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창재 기자] 빠르게 달리는 세상에서 한 화가는 자꾸 지붕을 올려다봤다.
기와지붕 아래 사람들이 살았고, 장독이 놓였고, 빨래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곳에는 지금보다 가난했지만 조금은 느렸던 삶이 있었다.

대구 출신 김정호 작가가 5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 ‘잃어버린 시간’을 화폭 위에 펼쳐놓는다.
김정호 초대전이 지난 1일 대구 돌담갤러리카페(관장 하종국)에서 개막해 오는 10월 31일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개인전을 넘어 김 작가에게는 반세기를 건너 돌아온 귀향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김 작가는 54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를 떠났다. 이후 서울과 대전, 논산 등에서 터전을 잡고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그리고 54년이 지나 다시 고향 대구에서 자신의 작품을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그가 고향에 들고 돌아온 것은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오래된 ‘지붕’이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붕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지붕 시리즈’를 만날 수 있다.
북촌 언덕에서 내려다본 한옥 지붕의 풍경을 비롯해 기와와 장독, 지붕 아래 이어지는 사람들의 생활과 자연풍경 등이 화폭에 등장한다.

김 작가에게 지붕은 건축물의 일부가 아니다.
그 아래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쌓인 삶의 공간이자, 빠르게 사라져가는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는 매개체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기 전 지금보다 삶의 속도가 느렸던 시절, 사람들은 지붕 아래에서 가족을 이루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갔다.
김 작가는 그 시간을 오늘의 화폭으로 다시 불러낸다.
그는 “빠른 현대인들을 저의 작품 앞에 세우고 싶었다”며 “그들의 마음에 잠깐이나마 쉼표를 주고 싶었다”고 작품에 담긴 뜻을 설명했다.
김 작가와 ‘지붕’의 인연은 오래됐다.
1990년대 그의 그림에서 주인공은 지붕이었다. 2000년대 들어 불상이나 고미술품 등으로 소재를 확장하면서 한동안 지붕에서 멀어졌지만 2020년 무렵 다시 지붕을 소환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지붕은 과거와 같지 않았다.
2020년대의 ‘지붕 시리즈’에는 이전보다 높은 화면의 밀도와 함께 빨래와 장독 같은 생활의 흔적이 더욱 적극적으로 들어왔다.
오방색으로 화면을 다채롭게 풀어내거나 사계절 변화 속 지붕을 표현하면서 과거의 풍경을 그대로 복원하기보다는 기억 속 정서를 작가 자신의 조형언어로 다시 구성했다.
지붕과 함께 자연풍경도 그의 화폭을 채운다.
당장 위의 담장이나 능소화, 고목 위의 이끼에서부터 지붕 아래 펼쳐진 산과 들판까지 자연과 인간의 흔적이 함께 등장한다.
산이나 들판 속 집, 바다 위의 배 역시 결국 인간의 존재를 암시한다.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결국 김정호가 그리고 있는 것은 ‘사람이 살아온 시간’인 셈이다.

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구상과 추상의 중간쯤”이라고 설명한다.
정서적으로는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표현 방식에서는 현대적인 미감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지붕은 실제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기록화도 아니고, 완전히 기억에만 의존한 추상도 아니다.
기와의 반복적인 선과 지붕의 배치에는 구상성이 살아 있고 화면 전체에서는 추상적인 리듬과 조형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김 작가는 “인간미가 살아있는 시절에 대한 향수를 표현했다”며 “각박한 세상이지만 정과 여유를 회복하자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그의 작품세계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속도와 경쟁에 떠밀려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자고 말을 건네는 것에 가깝다.

54년 만의 고향 전시를 가능하게 한 데는 인연도 있었다.
김 작가는 돌담갤러리 하종국 관장의 초청으로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됐다며 오랜만의 고향 전시에 대한 반가움을 전했다.
그는 “반세기 만에 고향에서 귀향전을 갖게 돼 감개무량하다”며 “이 전시가 저에게는 새로운 예술세계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고 관람객들에게 쉼 같은 자리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50여점의 작품을 통해 반세기가 넘는 세월 끝에 고향 관람객과 다시 만나는 김정호 작가.
54년 만에 돌아온 화가의 지붕 아래에는 그가 떠났던 고향과 그동안 우리가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잊고 있었던 삶의 시간이 함께 놓여 있다.
/대구=이창재 기자(lcj123@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