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국제 연구팀이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1952년을 제안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인간 활동과 지구 환경의 여러 지표가 급격히 변화한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기와 맞물린다는 거다.
인간은 지구를 얼마나 바꿔 놓았을까.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연구자가 참여한 국제 연구팀이 인간 활동으로 지구 환경이 급격히 달라진 ‘인류세(Anthropocene)’의 의미와 시작점에 대한 공통 기준을 제안했다. 1952년을 기준으로 이전의 비교적 안정적 지구 환경과 이후의 급격한 변화를 구분해 환경 위기의 규모와 속도를 더 정확히 이해하자는 것이다.
인류세는 인간의 집합적 활동이 지구에 지우기 힘든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이것이 층서학적 증거가 돼 ‘하나의 지질시대’를 구성한다는 개념이다. 신생대 제4기 내의 새로운 지질시대로서 2000년대 초 대기과학자 파울 크뤼천이 제안했는데 자연과학 영역을 넘어 여러 다른 분야로 확산됐다.

대가속(Great Acceleration)은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 사회와 지구 시스템의 변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각종 지표가 급격한 우상향 곡선을 나타내는 현상을 일컫는다. 인구, 도시화, 에너지 사용, 산업 생산, 교통 등 사회경제 시스템에서의 변화와 이산화탄소 농도, 해양 산성화, 생물다양성 감소 등 지구 시스템적 변화가 모두 비슷한 패턴으로 나타난다.
KAIST(총장 배충식)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범순 석좌교수(인류세연구센터장)가 국제 연구팀과 함께 인류세의 정의와 앞으로 연구·활용 방향을 제안한 논문을 16일 발표했다.
인류세는 인간 활동이 기후와 생태계 등 지구 환경 전반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교육, 예술 등으로 확산됐는데 그 의미와 시작점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이 이어져 왔다.
인류세를 공식 지질시대로 인정하자는 제안은 2024년 승인되지 않았다. 인간이 지구 환경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는 개념으로는 여러 학문과 사회 분야에서 계속 활용되고 있다. 이번 논문은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세의 의미를 일관되게 정리하고 분야를 넘어 활용할 수 있는 연구 방향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인류세를 단순히 ‘인간이 환경에 영향을 미친 시기’로 넓게 설명하면 최근의 급격한 지구 변화가 과거의 영향과 어떻게 다른지 드러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환경을 바꿔 왔는데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그 영향이 지구 전체의 안정성을 흔들 만큼 커졌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교 대상은 약 1만2000년 동안 이어진 ‘홀로세(Holocene)’다. 마지막 빙하기 이후 시작된 홀로세의 비교적 안정적 기후와 환경 속에서 인류는 농업과 도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연구팀은 이러한 안정성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를 구분해야 오늘날 지구 환경이 얼마나 빠르고 크게 달라지고 있는지 더 명확히 평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인류세의 시작점으로 1952년을 제안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인간 활동과 지구 환경의 여러 지표가 급격히 변화한 ‘대가속’ 시기와 맞물린다.
이처럼 시작점과 의미를 명확히 하면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와 정책 담당자가 같은 기준으로 지구 환경의 변화를 비교하고 논의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인류세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연결하고 환경정책과 국제법, 교육 등에서 환경 위기에 대한 이해와 대응을 돕는 공통 언어로 활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범순 교수는 “인류세는 인간이 지구를 얼마나 빠르고 크게 바꾸고 있는지 이해하는 공통 언어”라며 “그 의미와 기준을 명확히 하면 지구 환경의 변화를 더 정확히 비교하고, 대응 방향도 함께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논문이 과학과 정책, 교육,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연결해 환경 위기에 함께 대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번 논문에는 인류세실무단(Anthropocene Working Group) 공동단장인 영국 레스터대학교 얀 잘라시에비치(Jan Zalasiewicz) 교수, 미국 노터데임대 줄리아 애드니 토머스(Julia Adeney Thomas)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지구인류학연구소 위르겐 렌(Jürgen Renn) 교수 등 여러 분야의 국제학자들이 참여했다.
관련 논문(논문명: Future directions for Anthropocene research and its applications)은 국제 학술지 ‘네이처 리뷰스 지구·환경(Nature Reviews Earth & Environment)’의 ‘인류세 논쟁(The Anthropocene debate)’ 특집에 포함돼 2026년 9월 8일 공개됐다. 이 특집은 인류세의 정의와 공식 지질시대 인정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학술적 입장을 다룬다.
한편 박범순 교수는 2018년 인류세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출판과 번역, 강연, 전시 자문, 학술대회 등을 통해 인류세 연구와 사회적 논의를 이어왔다.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