네가 한 번 희생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다음에 도와줄게"라며 달래기 바빴다. 마치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듯 A감독을 다루는 방식은 능숙했다. 대회가 열리는 지역팀 대부분이 거의 예선에서 탈락한 상황에서 한 팀이라도 올려야 하니 이해하고 도와달라는 뉘앙스였다.

더 충격적인 것은 패한 팀 선수들의 반응이었다. 감독의 항의를 지켜보던 어린 선수들은 하나같이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라는 듯 "그러니까 축협(대한축구협회의 줄임)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지"라며 체념하는 듯한 말투를 던졌다.(축구협회의 줄임말인 축협은 축구팬들이 행정에 대한 비판을 할 때 비아냥거리듯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고질적인 심판 판정 불신과 어른들의 어처구니 없는 일 처리에 이미 선수들도 닳고 닳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희생양을 요구하는 축구계 전반에 퍼진 이런 나쁜 문화는 현 조중연 회장 체제의 대한축구협회를 압축해 보는 것 같다. 조 회장은 지난 2009년 축구협회 수장에 오른 뒤 나름 유소년 축구 강화 등 한국 축구 장기적 발전을 위해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박종우(부산 아이파크)의 '독도 세리머니'가 터진 후 일처리 방식은 후진적 행정의 극치를 보여줬다. 사태 수습을 한답시고 일본에 보낸 공문이 일본 언론을 통해 "사죄하는 내용이었다"고 보도되자 축구협회는 "그런 일은 없다"라며 항변했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결국, 굴욕적인 수사로 가득한 공문의 전문이 공개되자 "일본축구협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랬다"라며 상식 밖 저자세 외교에 대한 핑계를 댔다. 정몽준 전 회장 시절에는 다른 나라 협회 등 외국과 공식 문건이 오갈 때 외교관 출신의 전문가에게 철저하게 검증받는 절차가 있었지만, 지금 축구협회에는 이런 시스템도 사라졌다.

지난 17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대한체육회와 축구협회 수뇌부가 박종우 세리머니 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기로 하면서 일본에 공문을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로 한일관계가 복잡한 상황에서 외교통상부 등 관련 부처와 상의 없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상급 단체의 권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축구협회가 몇몇 사람의 결정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미 조중연 회장은 지난해 11월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의 경질과정에서 기술위원회를 배제하고 '수뇌부가 알아서 결정하는' 행태를 보여 기본 절차를 무시했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당시 코칭스태프에게 잔여 연봉 미지급과 관련해 꼼수를 부리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올해 2월에는 협회 물품 횡령을 시도하려던 직원의 비위 사실을 알고도 오히려 억대 위로금을 지급하며 퇴직시키는 어이없는 일로 대한체육회로부터 감사를 받기도 했다. 축구협회의 이미지를 생각해 조용히 덮으려 했다는 것이 조 회장의 설명이었지만 수긍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조 회장 퇴진론이 일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두 차례 축구협회를 뒤흔들었던 이 사건들에서 조 회장은 막후에 있었다. 조 감독의 경질 때는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대신 칼을 휘둘렀고, 비위 직원 퇴직 파장은 김진국 전무의 사퇴로 덮었다. 조 회장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늘 이런 식으로 피했다.

하지만, 박종우 문제의 책임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게 됐다. 조 회장은 국회에서 의원들의 질타에 마지못해 "책임질 일이 있다면 지겠다"라고 말했다. 물론 '박종우의 일을 다 해결하고 나서'라는 단서를 달았다.

어쨌든 박종우 세리머니를 '우발적인 해프닝'으로 몰아 다시 한 번 희생양을 만들려던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러니까 축협"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 싫다면, 한국 축구 행정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뒤로 빼지 말고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