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24] 구경은 공짜가 아니다

[크립토24] 구경은 공짜가 아니다

이정훈 (주)핑거 전무

이정훈 (주)핑거 전무

미국 39개 주 은행협회가 '함께 지을 땅'을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새벽 이른 시간, 여의도 사무실에 불을 켜는 사람은 대개 기관사다. 필자 역시 커피를 내려놓고 밤사이 들어온 해외 기사를 훑는 것이 몇 년째 습관이다. 그런데 지난주 화요일 새벽에는 컵을 손에 든 채 한참을 멈춰 있었다.

미국 39개 주(州) 은행협회가 '뱅크체인 얼라이언스(BankChain Alliance)'​라는 이름으로 뭉쳐 은행업계가 직접 소유하고 설계하며 운영까지 맡는 공동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목표 가동 시점은 2027년. 스마트 결제와 토큰화 예금, 은행 발행 스테이블코인을 이 네트워크에 올릴 계획이다.

필자를 멈춰 세운 것은 '블록체인'이 아니라 소유·설계·거버넌스라는 세 단어였다. 지난 10년간 은행들은 블록체인을 검토하고 파일럿을 돌렸지만 상당수는 보고서로 끝났다. 이번에는 다르다. 남이 만든 레일을 빌려 쓰는 대신 은행들이 레일 자체를 공동 소유하겠다는 것이다. 지분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규격을 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뜻이다.

같은 주 미국에서는 베터 모기지(Better Mortgage)​가 코인베이스의 수탁 인프라를 활용해 비트코인을 담보로 하는 대출 상품의 정식 접수를 시작했고, 갤럭시원(GalaxyOne)​은 비트코인·이더리움·솔라나를 담보로 개인용 회전한도대출을 내놓았다.

혁명이라고 부를 일은 아니다. 기존 금융에 디지털자산을 집어넣는 '편입'에 가깝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편입이다. 담보 평가 방법과 담보인정비율(LTV) 산정 기준, 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 시점, 수탁기관의 책임 범위가 하나씩 문서화되면 그것이 규격이 된다. 먼저 시장을 연 나라가 표준의 초안을 만들고, 뒤늦게 들어오는 나라는 그것을 번역해 쓸 가능성이 커진다.

일본에서도 미쓰비시UFJ금융그룹(MUFG)·스미토모미쓰이금융그룹(SMFG)·미즈호금융그룹 등 3대 금융그룹이 공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은행이 각자 코인을 찍는 대신 하나의 플랫폼 위에서 함께 발행하는 구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정부는 지난 7월 발표한 '2026년 경제성장전략'에서 하반기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발행 인가제와 준비자산 의무, 상환청구권, 공시체계 등 필요한 안전장치도 논의되고 있다. 방향은 맞다. 문제는 속도와 순서다.

완벽한 설계를 기다리다 보면 결론은 늦어진다. 큰 틀의 법을 먼저 세우고 자본금이나 지분 구조 등 세부 사항은 시행령과 감독규정에서 다듬을 수 있다. 규제 샌드박스에서 토큰화 예금 등의 파일럿을 돌리면서 법을 함께 정교하게 만드는 병행 전략도 필요하다. 모든 위험을 제거한 뒤 문을 열겠다고 하면, 정작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남의 가구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국내 은행도 움직이고 있다. 하나금융은 지방·외국계·저축은행들과 컨소시엄 진용을 갖췄고, KB국민은행은 관련 상표권을 출원했으며, 신한은행은 한일 송금 프로젝트로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서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미국은 39개 협회가 '함께 지을 땅'을 논의하는데 우리는 '누가 먼저 깃발을 꽂느냐'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지금의 합종연횡이 공동 인프라 설계보다 지분 경쟁에 머문다면 서로 호환되지 않는 원장을 가진 컨소시엄이 난립할 수 있다.

그 부담은 결국 이용자에게 돌아간다. 은행마다 다른 코인을 쓰고 가맹점마다 다른 지갑을 깔게 된 뒤에야 '상호운용성 확보를 위한 범금융권 태스크포스'를 만들 수도 있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에서 이미 비슷한 경험을 했다.

디지털자산 담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 금융회사가 디지털자산의 담보 평가와 대출 기준을 만들기 시작한 동안 국내 금융회사의 활용은 제도적으로 제한돼 있다. 앞으로 디지털자산이 개인의 자산 포트폴리오에서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한다면 누가 먼저 담보 평가 규격을 만들어 놓았는지가 중요해진다.

물론 미국의 계획도 아직 계획이다. 기술 파트너 선정부터 규제 정합성, 실제 은행 참여와 비용 절감 효과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러나 될지 안 될지 지켜보자는 태도는 가장 안전해 보이지만 때로는 가장 비싼 선택이다. 늦게 들어가는 쪽은 남이 정한 규격에 자신의 시스템을 뜯어 맞추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2027년 어느 날 미국 은행들이 자신들이 만든 네트워크의 스위치를 올릴 것이다. 그날 우리는 무엇을 켜고 있을 것인가.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일까, 서로 연결되지 않는 서너 개의 원장일까, 아니면 늦었지만 함께 짓기로 한 하나의 땅일까.

새벽 커피가 다 식었다. 식은 것이 커피뿐이기를 바란다.

/장효진 기자(js62@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