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지난 16일 방송된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광복절 기획 1부 ‘매국노 이완용의 선택’(연출 이지희)은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굴리며 자신을 위한 선택만을 하다 민족의 반역자로 낙인 찍힌 이완용의 삶을 추적했다. 필자는 이날 방송을 좀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램에서 방송 내용을 위주로 살펴보면서 역사적 사실들과 개인적 생각을 보강했다.
대한제국이 열강의 각축장이 된 시대에 살았고, 과거 급제까지 한 지식인이라면 민족과 공동체를 위한 선택도 해야 하는데, 이완용은 시대의 강자를 좇으며 끊임없이 변신하면서 죽을 때까지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처신으로 민족을 배신했다.

이완용은 친일파지만 원래는 친미파였다. 일본말을 하지 못하는 친일파였다. tvN 사극 ‘미스터션샤인’에서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한테 “언제 제국말을 공부할 거냐”고 혼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삶의 궤적은 미국파→러시아파(미국파와 러시아파를 동시에 한 적도 있음)→친일매국노로 살았다. 뒤늦게 친일파가 되었어도 줄을 잘 잡았고, 그들이 원하는 답을 잘 내놓아, 가장 권력이 강한 친일 매국노가 될 수 있었다.
이완용은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부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에서 가난한 양반집안인 이호석의 차남으로 태어나, 9살 때 이호준 집안에 양자로 간다. 양부 이호준은 친부 이호석과 32촌간이며, 이호준은 흥선대원군과 사돈이자 친구다.
이완용은 25살때인 188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시강원에서 세자시절의 순종을 가르쳤다. 이후 이완용은 헐버트 등 서양 선교사 등이 선생으로 있던 최초의 관립영어학교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완용은 조선 학생중에서는 영어를 가장 잘해 갑자기 외교관을 자주 접해야 하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완용은 우수한 영어 실력을 기반으로 출세가도를 달린다. 1887.11~1888.5 초대 대한제국 주미공사 참찬관, 1888.5~1890.10 주미대리공사 등 3년 가까이 미국에 머물며 미국이 서구 열강의 강대국이 되는 걸 봤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세의 냉혹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이완용은 1895년 10월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 등 일본 군대와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너무 쉽게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완용은 양어머니가 민씨(명성황후) 척족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타이완과 랴오뚱 반도를 차지하게 됐지만 이내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라오뚱 반도를 청에 반환해야 했다. 일본이 삼국간섭에 굴복하자, 조선은 김홍집 등 친일파 내각을 없애고, 이범진, 이완용 등으로 친러내각을 구성했다. 일본은 이 상황을 뒤집으려고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러파를 축출한 후 다시 김홍집 친일 내각을 조직하였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미국공사관 등 각국 외교관들에 피신 문의를 했지만 러시아만이 이를 수락했다. 1896년 2월에는 두 개의 가마 행렬로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윤용선을 총리로 하는 친러내각이 구성되었다. 38세인 이완용은 아관파천때도 고종을 잘 모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정권은 친미, 친러파가 장악하고, 각국 외교관이 모여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동파(개화파)가 주축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일본과 맞섰다. 1896년 7월에는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독립협회가 만들어진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초대 위원장이자 발기인이며, 독립문 건립을 위해 큰 액수인 기부금 백원을 낸 사람이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에서 이완용을 “대한제국에 몇 명 없는 재상”이라며 유능한 관료로 평가했다. 심지어 독립문 현판 글씨가 이완용의 필체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때 조선의 자주독립을 외치던 이완용은 왜 훗날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반역자가 되었을까.
“지도교수에 따라 모범답안이 바뀐다. 고종이 일본 말을 안 들었을 때에는 이완용이 이에 맞춘 모법답안을 제출한 것이다.”(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
고종은 아관파천 1년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1896년 조선의 광산 금광 채굴권, 전등 전화 전차 부설권, 삼림 채벌권을 미국과 러시아 등 열강들이 가져가버렸다. 이완용도 고종의 총애를 잃고 전라북도 관찰사로 좌천당했다. 이어 양아버지가 죽고 3년상을 치르며 중앙 정계와도 멀어졌다.
하지만 이완용에게는 다시 변신할 기회가 왔다. 1905년 11월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에 온다는 소식이 왔다. 메이지 유신 정부 초기, 이토 히로부미는 같은 조슈번(야마구치현) 출신으로 3살 위인 정적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경쟁관계다.
메이지 정부 3대와 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군사행정가인 야마가타는 일본의 계파정치를 만든 실력자다. 이토가 결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반면 이토는 외교, 통상에 강하다. ‘조슈5’ 멤버로 영국 유학(런던대학교) 경험이 있어 영어 구사도 가능했다. 이토는 일본에서 입지가 약하면 외교로 존재감을 알린다. 정한론자들을 누르고 조선 식민통치로 실적을 올리려고 했다. 1909년 하얼빈에 러시아 재무대신을 만나러 간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1905년 11월 16일 경운궁의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전날 밤 손탁호텔 회의장. 47세의 이완용은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때문에 이미 2번의 전쟁을 치렀고, 이제 러시아까지 격파했으니, 한국에 대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일본 천황과 정부가 타협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니, 우리 정부도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이완용)
이런 걸 알아서 기어주는 것이라고 했던가.
“조선에 꽤 쓸만한 대신이 있었군.”(이토의 생각 추측)

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는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지목되기도 전에 스스로 나서서 말하면 눈에 띄잖아요. 이완용은 학부대신(교육부장관)이라 대신 중 서열이 낮은 편이다. ‘저야말로 우수한 학생입니다’를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그 자리에서 눈에 띄려고 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이토 역시 ‘좋아. 이 사람을 쓰자’라고 생각했겠죠. 이게 이완용이 부상한 가장 큰 이유”라고 말했다.
서영희 한국공학대학교 교수도 “1905년 9월 학부대신으로 드디어 중앙정계에 복귀했지만, 본인이 미국파로 오래 활동했기에 일본과 접점을 확실하게 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고요. 그렇기 때문에 교묘하게 그런 찬성의견을 말할 수 있게 분위기를 바꿨다고 볼 수 있죠”라고 설명했다.
일본은 1904~1905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육지에서는 오오야마 이와오,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버티고 있었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해군의 미카사 전함이 쓰시마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해 제해권을 잡았다.
이완용 행보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러일전쟁이 한창인 1904년 10월경부터다. ‘역사스페셜’ 제작진은 1930년대 신문 기사에서 이완용의 친일 ‘전향 운동’ 개시를 짐작할 수 있는 새로운 기록을 발굴했다.
기사에 의하면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이완용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10년전 주한일본공사였던 고무라 주타로를 떠올렸고, 그가 현재 일본 외무대신이라는 점을 고려해 지인을 도쿄로 보내 신상 상담을 시작했다. 친일파로 변신하기 위해 자신의 거취를 상담하는 등 은밀히 물밑 작업을 벌인 것이다. 이후 이완용은 친일파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일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완용 조카가 정리한 회고록으로 이완용 평전이라 할 수 있는 ‘일당기사’(一堂紀事 일당은 이완용의 호)에 따르면, 이완용은 시대에 따라 노선을 바꾸는데,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다.
“하늘의 이치에도 춘하추동이 있으니, 이를 변역(變易. 고쳐서 바꿈)이라 한다. 사람의 일에도 동서남북이 있으니, 이것 역시 변역이라고 한다.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고 세상 형세에 맞게 처신해야 한다.”(이완용)
기무라 간 교수는 “이완용의 친일은 어떤 신념이라기 보다는 기계적 반응에 가까웠고,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용하기 쉬운 인물이 없었던 거죠”라면서 “시대가 바뀌면 그에 맞는 답안을 완벽하게 써내는 사람. 이렇게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역사가 얼마나 고난으로 가득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흔히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고종이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보낸 외교활동인 ‘헤이그 특사 사건’에 분노한 일제가 고종의 강제 퇴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제작진이 확인한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헤이그 특사 사건이 일어나기 반년 전인 1906년 말 이완용은 당시 통감 대리이자 일본군 사령관인 하세가와를 찾아가 고종의 폐위를 먼저 제안한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 신하들이 폐하의 생각을 바꾸려고 했지만 불가능하다. 나아가 다음의 수단은 폐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 기록에는 이완용이 폐립(廢立. 현 임금을 폐하고 그 자리에 새 임금을 세움)을 언급했다. 이완용이 고종 폐위를 당당하게 먼저 제안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총애를 받던 신하는 과거일 뿐이다.
결국 고종은 1907년 7월 19일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보다 한달 앞서 이완용은 내각수반이 됐다. 고종의 강제 퇴위가 알려지자 이완용은 민중들의 저주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3년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병합됐다. 물론 그 때도 이완용은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최근 한일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초부터 이완용이 직접 쓴 6개월 치의 일기인 ‘일당선고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 시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일기에는 놀라울 만큼 평온한 일상이 기록되어 있다. 망국의 슬픔이나 고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라를 잃은 고민이 하나도 없다니. 그는 지인들과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고 전시회를 찾아 서화를 감상하며, 전국 각지의 토지를 시찰했다. 전국 각지에 부동산이 많았으니, 요즘 말로 하면 ‘임장’(臨場)을 즐겼던 것 같다. 실제로 1920년대 기록에 의하면 이완용은 여의도 면적의 5배에 달하는 땅을 소유한,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였다.
이완용은 망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았다. 경복궁을 막았던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1926년 10월에 완공됐고, 김영삼 정권인 1996년 11월에 완전 철거됐다.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신사참배, 창씨개명, 한글폐지 정책 등을 시행했다. 이 정책에 앞장 선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다. 총독부 근무자중 3분의 1이 조선인이었다.
시간여행자 지승현은 묻는다. 이완용이 그렸던 미래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식민통치의 상징(조선총독부)은 백년도 채 되지 않아 사라졌다. 하지만 역사의 기억은 또렷이 남아있다. 오늘의 선택은 또 어떤 역사로 남게 될까요? 선택 잘 하라는 얘기다. 이완용의 선택은 과거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