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윤 기자] 충남 천안의 대표 특산물인 배가 기록적인 폭염에 신음하고 있다. 수확을 앞둔 배가 갈라지고 멀쩡해 보이던 과실마저 저장 과정에서 물러지는 피해가 잇따르면서다. 피해 농가만 7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수출길마저 좁아진 가운데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하고도 보상받지 못하는 농가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15일 천안배원예농협에 따르면 천안지역 배 재배 농가 700여 곳에서 폭염 등 이상기후에 따른 열과(과실 갈라짐)와 무름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수확 후 확인된 과실 피해율만 30% 이상으로 추정된다. 저장 과정에서 추가로 발생할 수 있는 무름 피해까지 고려하면 실제 손실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커질 수 있다는 게 농협 측 설명이다.
문제는 해마다 반복되는 이상기후다. 천안지역에서는 최근 수년간 7~9월 사이 낮 최고기온이 33도를 웃도는 폭염이 20일 넘게 이어지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고온에 노출된 배의 표면이 갈라지거나 과육이 물러지는 피해가 발생하면서 농가들은 수확철마다 상품성 하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피해는 수확 현장에 그치지 않는다. 겉으로는 정상적인 배처럼 보이더라도 저장 중 과육이 물러지면 상품 가치를 잃는다. 선별 당시 발견하지 못한 품질 문제가 유통 과정에서 드러날 경우 교환과 환불 등 추가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 올해 추석 성수기에는 출하된 천안배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해 교환과 환불을 요구받는 사례까지 확인됐다. 농가 입장에서는 수확과 선별, 포장, 유통에 들어간 비용을 부담하고도 판매 대금을 온전히 건지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수출시장에도 비상이 걸렸다. 천안배의 평균 수출 합격률은 평년 66%에서 올해 50%로 16%포인트 떨어졌다. 수출용으로 선별한 배 10개 중 5개만 기준을 통과한 셈이다. 내수시장 출하 물량 역시 평년보다 10~20% 줄어든 것으로 파악됐다.
천안배원예농협은 특히 장기간 저장하거나 해외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무름 피해가 추가로 발생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수출 선별 단계에서 정상 판정을 받더라도 운송 과정에서 품질이 떨어질 경우 농가와 수출업체 모두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조차 쉽지 않은 실정이다. 기존 피해조사는 수확기에 배를 감싼 봉지를 벗겨 과실 상태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일부 농가는 봉지를 제거할 경우 상품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조사에 응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실제 피해 규모가 조사 결과보다 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수확 이후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름 피해는 기존 조사 방식만으로 파악하기 어려워 전면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는 게 농협 측 입장이다.
농가들의 불만은 농작물재해보험 제도로도 향하고 있다. 보험료를 내고 폭염 피해에 대비했지만 정작 발생한 피해는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천안배원예농협에 따르면 조합원 약 250명이 폭염에 따른 일소(강한 햇볕에 과실이 손상되는 현상) 피해 특약에 가입했다. 그러나 보험사 측은 배가 갈라지는 열과 피해가 약관상 일소 피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해당 피해에 대한 보험금 지급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농협 측 설명이다.
농가들은 이상기후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했는데도 실제 폭염으로 발생한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보험료는 보험료대로 부담하고 피해는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천안배원예농협은 이번 사태가 특정 농가의 재배 관리 문제가 아니라 이상기후로 발생한 광범위한 농업재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천안시에 피해 실태 전면 재조사와 긴급 경영안정 지원을 요청했다.
천안성환배축제 취소에 따른 예산을 피해 농가 지원에 활용하고 약 3억5000만원 규모의 병해충 방제약제를 무상 지원하는 방안도 건의했다. 당장 피해를 본 농가의 경영 부담을 덜어주는 동시에 추가적인 생산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다.
근본적인 대책으로는 농작물재해보험의 보장 범위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폭염 등 이상기후로 발생하는 열과와 무름 피해를 보험 약관에 반영하고, 새로운 보험상품을 출시하기 전 농가와 농협, NH농협손해보험, 농림축산식품부가 참여하는 토론회를 열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유영오 천안배원예농협 조합장은 “이번 피해는 재배 관리 소홀보다 폭염 등 반복되는 이상기후에 따른 농업재해”라며 “겉으로 드러난 열과뿐 아니라 저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름 피해까지 정확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에 가입하고도 약관 때문에 보상받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개선하고, 지자체와 정부가 피해 농가의 경영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기후가 해마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천안 배 농가들은 당장의 피해 보상뿐 아니라 앞으로 닥칠 폭염에도 대비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수확의 기쁨을 누려야 할 가을, 농가들은 갈라진 배와 줄어든 출하 물량 앞에서 또 한 번 힘겨운 수확철을 보내고 있다.
/천안=정종윤 기자(jy0070@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