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그때나 지금이나 솔리다임이 효자 회사는 아니지만, 그때 인수를 안 했으면 어땠겠나."
SK그룹의 한 임원이 건넨 말이다. SK하이닉스가 2020년 미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낸드 사업을 인수한 일을 두고 나온 얘기다.
이 사업을 기반으로 출범한 솔리다임은 기업용 저장장치(SSD)를 주력으로 하는 SK하이닉스의 미국 손자회사다. 인수에는 약 12조원이 들어갔다. 기술과 생산시설, 고객사를 확보하는 동시에 경쟁사의 시장 확대를 견제하려는 선택이었다.
앞서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를 개발한 일본 도시바의 메모리 사업부(현 키옥시아) 인수전에 참여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인텔 낸드 사업 인수에는 90억달러(약 12조원)가 들어갔다.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SK하이닉스의 낸드 세계 2위 자리를 지탱하는 선택이 됐다.
올해 2분기 SK하이닉스의 낸드 출하량 점유율은 22%다. 솔리다임 몫인 9%포인트를 빼면 13%다. 중국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14%)에 밀려 3위가 된다. 솔리다임이 흔들리면 SK하이닉스도 타격을 받는다.
문제는 경쟁사들의 추격 속도다. 낸드는 휴대전화와 컴퓨터(PC), 데이터센터 등에 쓰이며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를 저장하는 반도체다. 중국 YMTC는 일본 키옥시아를 제치고 낸드 세계 3위에 오른 데 이어 267단 제품까지 양산하고 있다. 더 이상 값싼 제품만 쏟아내는 업체로 보기 어렵다.
자금 확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YMTC는 기업공개(IPO)로 330억위안(약 7조원)을 조달해 생산시설과 차세대 제품 개발에 투입할 계획이다. 일본 키옥시아도 미국예탁주식(ADS) 상장을 준비 중이다. 미국 반도체 기업 샌디스크와 일본 정부 지원을 전제로 2032년까지 약 5조엔(약 45조원)을 투자할 계획도 내놨다. 과거 반도체 강국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읽힌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지난 19일 경기 용인에서 열린 간담회를 마친 뒤 기자의 질문에 미국과 중국, 일본의 반도체 생태계 강화 움직임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지금보다 생태계를 훨씬 더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 지난 8월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중국의 규모와 속도, 기술력은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라고 했던 말도 떠오른다.
이런 가운데 SK하이닉스는 지난 23일 솔리다임의 IPO 검토를 중단했다. SK㈜부터 SK스퀘어→SK하이닉스→미국 중간지주회사 AI 컴퍼니→솔리다임으로 이어지는 5단계 지배구조가 논란이 됐다. 금융당국도 중복상장에 따른 주주가치 훼손을 지적했다. 기존 주주들이 반발하는 상황에서 상장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주들의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자회사를 따로 상장해 모회사 주주가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상장 중단으로 투자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SK하이닉스는 늘어나는 인공지능(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려면 솔리다임이 미국 내 신규 생산시설을 확보해야 밝혔다.
투자할 곳은 낸드만이 아니다.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내년 고대역폭메모리(HBM) 출하량 점유율에서 삼성전자(41%)가 SK하이닉스(39%)를 제치고 1위에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맞춤형 HBM과 차세대 D램 개발에도 자금이 필요하다. 국내 중장기 투자 구상만 1100조원이다.
SK하이닉스의 속사정이 복잡할 법하다. 이 회사는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이 2012년 인수한 뒤 빠르게 성장했지만 불황의 기억도 생생하다. 2019년 반도체 업황이 꺾였고 2023년에는 영업손실이 7조7000억원을 넘었다. 최 회장과 경영진이 지금의 호황을 마냥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언제 다시 불황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투자 판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해외에서는 인텔의 모빌아이와 일본 소프트뱅크의 영국 반도체 기업 암(Arm)처럼 인수 기업을 따로 상장한 사례가 있다. 홍콩거래소도 모회사 상장 후 자회사 분리상장 제한기간을 3년에서 1년으로 줄이는 방안을 제안했다. 솔리다임과 지배구조는 다르지만 해외에서는 기업의 자금조달을 위한 제도 개선도 논의되고 있다.
지금의 주주가치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투자 시기를 놓친 손실도 결국 주주에게 돌아간다. 금융당국과 산업당국, 기업과 주주가 함께 고민할 문제다.
6년 전 인텔 사업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낸드 2위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앞으로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도 지금의 투자 판단에 달려 있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