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에도 보안이 필요하다? 일반인들이 들으면 ‘거짓말 말라’며 코웃음을 칠 소리다.
그러나 지금 프린터 전문가들은 프린터에 철통같은 보안을 갖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놓치기 아까운 국가기관 조달시장을 잡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프린터는 복사기, 스캐너, 팩스 기능에 더해 보안 기능까지 갖춘 팔방미인으로 거듭나게 됐다.
◆보안인증, 왜 필요한가
'보안무풍지대’였던 프린터업계가 갑자기 바빠졌다. 국가정보원이 최근 국가 및 공공기관에 복합기를 조달할 때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된 보안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방침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국정원은 11월 5일부터 디지털 복합기를 보안적합성 검증 대상으로 추가했다. 이 같은 조치는 디지털복합기에서 문서를 출력할 때마다 복합기 내 메모리에 자동 저장되는 중요문서가 기기를 폐기할 때 유출될 위험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
주로 이미지 파일로 저장되는 중요문서가 유출되는 사고를 막기 위해 위해 국가기관에 공급되는 제품에 한해 저장된 문서를 완벽하게 삭제할 수 있는 솔루션을 탑재하도록 했다.
디지털복합기는 복사기·프린터·스캔·팩스 등의 기능이 융합된 다기능 사무기기로, 최근 국가·공공기관 및 일반 기업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다.
국가·공공기관 등에 보급되는 디지털복합기는 기존 사무기기와 달리 ‘소형 컴퓨터’ 급 능력을 갖춘 것이 특징. 하드디스크(HDD)와 메모리를 내장해 두 가지 기능을 한 번에 처리하는가 하면, 출력한 문서의 정보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수 있어 업계에서는 소형 컴퓨터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하지만 출력된 문서가 하드디스크에 저장된다는 점 때문에 보안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일단 한 번 저장된 문서는 포맷 과정을 거치더라도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특수한 복구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완벽하게 복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기관을 중심으로 완벽한 포맷 솔루션을 갖춘 복합기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보안을 중시하는 국가기관으로서는 기기를 폐기할 때 남아 있던 정보가 유출될 경우엔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이번 인증이 완벽한 포맷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 위주로 진행되는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프린터 업체들, 보안 준비 '현재 진행중'
특정 제품의 보안 정도를 나타내는 국제적 제도로는 CC(국제공통평가)인증 제도가 있다. 국내 업체 중에는 HP와 신도리코가 CC인증을 받았다. HP의 경우는 본사 차원에서 이미 CC인증을 받았고, 신도리코는 일본 CC인증을 받았다.
이 인증의 경우 국제 인증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받았다 해도 국내에서도 그 효력이 인정된다.
단 CC인증은 제품별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외국에서 가, 나, 다 제품의 CC인증을 받았다 해도 국내에서 A, B, C 제품을 유통한다면 따로 인증을 받아야 한다. 국정원 방침이 발표된 이후부터 주요 프린터 업체들은 보안 적합성 인증 작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보안 적합성 인증 작업은 실제로 제품을 사용하는 국가 기관과 국정원 사이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제조업체가 직접 보안적합성 인증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각 업체는 이제부터 기업용 프린터 시장에서 보안이 중시되는 징조로 보고 보안 기능 강화에 나서고 있다.
한국HP는 복합기 모델 중 하드디스크를 내장한 모델 위주로 보안적합성 테스트를 위해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HP 관계자는 “확실하게 완료된 것은 아직 없지만 현재 작업 중이다”며 “프린팅 및 복사 내용을 저장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를 탑재한 제품에 한해 국정원 보안인증 기준을 맞춰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보안 적합성 검사의 전단계인 CC인증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보안적합 인증 절차를 아직 밟지는 않았다”며 “그러나 관련 솔루션은 이미 탑재하고 있는 상태로, 현재 CC인증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렉스마크는 인증 준비와 함께 지난 11월 판매 채널과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보안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렉스마크 관계자는 “하드디스크 인증시 암호에 관련된 내용이나, 출력 문서 삭제에 대해 국정원에서 내려온 보안 지침대로 교육을 진행했다”면서 “실제 판매를 담당하는 채널들에게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사기 업체들, "준비 다 됐어요"
그러나 프린터 업체들과는 달리, 몇 년 전부터 보안에 관한 기술력을 완비한 복사기 업체들은 11월 중 보안적합성 인증을 받고 조달시장 선점에 나섰다.
한국후지제록스는 복합기 하드디스크 데이터 보안관련 대책을 이미 마련해둔 상태.
한국후지제록스 관계자는 “그 동안 저장자료 삭제용 소프트웨어를 대상으로만 보안적합성 검증이 실시되어 왔고, HDD를 내장하고 있는 디지털 복합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다”며 “그러나 복합기 HDD 내 데이터의 암호화 및 데이터 삭제 등은 추후 제품 경쟁력을 위해 필수적 사항이라고 생각해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복합기 전 모델에서 일본 CC인증을 받은 신도리코 역시 후지제록스와 함께 첫 번째로 인증을 받는다.
신도리코 관계자는 “필요한 요건은 모두 갖춰져 있다”며 “내부에서는 이번 인증 절차가 일종의 ‘권장사항’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