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박정민 기자] 고성 이씨는 우리나라 명문(名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의 고성이씨가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선대와 족보 편찬 내력을 살펴보면 문자 그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문중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환골탈태란 '뼈를 바꾸고 태아를 빼앗는다'라는 의미이다. 좋게 생각하면 '낡은 것을 완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바꿔 완전히 다른 것이 됨'을 가리키는 사자성어지만 전통보학에 '조상의 뼈와 후손의 태를 바꾸었다'는 의미의 은어다.
고성 이씨 문중의 족보 편찬 내력에 관해서는 필자가 고성 이씨 문중의 주장에 의거해 정리한 바 있다. 아래 표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서는 '철성연방집'과 '철령초보'를 위주로 서술한다.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
고성 이씨 문중의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은 이륙(李陸)이 이강(李岡, 1333~1368)과 이원(李原, 1368~1430) 부자의 시를 엮어 간행한 문집이다. 즉, 실체가 있는 편저이다.
그러나 문중에서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에 수록된 '용헌자녀도(容軒子女圖)'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다. 더군다나 용헌자녀도는, 1476년 편찬된 '철성이씨족보지도(鐵城李氏族譜之圖)'와 1804년 본의 '철성이씨족보도(鐵城李氏族譜圖)'의 앞부분을 제외한 일부분의 명칭이다.
지난 회에서 다룬 1476년 '안동권씨세보' 초간보(일명 성화보)는 30년에 걸쳐 완성한, 15세기에 나온 세보로서는 방대한 세보이므로, 고성 이씨의 주장은 분명히 그들만의 과도한 주장으로 설득력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76년에 편찬한 철성연방집은 뒤이어 나온 김종직의 '이존록'과 더불어 15세기 말의 계보가 들어가 있는 귀중한 문집이다. 1476년에 편찬한 초판본은 현재 서울대힉교 규장각 소장본 한 책만이 확인되고 있다. 반면에 1804년 본은 1476년 본의 증보판이기는 하나 문화유산으로서 큰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固城李氏野老堂草譜)
표에 있는 ②철령초보의 복사물인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를 최근에 당홍(唐洪)의 홍영선 회장으로부터 입수했다. 복사물은 천자문 순으로 '결(結)' 장 뒷면에서부터 '장(場)' 장까지 들어있고, 그 뒤로는 밀양 박씨의 계보와 기타 기록이 들어 있다.
즉, 앞부분 37.5장이 낙장 되어 현전하는 고성이씨계보는 모두 98.5장이다. 원상태라면 고성이씨계보 부분만 136장이다. 이 초보는 정서본이 아니라 처음부터 기록한 초록(抄錄)이다.

이 복사물을 검토해 보면, 이 족보는 문중에서 주장하는 1580년에 편찬하는 옛 족보로 볼 수가 없다. 우선 '상(霜)' 장의 뒷면과 '생(生)' 장의 앞면에 "만력(萬曆) 갑진(甲辰)년 유월(六月)"이라는 기년이 적혀 있다, 만력 갑진이면 1604년이다. 또한 '빈(賓)' 장 앞면 하단 중앙부에 박증현(朴曾賢, 1575~?)이 문과 급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가 문과에 급제한 연도는 1605년 별시방이다. 그러므로 이 초보는 야로당 이순(李淳, 1530~1606)이 1605~1606년에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
기존에 주장한 1580년은 족보에 관심을 두고 자료를 모아 나가선 시점일 수는 있으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왜란이 있었던 것을 살펴보면, 왜란 시에 계보를 수집한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는 1597년에 편찬한 것으로 주장하는 '송암세보 사성강목(松巖世譜 四姓綱目)'보다 후에 편성한 책일 수도 있다. 고성이씨 문중에서 이 초보의 작성 연도를 1580년으로 올려 잡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연대가 언제이든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는 매우 중요한 옛 족보이다. 1605~1606년으로 연도를 바로 잡아도 그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 초보의 앞부분 37.5장은 고의로 훼손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변해가는 고성 이씨의 정체성에 초기의 족보가 걸림이 되기 때문에 앞부분을 떼어버린 것으로 유추된다.
고성 이씨의 진짜 족보는?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고성이씨족보' 초간보는 1753년 '고성이씨세보' 계유보 9권 9책이다.
이 족보에는 고성 이씨가 중국 한나라 시의 귀화인이라는 사대성이 들어간다. 계유보에 기록한 시조 이황(李璜)의 항목에서 한나라의 '한문제시 휘반 시문경후 이십사세손 휘황운아 현일불가고(漢文帝時 諱槃 諡文景后 二十四世孫 諱璜云而 玄遠不可攷)'라고 하며, 이황이 한나라 시기에 조선에 온 '이반(李槃)'의 24세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즉, 이를 풀이해 보면 한사군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할 때 들어온 귀화 성씨라는 주장이다.
1753년 계유보 이전의 고성 이씨 문헌에는 이반(李槃)의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조선시대 말로 추정되는 언제부터인가 고성 이씨의 전설적인 원조 이반이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철학자 노자(老子) 이이(李耳)의 후손이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선후기 고성이씨의 모화 정신에 친일파 성향의 이유립에 의해 나온 '환단고기'를 집어넣어 환골탈태한다. 즉, 토성(土姓)이 사대주의 성씨로 바뀌더니, 이유립의 환단고기를 통해 다시금 ‘환골탈태’한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고성 이씨의 정체성은 세 번이나 변했다. 첫 번째의 정체성, 즉 토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진정성에서 볼 때, 고성 이씨의 계보로 주목하여야 할 옛 족보는 1476년 철성연방집 초판본과 1605~6년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이다. 이 두 종의 계보가 고성 이씨의 위조가 없는 매우 소중한 진짜 족보이다.
여러 성씨의 경우 초간보나 재간보 등의 옛 족보가 현전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로는 조선 중기 이전에는 전란으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투탁(投託)한 수단자와 변화하는 기록을 은폐하기 위해 고의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족보를 새로 편찬하면 기존 족보는 용도가 없어져 함부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없어졌던 옛 족보가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하는 일도 잦다. 고성이씨 야로당 초보의 완전한 사본이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이양재 한국족보유산센터 대표는?
이양재 대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애서운동가이자 계보학자·회화사학자다. 1990년 한국애서가클럽 상임이사, 2000년 한국고전문화진흥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고서연맹 정회원, 고려미술연구소 대표, 한국족보학술위 상임위원장, 혜원신윤복기념사업회 상임고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애서운동가 백민 이양재의 옛 족보이야기', '고려불화와 돈황사경을 찾아서',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 '제주미래담론', '안견 재조명' 등이 있다.
/박정민 기자(pjm8318@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