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반도체 기술 지키려면 '사람'부터 붙잡아야

[기자수첩] 반도체 기술 지키려면 '사람'부터 붙잡아야

[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예전에는 파일을 들고 나갔다면, 이제는 머리에 있는 것, 외운 것을 가지고 나간다."

얼마 전 반도체 기술유출 문제를 취재하면서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들은 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보안이 촘촘해지면서 자료를 통째로 빼내기는 어려워졌지만, 수년간 현장에서 익힌 공정 조건과 노하우까지 막기는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기자수첩 [사진=아이뉴스24 DB]

최근 중국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를 둘러싼 수사와 재판은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검찰 수사에서는 삼성전자 연구원이 D램 제조에 필요한 600여개 공정 정보를 노트에 손으로 옮겨 적었고, CXMT가 이를 중국 생산환경에 맞게 수정·검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전자 출신 개발 인력도 잇달아 CXMT로 옮겼다.

반도체 기술은 공정표에 적힌 숫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같은 장비와 공정 조건을 갖춰도 원하는 수율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공정부터 살펴봐야 하는지, 온도나 압력 같은 조건을 어느 정도 조정해야 하는지는 실제 양산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친 사람만이 아는 영역이다.

설계도와 공정표가 기술의 뼈대라면 숙련된 엔지니어의 경험은 그 기술을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근육에 가깝다. CXMT가 공정 정보뿐 아니라 양산 경험을 보유한 인력을 확보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중국 낸드 업체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의 기업공개(IPO) 자료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중국법인 출신이 핵심기술인력으로 확인됐다. 이직 자체를 기술유출로 볼 수는 없다.

개인에게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고, 경력을 인정받아 더 나은 조건의 회사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마이크론과 엔비디아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도 국내에서 신입·경력 인력을 찾고 있다. 한국 반도체 인력의 경험을 원하는 곳은 중국 기업만이 아니다.

문제는 이를 막을 뚜렷한 한 가지 해법이 없다는 데 있다. 보안을 강화한다고 사람의 기억까지 통제할 수 없고, 전직 금지 약정으로 개인의 이직을 무기한 막을 수도 없다. 자율적인 인력 이동과 기술유출 범죄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취재 과정에서는 다른 방향의 얘기도 나왔다. 숙련 인력이 국내 기업에서 조금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정년이나 임금피크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 핵심 기술을 가진 인력의 역할과 처우를 달리하거나, 퇴직 이후에도 경험을 전수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취지다. 이것만으로 기술유출을 막을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기술유출은 보안과 처벌, 전직 관리, 인력 처우가 함께 얽힌 문제다. 어느 하나만 강화한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해외 업체들이 한국 엔지니어의 10년, 20년 경험에 높은 값을 매기고 있다면 국내 기업도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우리는 그 경험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이 국내 산업에 더 오래 남아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있는가.

이제 지켜야 할 반도체 기술은 서버와 문서 안에만 있지 않다. 사람의 머릿속에 축적된 경험을 어떻게 보호하고 활용할 것인지까지 고민해야 할 때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