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양찬희 기자] “명장면이 나오는 것은 반드시 이겨서가 아니잖아요.”
인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민호 변호사는 야구 이야기를 꺼냈다. 이기기 위해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경기가 끝나야 알 수 있다. 혼자 잘한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도, 초반에 지고 있다고 끝내 지는 것도 아니다.
김 변호사가 바라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경기 같은 삶이다. 승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과정과 감동이 남는 인생이다.
제11대 경기도의회 의원을 지낸 김 변호사는 지난 2일 아이뉴스24 경기취재본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법조인과 정치인으로 걸어온 과정, 그 안에서 배운 삶의 가치에 대해 밝혔다.
대구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소년은 할아버지의 권유로 고시를 생각했다. 군에서는 도움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는 지휘관을 만났고, 법률구조 현장에서는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의 사정을 들었다.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며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야구장과 합주 무대에서도 사람들을 만난다.
그 여러 경험을 돌아보며 김 변호사는 앞으로의 바람을 이렇게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은 꼭 되고 싶어요.”

◇ 외할머니 품에서 자란 소년…할아버지는 “고시를 봐야지”
1979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변호사에게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직장 때문에 먼저 부산으로 향했고 어머니가 뒤따랐다. 그동안 김 변호사는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부산으로 옮긴 뒤에도 방학이면 외할머니가 데리러 왔다. 방학은 다시 대구에서 보냈다.
학창 시절의 자신을 묻자 김 변호사는 “적당한 학생이었다”고 답했다. 공부도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중학생 무렵부터는 농구를 많이 했다. 함께 뛰던 친구들과는 각자 가정을 꾸리고 일하는 지금도 연락을 이어간다.
진로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친할아버지를 꼽았다.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오기를 바랐다. 아들들에게 품었던 기대는 손자에게 이어졌다. 김 변호사를 볼 때마다 고시 이야기를 꺼냈다.
“볼 때마다 ‘너는 나중에 꼭 고시를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살았는데 여기까지 왔네요.”
처음부터 법조인이라는 직업에 뚜렷한 사명감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공부를 잘하면 시험을 통해 관료나 전문직이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성공으로 여겼다고 했다. 김 변호사도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았다.
이후 부산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 군에서 만난 지휘관…“이런 사람 한 명이 잘되면 세상이 바뀌는구나”
군 복무는 김 변호사가 리더십과 나눔의 의미를 배우는 계기가 됐다.
육군 제201특공여단에서 병사로 복무하며 훈련과 파견 등 여러 경험을 했다. 그중 오래 남은 것은 당시 여단장의 모습이다.
김 변호사의 기억 속 여단장은 간부와 병사를 가리지 않고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사람이었다. 어려운 형편에서 도움을 받아 군인의 길을 걸었고,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 마음은 병사들의 주말에도 영향을 줬다.
여단장은 주말에 외박이나 면회 등 특별한 일정이 없는 병사들이 아동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하도록 했다. 병사들은 김치를 담그거나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부터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쉬는 날 불려 나가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하지만 몇 차례 다녀오자 마음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형, 다음 주에도 올 거야?’라고 물어봐요. 그러면 다음에는 아무 말 없이 가게 되더라고요. 할 일이 없어도 가서 같이 놀고 오는 거죠.”
봉사는 조금씩 기다려지는 일이 됐다. 김 변호사는 한 사람의 생각이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과정을 그곳에서 봤다고 했다.
“내가 도움받았으니 나도 베풀겠다고 하는 순간 밑에 있는 젊은 사람들도 변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 한 명이 잘되면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구나 싶었죠.”
그 경험은 이후 김 변호사가 리더십을 생각하는 기준이 됐다. 함께하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의 의견도 듣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지 않으며, 현장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 사람이 지도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 사법시험 2차, 네 번째 도전 끝 합격…“붙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겠다”
사법시험 준비에는 약 5년이 걸렸다. 1차 시험은 비교적 빨리 통과했지만 2차 시험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합격은 네 번째 도전에서 찾아왔다.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김 변호사는 스스로 기한을 정했다. 서른 무렵까지 합격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시험을 마친 뒤에는 취업 준비도 했다.
“어차피 내년부터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법조인이 되든, 회사에 가든 사회인이 될 거니까요.”
2009년 제5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도 기쁨과 함께 그 생각이 있었다. 시험을 계속할지 고민하던 시간을 지나 이제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힘들었던 수험생활을 돌아보면서는 뜻밖에도 잠깐씩 놀던 시간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공부하다 친구와 들른 오락실, 주말 저녁의 맥주 한 잔, PC방에서 하던 게임 한 판이 특별했다. 고된 공부 사이에 누리는 짧은 휴식은 달콤했다.
“평소에는 그냥 하던 것도 공부하다 잠깐 하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사소한 것이 다 재미있더라고요.”
사법연수원 41기를 수료한 뒤에는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일했다. 창원과 밀양, 의정부 등에서 근무하며 법률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법은 시험지 속 지식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 아이의 치료비와 농민의 한 해 농사…법률구조 현장에서 만난 삶
공단에 들어간 첫해, 김 변호사는 한 아동복지시설의 요청을 받아 아이를 만나러 갔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아이는 의료사고로 손에 장애가 남은 상태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친 손을 뒤로 숨겼다. 가정에서도 큰 상처를 겪고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김 변호사는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배상금을 받는 것만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아이가 성장한 뒤 필요한 수술을 받을 수 있는지, 배상금이 실제로 아이를 위해 쓰일 수 있는지도 살펴야 했다.
병원 측과 조정해 향후 수술에 필요한 치료비를 병원에 미리 지급하고, 나머지 위자료는 아이가 성인이 된 뒤 직접 받을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소송을 하면서도 이 돈이 아이를 위해 쓰일 수 있을지까지 생각해야 했어요. 사회에 나간 첫해였는데 참 마음이 아팠죠.”
밀양에서 출장소장으로 일할 때는 정전으로 시설재배 작물에 피해를 본 농민들을 만났다.
김 변호사의 설명에 따르면 농민들은 한 해 수입을 잃을 처지였지만 책임을 묻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전력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데 우려도 있었다.
사건을 맡기로 하고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여러 대학에 도움을 요청한 끝에 한 교수를 만났다. 실험실에서 변압기를 살펴보며 정전 원인과 관련한 설명을 들었고, 이를 토대로 소송을 준비했다.
결국 농민들이 배상받을 수 있었다고 김 변호사는 회고했다.
사건을 맡은 이유를 묻자 당시 농민들의 처지를 이야기했다.
“농사는 다 망쳤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도 모른 척하면 편하겠죠. 그런데 누군가는 울고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 “나쁜 짓을 하지 말자”…개업 뒤에도 지키려는 원칙
공단에서 약 6년간 일한 뒤에는 개업을 선택했다. 서른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더 늦으면 새로운 도전을 할 열정이 줄어들 것 같았다.
의정부에서 문을 연 법률사무소의 이름은 ‘의율’로 정했다. 지인들에게 여러 의견을 받아 고른 이름에는 바르게 법을 다루겠다는 뜻을 담았다.
변호사로서 지키려는 원칙을 묻자 김 변호사는 “나쁜 짓을 하지 말자”라고 답했다.
사건을 과장하거나 의뢰인에게 무리한 기대를 주지 않는 것도 김 변호사가 지키려는 원칙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라면 처음부터 어렵다고 설명하고, 소송을 권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설명과 의뢰인의 기대가 늘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형편을 고려해 비용을 나눠 받기로 했다가 제대로 받지 못한 일도 있었고, 충분히 도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불만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람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주변에서는 모두에게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처지를 쉽게 외면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저한테 찾아오는 분들은 힘들고 슬프니까 오는 거잖아요.”
김 변호사는 변호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의뢰인이 건넨 사실과 증거를 토대로 법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법조인에게 필요한 것은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자기가 공부하고 지켜온 법리를 중심으로 한 양심이 있어야 해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야죠.”
◇ 법정에서 의회로…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는 어려움
정치 참여는 처음부터 계획한 진로는 아니었다.
2021년 하반기 국민의힘에 입당해 활동하던 김 변호사는 이듬해 지방선거 출마를 제안받았다. 당시에는 당장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고 가족들도 걱정했다.
처음 치르는 선거에는 정해둔 방식도 없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마이크를 잡았다. 당선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고 뛰었다고 했다.

도의회에 들어간 뒤에는 법률가로 일할 때와 다른 어려움을 만났다. 같은 말에도 누군가는 찬성하고 누군가는 반대했다. 상대 정당뿐 아니라 같은 당 안에서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생각은 달랐다.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다 싫어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런 생각들을 조율하는 것이 굉장히 큰 과제였어요.”
예산결산특별위원장을 맡았던 시기는 특히 고됐다고 돌아봤다. 당시 경기도의회는 전체 156석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78석씩 나눠 가진 상황이었다. 예산 협상이 거듭 막히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한 채 경기도의회가 있는 수원에서 생활하는 날도 이어졌다.
김 변호사는 당시를 “하루하루가 고통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직책이 주는 무게는 밖에서 바라보던 것과 달랐다.

그 안에서도 오래 남는 순간은 있었다. 참전유공자 지원을 늘린 뒤 어르신들이 반가워하던 모습이다. 김 변호사는 금액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했다. 자신들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또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 데에는 법률구조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의 사정도 영향을 줬다. 가정폭력 사건을 맡으며 부모 사이의 문제에 함께 휩쓸리는 아이들을 봤다.
김 변호사는 교육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일을 줄이고 싶었다고 했다. 양주에서도 아이들이 충분한 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여건을 바꾸려 했다는 설명이다.
◇ “법은 필요 최소한이어야”…사람의 발목을 잡는 제도를 돌아보다
법조인으로 일하고 조례를 다루는 의원도 지냈지만 김 변호사는 법이 많아지는 것 자체를 성과로 보지 않는다.
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일상에서 법을 필요로 하는 일이 줄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꺼냈다. 법이 사람들의 생활을 돕기보다 오히려 가로막는 상황을 경계했다.
“필요 최소한으로 만들어야 하고, 적용도 필요 최소한으로 해야 해요.”
김 변호사가 예로 든 것은 법률구조 현장에서 접한 출생신고 문제였다. 친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친모의 인적 사항을 알 수 없어 신고에 어려움을 겪던 사례를 보며 제도의 빈틈을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서류의 빈칸 하나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상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수 있었다.
김 변호사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과 함께 기존 제도가 누구를 어렵게 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의 다리를 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없앨 것은 없애고 고칠 것은 고치는 것도 일이에요. 만드는 것만 일이 아니죠.”
정치에 대한 답도 그 생각과 연결됐다. 김 변호사는 정치를 “법이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힘든 사람에게 국가가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 다시 일어설 희망을 갖게 하는 일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설명이다.
◇ 다시 학생으로, 합주 무대로…법 밖의 세계를 배우다
김 변호사는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 법학만 공부한 자신에게 다른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 계기였다.
국제정치와 사회, 외교·안보 등을 혼자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변의 조언을 받아 대학원에 진학했다. 인터뷰 당시에는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으며, 논문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 주제는 베트남전 파병 당시 정부와 국회, 국민이 바라본 국익이다. 당시 국회 회의록 등을 살피며 파병을 둘러싼 판단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후에도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과제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 위안과 보람을 느끼죠.”
일과 공부 밖에서는 음악과 운동이 일상을 채운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던 김 변호사는 공단을 퇴사할 무렵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소리가 좋아 언젠가 직접 연주해보고 싶었던 악기다.
개업하면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미뤄뒀던 배움을 시작했다. 지금은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호흡을 맞추며 공연에도 참여한다.
복싱은 친분이 있던 홍수환 전 챔피언을 통해 시작했다. 체육관을 오가다가 운동을 접했고, 교육과 시험을 거쳐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복싱 실력을 묻자 김 변호사는 웃으며 “줄넘기만 하고 있다”고 답했다. 링 위에서 움직일 체력을 기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일상과 활동은 유튜브 채널 ‘우리민호’를 통해서도 전하고 있다. 도의원 시절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채널에는 지역 현안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복싱과 음악회 등 다양한 모습이 담긴다.
김 변호사는 시민들이 바쁜 일상에서도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영상을 주로 3분 이내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집에서는 두 아들과 시간을 보내려 한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수영과 스키를 가르쳤고, 해외에서는 둘째 아들과 스쿠버다이빙도 함께했다. 취미뿐 아니라 생존수영처럼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도 아버지로서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많이 없지만 ‘짧고 굵게 가자’고 생각했어요.”
◇ 혼자 잘 던져도 질 수 있는 경기…“그 사람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야구는 김 변호사가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해온 운동이다.
부산 사직구장 인근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친구들과 공을 주고받으며 놀았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인 야구를 했고, 사법연수원에서도 동기들과 팀을 꾸렸다.
당시 선발투수로 뛰며 사회인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그때 만든 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다만 자신의 역할은 달라졌다. 오랫동안 공을 던진 어깨가 아파 이제는 주로 1루를 맡는다. 한때 다승과 탈삼진 트로피를 받던 투수에게도 시간이 흘렀다.
김 변호사는 야구를 하며 자신의 성과를 바라보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공이 잘 들어가는 날에도 동료의 실책으로 질 수 있다. 반대로 몸이 무거운 날 타자들이 점수를 내주고 수비가 도와줘 이길 수도 있다.
자신이 잘했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안 된 날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부족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넘긴 날도 함께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혼자 아무리 잘해도 질 수 있고, 오늘은 잘 안되는데 다른 사람이 도와줘서 이길 수도 있어요. 인생과 똑같죠.”
김 변호사가 인생을 야구에 빗댄 것도 이런 경험에서 비롯됐다. 승리하기 위해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지만 마지막까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길도 하나로 정해두지는 않았다. 국회의원으로 입법 과정에 참여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고 학자로 공부를 이어가고 싶은 바람도 있다. 어느 자리든 자신이 필요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직책 대신 진심을 이야기했다.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 마음이 진심이었어. 그 사람이 한 말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어’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김 변호사는 인생에 특별한 대전환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다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사람들에게 배운 장면들이 남아 있다.
아이들과 놀아주러 가던 군 시절의 주말, 법률 지원을 기다리던 사람들, 함께 경기를 뛰던 동료들이다.
김 변호사는 아직 자신의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결과를 미리 알 수 없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다시 떠올릴 만한 명장면을 남기고 싶다.

“반전이 있고 감동이 있는 시합은 몇 년이 지나도 다시 나오잖아요. 내 인생도 그런 인생이 되고 싶은 거예요.”
/양주=양찬희 기자(cx53503@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