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설래온 기자] 소고기가 익는 불판 앞에서 '고기엔 소주'라는 공식이 깨졌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한우 한 점을 입에 넣고 소주 대신 와인잔을 들었다. 새콤한 산미가 기름진 맛을 씻어내고 은은한 꽃향기가 진한 육향을 감쌌다. 육회부터 생등심, 꽈리고추와 생양배추까지. 잔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익숙한 고깃집 음식이 전혀 다른 맛을 냈다. 와인이 양식에만 어울린다는 생각도 빗나갔다.

지난 29일 아영FBC가 마련한 '와식주' 행사에서 한우와 와인 5종을 함께 맛봤다. 식탁에는 육회와 모둠 소고기, 생등심, 부채살 등이 차례로 올랐다. 고기 옆에는 꽈리고추와 생양배추가 놓였다. 익숙한 한식 상차림에 와인잔이 더해지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본격적인 식사에 앞서 입술을 적신 것은 '뵈브 드 베르네 코리아 에디션'이었다. 잔을 기울이자 잘게 부서지는 기포가 혀끝을 간질였다. 입안에서 작은 거품들이 보글보글 춤을 추는 듯했다. 톡 쏘는 청량감 뒤로 부드러운 산미가 이어졌다. 알코올의 존재감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직 고기를 먹기도 전인데 군침이 돌았다.
곁에 놓인 구운 꽈리고추를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자 은은한 구운 향이 번졌다. 뒤이어 와인을 마시니 입안이 한결 개운해졌다. 생양배추의 아삭한 식감과 기포가 맞물리자 씹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별다른 양념이 없는 채소 두 가지가 와인잔을 자꾸 손에 들게 만들었다.


육회가 등장하자 잔도 바뀌었다. 뉴질랜드산 '오이스터베이 소비뇽블랑'이었다. 코끝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갓 베어낸 풀을 연상시키는 싱그러운 향이었다. 첫 모금부터 새콤한 맛이 또렷했다. 입안을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마치 이른 아침 풀밭에 선 듯한 인상을 남겼다.
육회와의 궁합은 기대 이상이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육회에 와인을 곁들이자 날고기 특유의 감칠맛이 더욱 또렷해졌다. 고기의 맛을 덮기보다 혀에 남은 기름기를 말끔히 걷어내는 쪽에 가까웠다.
불판 위에서 소고기가 익어갈 무렵 미국산 '캔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가 잔에 채워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시카고 자택에서 즐겨 마신 것으로 알려진 화이트와인이다. 소비뇽블랑의 날렵한 산미와 달리 한결 차분했다. 나무와 마른 잎을 연상시키는 향이 먼저 다가왔고, 혀를 부드럽게 감싸는 질감이 인상적이었다.


식탁이 무르익자 와인잔에는 붉은빛이 채워졌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과거 가성비 좋은 와인으로 소개해 화제를 모았던 '카멜로드 몬테레이 피노누아'였다. 가벼운 꽃향기에 달큰한 과일 맛이 더해졌다. 무겁지 않아 편하게 마실 수 있었고, 진한 육향 사이에서도 특유의 화사함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와인은 첫맛보다 끝맛이 인상적이었다. '캔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카베르네소비뇽'은 입안에 머금자 묵직한 맛이 느껴졌고, 목으로 넘긴 뒤에는 옅은 바닐라 향과 함께 혀끝을 살짝 얼얼하게 하는 화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묘하게 달라지는 뒷맛도 매력적이었다. 첫 모금의 강렬함보다 잔을 비운 뒤의 여운이 더 오래 남았다.
고기가 거의 사라진 불판에는 잘게 썬 깍두기로 만든 볶음밥이 채워졌다. 새콤한 깍두기와 고소한 밥이 어우러지자 익숙한 한국식 고깃집의 맛이 돌아왔다.
후식으로 나온 오미자 슬러시는 입안을 말끔히 정리했다. 차갑고 새콤한 얼음이 녹아내리자 오래 남아 있던 기름기와 와인의 잔향도 함께 씻겨 내려갔다.


같은 한우라도 어떤 와인을 곁들이느냐에 따라 매력이 달랐다. 육회에는 새콤한 화이트와인이, 잘 익은 소고기에는 부드러운 샤르도네와 진한 레드와인이 각기 다른 매력을 드러냈다. 평소 무심코 집어 먹던 꽈리고추와 생양배추조차 새롭게 다가왔다.
소주가 고깃집 식탁에서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소주 대신 와인잔을 들어도 충분히 즐거운 한 끼가 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다음번 고깃집에서는 늘 마시던 소주 대신 와인 한 잔이 먼저 떠오를 듯하다. 불판의 열기는 식고 잔도 비었지만, 뜻밖의 조합이 선사한 감흥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늘 같은 맛이라 여겼던 한우 한 점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세계가 숨어 있었다. 그 익숙한 맛의 경계를 허문 것은 다름 아닌 와인 한 잔이었다.
/설래온 기자(leonsig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