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홍성효 기자] “자본은 환원했다가 다시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어도 한 번 끊긴 생산 생태계와 숙련은 되사오기 어렵다.”

다음 달 9일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를 앞두고 의결권자문사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가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단순한 주주 간 지분 경쟁이 아닌 국가기간산업의 지속가능성과 경제안보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류 대표는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미국이 버린 교과서, 우리는 왜 주워서 외우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소개하며, 단기적인 재무성과를 중시하는 자본 논리가 장기적인 산업 투자와 혁신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기업의 투자 의사결정에 사용되는 NPV(순현재가치), IRR(내부수익률), 투자회수기간 등의 지표다. 이들 지표는 미래 현금흐름을 추정해 투자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인 만큼,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신사업이나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한 혁신 사업에는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류 대표는 혁신경영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논의를 인용해 재무적 성과가 경영의 최우선 기준이 될 경우 기업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투자보다 비용 절감과 기존 사업의 효율 개선에 집중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도 적용했다.
류 대표는 세계 최대 비철금속 제련기업인 고려아연의 경영권 다툼을 두고 미국 러스트벨트와 영국 미들랜즈의 제조업 쇠퇴 사례를 언급하며, 금융 논리가 산업 논리를 앞설 경우 장기적인 설비·기술·인력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련업은 단기간에 경쟁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산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류 대표는 “제련소는 대형마트와 또 다르다”며 “제련업의 경쟁력은 토지와 건물이 아니라 안정적인 조업, 축적된 공정기술, 숙련인력, 원료 조달과 판매망의 결합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어 고려아연의 전략적 가치도 강조했다. 고려아연은 국내 유일의 안티모니 생산기업으로, 중국의 수출통제가 강화되면서 안티모니가 방산과 반도체 등 핵심 산업의 공급망에서 갖는 중요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다만 류 대표는 현 경영진의 지배권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오너 경영의 문제점과 경영진의 책임에 대해서는 엄격한 견제가 필요하지만,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국가기간산업의 장기 투자능력 보호는 별개의 문제라는 설명이다.
그는 “경영진의 책임성과 산업기반의 지속가능성은 양자택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류 대표가 제시한 핵심 화두는 ‘5년의 시계, 30년의 산업’이다.
부채 활용과 자산 매각, 배당, 재매각 등은 사모펀드가 활용할 수 있는 정당한 금융기법이지만, 대규모 장치산업과 결합할 경우 문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회수기간이 짧은 자본의 수익구조가 설비 보전과 증설, 환경·안전 투자, 인적 투자, 기술 축적보다 우선될 경우 산업 경쟁력 자체가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류 대표는 홈플러스 사례도 언급했다. MBK가 2015년 기존 차입을 포함해 약 7조2000억원 규모로 홈플러스를 인수한 이후 점포 매각과 재임대를 이어갔고, 홈플러스는 2025년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다만 그는 고려아연과 홈플러스가 같은 산업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제련업은 장기간 축적된 기술과 인력, 공급망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만큼 자본의 회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류 대표는 전략산업 기업의 지배권이 이동할 경우 경제안보 측면에서 이를 평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를 사례로 들면서도, 외국인 투자를 대상으로 하는 CFIUS를 고려아연 사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대신 국내외 자본을 구분하지 않고 국가핵심기술과 전략광물, 핵심 공급망을 보유한 기업의 지배권이 일정 수준 이상 이동할 경우 경제안보 영향평가를 실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독립적인 심사기구와 명확하고 공개된 판단 기준 등 안전장치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류 대표는 장기 산업투자를 뒷받침할 자본의 역할로 국민연금도 꼽았다.
국민연금은 고려아연의 주요 주주인 동시에 MBK 등 사모펀드에 출자한 기관투자가이기도 하다. 류 대표는 국민연금이 사모펀드의 출자자로서는 운용사의 투자와 회수 방식에 장기 산업의 관점을 요구하고, 고려아연 주주로서는 기존 경영진과 인수자 모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의 노후자금은 본래 가장 긴 시계를 가진 돈”이라며 “그 돈이 가장 긴 시계로 투자하게 만드는 것이 책임투자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단순히 누가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느냐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국가 핵심 공급망을 유지할 수 있는지, 기술과 인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 장기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구조를 갖출 수 있는지를 함께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 류 대표의 주장이다.
류 대표는 “자본은 국경을 넘지만 설비와 기술인력, 공급망이 빚어내는 산업역량은 쉽게 옮겨지지 않는다”며 “미국과 영국이 너무 늦게 깨달은 사실을 우리가 같은 경로를 따라 동일한 비용을 치르고 배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홍성효 기자(shhong0820@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