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2월13일 프랑스 렌에서는 대 사건이 벌어졌다.
축구 명문 라싱클럽의 골게터 스테팡 스타니스가 아우브리클럽과 원정경기에서 혼자서 무려 16골을 상대 골문에 쏟아 부은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지만 스타니스의 기막힌 원맨쇼는 엄연히 축구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지구촌 최고의 스포츠 축구는 그 원시적 형태가 기원전 4세기경 중국의 추투라고 불린 대중적 운동에 원류를 둘만큼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1863년 10월26일 최초의 근대적인 축구 조직체인 잉글랜드축구협회(FA)가 발족된 이후 각종 기록들이 실재하는 역사성을 지니게 됐음은 물론이다.
얼추 100여년의 축구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도 일천하나마 프로축구가 24년의 연륜을 쌓고 있으며 내외에 자랑할 만한 그럴듯한 기록들도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16년만인 2000년 김도훈에 깨지기는 했지만 1984년 여름 황소 럭키금성(FC서울 전신)의 조영증이 수립한 6게임 연속골 기록은 으뜸가는 광채를 발한다.
1984년 7월22일 대우전에서 헤딩골을 신호로 시작된 득점 행진은 8월12일 국민은행전에서의 오른발 골로 대미를 장식할 때까지 프로 그라운드의 불볕더위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축구팬들은 한국 프로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본때 있게 장식한 경이로운 기록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득점 행진이 펼쳐지는 동안 84LA올림픽(7월29일~8월14일)이 열려 국내 매스컴은 온통 인류의 대제전인 올림픽 보도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스포츠라이트를 한껏 받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조영증의 기록은 16년간이나 수많은 골잡이들의 도전을 거뜬히 막아넨 대기록이었다.
이 기록이 새삼스럽게 회상되어야 할 까닭은 조영증이 본래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라는 출신 성분 탓일 것이다.
경기 파주초교 6학년 때 축구를 시작한 이래 수비라인은 늘 그의 고유 영역이었다. 그것도 최후방 스위퍼로서.
1975년~1981년 대표 팀에 소속된 동안 한국축구 사상 최고의 스위퍼라는 찬사를 받지 않았던가.
오죽 하면 축구인들은 한목소리로 "대표 팀은 차범근 허정무보다 조영증이 빠지는 게 더 큰 손실"이라고 합창을 했을까.
1981년 3월부터 3년간 북미축구리그(NASL)의 수비수중 최고 연봉 스타로 또 다른 명성을 날린 조영증이 1983년 12월 럭키금성 이적 후엔 득점포를 터뜨려야 했다.
신생팀으로 선수 수급에 어려움을 느낀 당시 박세학 감독이 조영증을 최전방에 변칙 기용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별명인 '히프'를 흔들며 골 사냥을 하던 조영증의 활약은 참 볼만했다.
황소 같은 뚝심과 넓은 시야, 폭발적인 슈팅, 정말 뛰어난 선수는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걸 실증한 것이다.
요즘 용어인 멀티플레이어에 딱 맞는 모습이다.
조영증의 득점 행진이 스톱한 것은 8월18일 유공과의 부산경기.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은 유공의 이장수는 조영증에게 90분간 단 한차례만 슈팅을 허용했다.
경기가 끝난 뒤 조영증은 막역한 후배인 이장수에게 "야 이친구야,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사람을 묶을 게 뭐야"라고 푸념을 하자 이장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라커룸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조이뉴스24 /김덕기(축구전문대기자)saong5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